19세기 중반 미국의 대기업은 모두 철도 회사였다. 남북전쟁 이전부터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 뉴욕 센트럴,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센트럴, 미시건 센트럴 등 산업 중심지 동북부에서 확산되는 철도망을 책임졌던 기업들이었다. 그 무렵 대륙횡단 철도의 양대 산맥인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CP)와 유니언 퍼시픽 레일로드(UP)가 등장했다. 이전의 기업들은 새로 등장한 이 두 공룡의 위세에 눌려버렸다. CP와 UP는 미국 최대의 대기업이 됐다. 현대식 "행정 조직'을 갖춘 최초의 사기업으로 등장한 것이다. CP와 UP는 철도 건설 및 운영뿐 아니라 부동산, 금융, 정부 기관 관리(대관 업무) 등 대기업이 포괄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조직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조직 체계는 기업의 확장을 더욱 가속화했고, 제조업, 광산업, 마케팅 분야까지 회사의 시장 영역을 팽창시켰으며 미국 산업 자본주의를 폭발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CP와 UP는 숙명적인 경쟁의 장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서부에서 출발하는 CP와 동부에서 출발하는 UP가 만나는 지점에서 대륙횡단 철도가 연결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두 회사는 한 치라도 더 상대 진영을 향해 철도를 건설하려 했다. 부설 철도 길이에 따라 정부 보조금과 주변 땅을 더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CP와 UP는 사활을 걸고 철도 건설에 매달렸다.
CP는 1863년 1월 8일 착공식을 했다. CP의 창업자 그룹 "빅4'의 한 사람이었던 스텐포드가 첫 삽을 떴다. 대륙 횡단 철도의 본격적인 노반 공사는 겨울이 잦아들고 땅이 마르는 2월에야 시작됐다. CP의 앞에는 거대한 암초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과 철도의 탄생
첫 번째 장벽은 자연이었다. 시작 지점부터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야 했다. 사람들은 철도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을 수 있을지 의심했다. 이 산맥은 설악산 울산 바위와 같은, 거대한 하나의 화강암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구름을 품고 있는 거대한 거인이었다. 산맥은 능선과 고원을 이뤘고, 협곡을 만들었다. 협곡에 쌓인 만년설이 강줄기를 만들어 냈다. 태평양을 건너온 해풍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부딪혀 상승기류를 형성하다 고개를 넘으며 많은 안개와 비를 뿌렸다. 산맥의 정상부근은 빙하로 덮여 있었고 북에서 남쪽으로 1800미터에서 4200미터에 이르는 수 십 개의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육로를 통해 이동하는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 여정을 끝내야 했다. 여행은 동부의 출발지에 따라 5~6개월이 필요했다. 보통 5월에 출발할 경우 11월까지는 여정을 끝마쳐야 했다. 일단 로키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자리잡은 동장군이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인력 문제였다. 대륙횡단철도는 거대한 공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건설용 중장비가 없던 시절에 시작됐다.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서부로 온 사람들 대부분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황금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임금도 얼마 안 되는데다 지옥 같은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철도 건설 현장은 외면됐다.
미국 서부 끝,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가 만든 도시였다. 1848년 캘리포니아의 아메리칸 강 지류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동부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 아일랜드, 호주, 중국, 일본에서까지 금을 찾아 모여들었다. 당시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쇄도한 사람들을 "49년에 온 사람"들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들 중 금을 발견해 부자가 된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가 이루어진 시기 1000명이었던 인구가 6년 만에 5만 명을 돌파하기도 한다. 1800년대 중반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여정은 어땠을까? 대륙을 횡단하든, 파나마 해협을 건너든, 배로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가든, 모두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 없었다.
