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박근혜 정권을 넘어서려면 87년 6월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데 1987년에는 6월 항쟁만 있었던 게 아니다.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도 있었다. (☞관련 기사 : 우리의 6월을 넘어서자!)
그 해 여름 내내 수천 건에 달하는 자발적 파업이 이어졌다.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투쟁이 터져 나왔다.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노동조합을 새로 만들었고, 노동조합이 있어도 어용인 곳에서는 민주노조를 쟁취하려고 싸웠다. 누가 투쟁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고 지휘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중 파업이었다.
영화 <변호인> 마지막에는 주인공 송우석이 피고가 돼 재판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흐름만으로는 마치 부산의 6월 항쟁 와중에 구속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모델인 변호사 노무현이 1987년에 피고로 법정에 선 것은 6월 항쟁 때문이 아니었다. 6·29 항복 선언 이후, 경남 거제 대우조선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이른바 '제3자 개입 금지' 위반). <변호인>은 이 또 다른 중대한 역사적 맥락을 단지 생략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아무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민주 노조 운동'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 운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궤적과 꼭 마찬가지로,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이 한 세대의 운동은 지금 두터운 장벽 앞에 멈춰 서 있다. 27년 전 그 여름에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파도를 이뤘던 노동자들은 이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잘게 나뉘어 있다. 그래서 그 해 6월의 거리만큼이나 7, 8, 9월 파업의 기억들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다.
허나 이 경우에도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진부한 경구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잘못은 어쩌면 '초심'에서부터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출발점 자체에 이미 커다란 한계가 내장돼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우리의 6월에 그런 한계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7, 8, 9월도 말이다.
사실 노동 운동 안에서는 오랫동안 이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돼왔다. 그래서 극복 과제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정리된 상태다. 민주노조 1세대가 노동조합의 표준적 조직 형태로 받아들인 기업 노동조합이 주된 극복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를 넘어서고자 산업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되기도 했다.
올바른 진단이다. 기업 노동조합은 한국을 제외하면 일본 정도에나 존재하는 변칙적인 조직 형태다. 이것은 '노동조합(union)'의 정의 자체와 충돌한다. 노동조합이란 기업이나 국가(일상어로는 '정부'나 '정권'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와 구별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사회'다. 기업, 국가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이들에 맞서 대항력, 교섭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자면 기업 경계 더 나아가 국경까지 넘어선 독자적인 조직 범위 그리고 그에 따른 정체성과 일상 활동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기업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이러한 본분에 위배된다. 애초부터 기업 간 구획에 스스로를 맞추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조합은 기업이라는 기성 '사회'에 갇힌 그 하부 구성 요소가 되고 만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기업 사회를 넘어 자신들의 자율적 공간을 열 수 없음을 자인하는 격이다.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 전략이 그토록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 운동의 이런 약점을 치고 들어온 덕분이었다. 자신들의 '사회'를 구축하지 못한 한국의 노동자는 수많은 '부족'들로 갈라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산업 노동조합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신자유주의의 노동자 분할 책략에 추월당해 버렸다. 기업 노조들을 모아 산업 노조의 겉모양이라도 만들어보려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노동자들은 여러 '부족'으로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산업 노조로 나아가보기도 전에 피로감부터 먼저 밀려오는 형편이다. 이 세대 안에 기업 노조 체제를 넘어서기는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회의마저 인다. 한국 사회는 노동 운동마저 일본 자본주의를 뒤따르는 것만 같다.
그래서 노동 운동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 노조를 산업 노조로 바꾸려 하기보다는 아예 그 바깥에서 산업 노조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또한 기업 노조 체제를 보다 철저히 대체하기 위해 산업 노조와 사업장 조직, 즉 작업장 평의회(works councils)가 공존하는 서유럽식 노동 운동 구조에 주목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자들의 '사회'를 구축하자면 노동조합이 바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와 연결된 협동조합, 민중의 집 등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제가 없다. 얼마나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민주노총을 결성하고 산업 노조의 외관을 만드는 데만도 한 세대가 걸렸는데, 위의 과제들을 수행하자면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 할지, 숨이 턱 막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갑자기 한 달 전 사건들이 엄습했다. 박근혜 정권의 철도 사유화에 맞선 철도노조의 파업, 이에 호응한 젊은 세대의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 그리고 민주노총 본부에 대한 공권력의 침탈, 민주노총의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 돌입…. 이러한 사건의 연쇄 속에서, 예기치 않은 가능성들이 개화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에 항의하며 시작됐다가 다소 침체되는 듯 보이던 촛불 시위가 다시 힘을 얻었다. 세대 장벽에 가로막혔던 청년층과 기존 노동 운동 사이에 활발한 대화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비록 정권의 헛발질 덕분이기는 했지만 노동 운동 자체가 모처럼 활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 운동이 박근혜 정부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의 선두에 서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1987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정확히 그 반대 양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실은 1987년 이후 노동 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다. 6월 민주 항쟁 '뒤에'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왔다는 이 단순한 순서야말로 우리 노동 운동의 천형(天刑)이다.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 항쟁의 승리가 열어놓은 공간 덕분에 터져 나왔다. 이것은 노동 운동이 민주화 운동을 선도한 게 아니라 그 수혜자에 그쳤다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에도 브라질의 최근사는 우리와 선명히 대비된다. 브라질에서는 한국과는 정반대 순서로 역사가 전개됐다. 1978~1979년에 노동자 대투쟁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대통령 직선제 쟁취 운동이 있었으며 1986년에 제헌의회 선거로 민주화가 시작됐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깨어난 브라질 노동자들은 1980년에 이미 자신들의 정당, 노동자당(PT)을 건설해놓은 상태였다. 4년 뒤 대통령 직선제 쟁취 운동이 시작되자 그 맨 앞에 선 것은 노동자당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방적으로 독주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누가 봐도 노동계급이야말로 어느 고전의 표현 그대로 "민주주의의 전위 투사"였다. 그래서 직선제 쟁취 운동 30주년을 기념하는 지금 브라질의 집권당은 다름 아닌 노동자당이다.
민주주의 투쟁과 노동자 투쟁의 서로 다른 배열이 브라질과 한국의 노동 운동에 이토록 거대한 격차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철도노조 파업으로 열린 최근 국면은 한국 노동 운동이 이 천형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얼핏 보여주었다. 노동자 투쟁이 민주주의 투쟁을 선도하고 그 구심 역할을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비록 맹아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노동 운동이 "민주주의의 전위 투사"로 나서자 동시에 노동 운동 자체의 활력 또한 전에 없이 고양됐다.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노동 운동이 사회 전체의 돌파구를 열려고 나설 때에 비로소 노동 운동 자체의 전환 또한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를 대변하려고 나서야만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일 또한 날개를 달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노동 운동의 활로를 보았다.
87년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번에는 달리'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떻게 달리' 다시 시작할지의 답은 분명, 다른 어떤 먼 미래가 아니라, 철도노조 파업에서 그 이후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지금 이 시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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