1849년, 훗날 CP의 "빅4' 중 한 명이 될 뉴욕 주 출신 찰스 크로커는 처음에 금광을 찾아 동부를 떠나왔다. 자신이 꾸렸던 골드러쉬 팀의 리더 크로커는 20세의 팔팔한 나이였다. 말을 타고 육로를 달렸고, 미주리 강에서는 증기선을 이용했다. 서부의 초입으로 들어가는 아이오아주부터는 강 연안에서 말들의 먹이인 풀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서부 행을 시작하던 크로커의 5월 14일자 일기에는 "우리는 문명을 뒤로한 채 여행을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서부로 향하는 그룹들은 많았다. 크로커의 팀은 늪지와 사막과 평원을 끊임없이 행군했다. 드넓은 평원에서 폭풍우가 몰아치기라도 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를 해야 했다. 광대한 평원으로 이어진 네브라스카 주를 횡단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작은 조각배에 몸을 의지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야생화와 대평원의 짐승들, 아무리 가도 끝이 없을 것처럼 하늘과 맞닿은 땅은, 인간을 쉽게 무력화했다. 아치 모양의 하늘과 그 위를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음침한 눈빛은 대낮의 공포를 조장했다. 겨우 설치한 캠프에 갑자기 덮친 강풍이 모닥불 위의 주전자와 식량과 텐트를 휩쓸어가기도 했다. 크로커 일행은 10명의 젊은이들과 20여 필의 말로 구성돼 있었는데, 잠을 자는 동안에는 조를 나누어 불침번을 서야 했다. 낮 동안의 행군으로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말을 지키지 못해 도둑맞게 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저녁 무렵, 캠프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는 일행끼리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크로커는 그때마다 옆구리의 권총부터 꺼내들었다. 굶주림과 목마름, 전염병을 겪으며 반년 동안 이동했던 서부 이주민들이 가장 많이 본 것은 죽음이었다. 평원과 산맥을 넘어 운이 좋게 살아서 서부로 도착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기 위해 파나마를 통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 또한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돌파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동부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까지 간 뒤, 육로로 파나마를 가로질러 다시 배를 타고 서부로 가는 방법이었다. 정글의 늪지대와 전염병, 원주민들의 공격, 안내인들의 배신 등 비용과 위험에 있어서 감수해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아예 남아메리카 최남단, '호른곶'을 도는 방법도 있었는데 최소한 6개월이 걸리고 2만9000킬로미터에 이르는 항해를 해야 했다. 비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의 항해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황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온 땅에서 곡갱이와 망치를 가지고 철도를 건설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철도공사는 고되기로 악명이 높았다. 더구나 CP가 처음 부딪힌 공사 구간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오르는 길이었다. 산을 깍고 땅을 다지고 육중한 레일을 옮기고 등짐으로 자갈을 뿌려야 하는 일이었다. 중장비는커녕 변변한 도구도 없이 인간의 육체만으로 공사를 진척시켜야 하는 지옥 같은 일이었다. 숙식 제공에 일당 3달러를 받고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메리카에 막 도착한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동부 뉴욕이나 워싱턴의 직업소개소를 통해 철도 현장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남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CP의 경영진들은 육군성에 남군 포로 5000명을 보내달라고 진정을 냈지만 거부 당했다. 해방된 흑인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멕시코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쓰려 했던 일도 허사였다. 1864년 여름 서부에 막 도착해 철도 현장에 고용된 2000명의 인부들 중 1900명이 뜨거운 식사 한 끼를 먹어치우고는 네바다 금광으로 떠난 일도 있었다. 공사를 책임진 CP의 경영진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지역 신문 <새크라멘토 유니언>과 새크라멘토시 곳곳에는 "인부 구함, 인원 5000명. 우리와 함께 장기적으로 일하실 분이나 경력 감독을 찾습니다"라는 광고가 붙었다. 일부 사람을 끌어모으기는 했지만 철도공사 현장에 왔던 사람들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만리장성을 만든 중국인, 아메리카 대륙으로 오다
크로커가 고심 끝에 생각해낸 대안은 중국인 고용이었다. 그러나 CP의 경영진들 상당수는 중국인 고용에 난색을 표했다. 특히 CP의 총책임자인 스탠포드는 중국인들을 사실상 '인간 쓰레기'로 취급하면서, 당시 캘리포니아 주시사 선거 때 만연했던 아시아인들에 대한 경멸 풍조에 편승했다. 스탠포드는 1862년 주지사 취임 연설에서 아시아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CP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CP직원들을 중국에 파견해 철도 공사에 투입할 노동자를 데려오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 중국인들은 1800년대 초반부터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중국인들 상당수는 금을 찾아 돈을 벌수 있다는 인력 송출업체의 선전을 믿고 전 재산을 투자해 미국으로 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광산 채광이 금지되어 있었다. 광산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면허세 명목의 광부세와 물세를 내야 했다. 여기에 개인세, 의료세, 교육세, 재산세도 내야 했지만 투표권은커녕 아이들의 공립학교 입학도 할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중국인들에게는 사실상 경제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과도한 의무만 지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 숫자는 6만 명에 달했다.
캘리포니아 대학 밴크로포트 도서관에 있는 중·영, 영·중판 외국어 관용집의 내용은 당시의 중국인 현실을 잘 드러내 준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같은 가장 기본적인 표현들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대신 "월급을 8달러나 달라고? 6달러면 충분한데 상당히 어리석군.", "창문 청소, 바닥 청소, 빨래, 계단 청소를 해야 함.", "임금을 더 깎아야 하겠어.", "네 마님. 저를 때리지 말아 주세요.", "길을 걷다가 두 번 씩이나 매질을 당했습니다.", "감독이 임금을 주지 않습니다" 같은 말들로 채워져 있다.
100년쯤 후에는 위와 비슷한 문헌이 한국의 대학 도서관 자료실에서도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2011년부터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이 만들어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몽골 등 아시아 15개국에 보낸 <너도나도 한국어>란 교재는 1860년대 캘리포니아의 중국어 교재와 닮은꼴이다. 교재에는 노동자가 사장에게 "안녕하슈?"라고 인사하자, 사장이 "야! 인마, 안녕하슈가 뭐야? 안녕하세요? 이렇게 하는 거야, 알았지?" 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자랑스러운 세계 최장 노동 시간 국가이자 노동 경시 국가답게 잔업과 야근을 당연시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반말이 예사로운 내용의 교재가 아시아 만방에 퍼져 있다.
크로커는 인부난의 현실을 들이대며 중국인 고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우선 50명의 중국인들을 고용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고용된 중국인들은 쿨리(Coolies)라고 불렸다. 쿨리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당시 일을 못하는 인도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인 것으로 힌두어에서 온 말이다. 인도로 착각한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콜럼버스의 후예들이 인도에서 넘어온 말로 중국인들을 멸시했다.
미국인의 의심에 찬 눈초리와 무관하게 철도공사 현장에서 50명의 중국인들이 보인 놀라운 성실성은 CP가 성공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CP경영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중국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성인 남자가 대다수인 캘리포니아의 중국인 공동체는 사회 밑바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들은 백인보다 형편없이 낮은 임금을 감수하면서도 가혹하기로 소문난 철도공사에 뛰어들었다. 1865년 말 시에라네바다 산맥 노선에서 작업하는 중국인은 7000명으로 불어났다. 2000명 정도의 백인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체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대부분 상대적으로 편한 작업에 투입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힘들고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노반 공사, 발파 작업, 거대 나무 쓰러뜨리기, 터널 폭파 작업을 전담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만리장성뿐 아니라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횡단철도 건설의 진정한 주역이었다.
CP공사 현장에서 중국인들의 진가는 골짜기에서 발휘됐다. 깎아지른 650미터 절벽 아래로 아메리칸 강이 흐르는 곳, CP는 75도 경사의 산을 타고 넘어가는 공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관에 부딪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형상 터널을 뚫을 수도 없는 곳이어서 산을 뱀처럼 타고 가듯 선로를 놔야 하는데, 가파른 절벽에서 발파 작업을 하고 길을 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인 노동자 한 명이 백인 책임자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조상이 양쯔강에 요새를 만들 때 썼던 방법을 제안했다. 화약을 발명한 나라의 사람들답게 화약을 다루는 손재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갈대를 모아 바구니를 짰다. 바구니는 농구 골망처럼 둥근 모양으로 허리까지 올라오는 높이였으며 맨 위쪽에 네 개의 작은 구멍을 뚫었다. 중국인들은 밧줄에 연결된 바구니를 절벽 꼭대기에서 서서히 내렸다. 바구니에는 정과 망치를 가진 중국인 한 사람이 화약을 싣고 들어갔다. 바구니에 탄 중국인 노동자는 암벽에 구멍을 뚫고 화약을 끼워 넣은 뒤 심지에 불을 붙이고 절벽 위로 고함을 쳤다. 고함 소리에 맞춰 절벽 위의 노동자들은 온힘을 다해 바구니를 끌어올렸다. 엄청난 폭파음과 안개 속에 허옇게 돌먼지를 뒤집어쓴 바구니 안의 노동자는 다시 다음 폭파 지점으로 내려졌다. 가끔씩 바구니에 연결된 끈만 끌어올려지는 일도 생겼는데 이럴 경우 실종 처리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정확한 사상자 수에 대한 기록은 남겨지지 않았다.
철도공사현장에서는 안전 수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작업 감독자의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67년 CP의 경영진들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온순하기만 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화약을 다루고 붕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터널공사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35달러에서 40달러로 인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줄여줄 것을 요구했으며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채찍질을 엄격히 금지하고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중국인들의 요구사항을 역으로 해석하면, 그들은 지옥 같은 건설 현장에서 채찍질을 당했으며, 탈출도 못하고 폭발이나 붕괴의 위험을 감수했고,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으며, 월급이라야 하루 1달러를 조금 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의 강제 노예 노동에 내몰린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업 진압에 나선 CP의 경영주 중 한명인 찰스 크로커는 일주일 동안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시켰다. 일주일 만에 노동자 대표를 만난 크로커는 임금 인상은 들어줄 수 없고 8시간 노동은 고려해보겠으며 인격적 대우를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대신 파업을 풀지 않으면 무장 군인들을 데려오겠다고 협박했다. 파업이 끝나고 중국인 노동자들이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눈에 보이는 채찍질만 줄어들었고 8시간 노동은 지켜지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유령이 그곳을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화약은 철도공사 내내 가장 중요한 공사자재로 쓰였다. 이 때문에 폭발 사고의 위험은 철도건설 노동자들 옆을 친구처럼 따라다녔다. 특히 건설기간 중에 새로 도입된 신형 화약은 기존 화약의 폭발력과 상대가 안 될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스웨덴 사람 알프레드 노벨이 개발한 니트로글리세린을 원료로 한 폭약은 다루기 힘들고 발화의 예민함 때문에 위험도가 높아 처음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효용성 때문에 점점 더 많은 공사현장에서 사용됐다. 사고가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피해자가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대륙철도공사현장에서의 화약 사용량이 남북전쟁당시 전투에 사용됐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결국 진짜 전쟁은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한 철도 부설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CP의 한 기관사의 말로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말은 대륙횡단 센트럴 퍼시픽 철도 건설의 모든 것을 집약했다.
"폭약과 중국인은, 그 먼 옛날 창조주가 인간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에 놓아둔 흙과 바위에 맞서기 위해 사용된 유일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철도회사의 목표는 안전한 철도가 아니라 "무작정 건설"이었다. 일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몇 가지 문제가 있더라도 선로를 깔아야 했다. 부설된 선로의 길이만큼 확보되는 땅과 정부 보조금에 눈이 먼 사업자들이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던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CP의 기관장 몬테규는 수시로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공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공사를 마치는 것뿐이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은 "빨리빨리"였다. 이 덕분에, 완성된 대륙횡단 철도 노선 곳곳에서 대대적인 보수 공사는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뉴욕 트리뷴>기자였던 앨버트 리처드슨은 "그들은 가장 강한 성채 안에 몸을 숨기고 자연을 포위한 위대한 군대였다. 그리고 그 험준한 산맥은 마치 거대한 개미총 같았다. 그곳에서 중국인들은 삽질하고 수레를 밀고 바위와 흙을 폭파했고 그동안 그들의 흐릿한 달빛 모양의 눈은 우산처럼 생긴 커다란 바구니 모양의 모자 밑에서 밖을 뻔히 응시하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겨울은 더욱 혹독했다. 눈사태가 이미 공사가 끝난 선로를 쓸어버리기도 했다. 눈사태가 선로만 쓸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발파 작업에 따른 눈사태로 생매장되었던 중국인 캠프의 노동자 20명은 봄이 되어 눈이 녹은 뒤에야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눈사태에 매몰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을 또 다른 눈더미가 덮치기도 했다. 산 곳곳의 중국인 캠프는 끔찍한 추위와 잇따르는 눈사태의 공격 속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눈사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공포에 떨기도 했다. 눈 속에 완전히 고립된 캠프의 200여 노동자들은 옥수수 가루와 차로 굶주림을 버티며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대륙횡단 철도는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곳의 노선이 옮겨지거나 재시공되기도 했는데, 시에라네바다의 철도 일부는 아직도 운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철도 여행객들은 그 환상적인 경치에 "원더풀"을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 아름다운 철도가 달리는 골짜기 곳곳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중국인 노동자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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