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번역가 전대호가 전남대학교에 재직중인 철학자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대한 장문의 반론을 '프레시안 books' 편집부로 보내왔습니다. '프레시안 books'는 일반적으로 신간을 중심에 놓고 서평 섹션을 꾸려가고 있습니다만, 한국 철학계에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하려는 도전적인 이 글이 가지는 가치를 좀 더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기사 지면에 배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논쟁에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편집자>
1.
철학에서 주체는 얼마나 중요할까? 다른 견해도 있겠지만, 적어도 칸트에서 헤겔까지 이어지는 독일 고전철학을 자기 생각의 바탕에 깐 사람이라면, 주체란 철학 전체가 응축된 블랙홀과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헤겔은 참된 것을 주체로 파악하고 진술하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했다. 대체 주체가 무엇이기에 철학의 전부라 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일까? 비유를 들자면, 철학에서 주체는 기독교에서 구원, 불교에서 불성만큼 중요하다.
김상봉은 서양 대 한국이라는 전통적인 대립 구도를 떳떳이 바탕에 깐다. 숱한 이들이 촌스럽다며 외면하고, 또 숱한 이들이 친숙한 옛 가락을 떠올리며 젓가락 장단을 준비할 줄 뻔히 알 텐데, 그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이 낡은 멍석을 펼친다. 그는 서양 철학을 극복하고 그것과 다른 한국 철학을 세우고자 한다. 한국인에게 맞는 주체 철학을 세움으로써 심지어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힌 한국 역사를 타개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의마저 내비친다.
바로 이것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술자리에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던(지금도 틀림없이 나오고 있을) 그것. 그럼에도 서양 언어들이 지배하는 철학 강의실에서는 죽은 듯 움츠러들던 그것. 예속된 역사 앞에서 느끼는 참담함, 우리의 사상을 갖고 싶은 욕망, 주체다운 삶을 향한 열정이다. 그러니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이 땅에서 철학하기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이다. 내가 이 책을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다.
이처럼 거대하고 새로운 일을 감행하다 보니 김상봉이 짊어진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는 1)서양과 한국을 구분해야 하고, 2)서양의 주체성을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며, 3)한국 고유의 서로주체성 이론을 세워야 하고, 4)한국에서 “참된 자유와 주체성을 실현”(165쪽)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제들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서로주체성의 이념>의 몫이 아니다. 이 책은 과제들을 열거하고 해결의 단초로 “서로주체성”이라는 이념을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김상봉은 이를 “밑그림”(311쪽)으로 삼아 완전한 “철학체계”(300쪽)를 구성할 작정이다. 그러고 보니 책의 부제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에 붙은 “서론”이라는 표현이 벌써 본론을 예고한다.
본론의 완성 여부를 떠나서, 이런 기백을 지금 이 땅의 철학계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축복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원칙 아래 굳건히 웅크린 기득권 철학교수들 사이에서 김상봉은 단연 발군이다.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가능하다면, 주체라는 미로에 단기필마로 뛰어든 그를 돕고 싶다.
그래서 나는 비판의 날을 벼린다. 주체로 사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늘 증명되듯이, 최고의 도움은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주체에 대해서 가진 생각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또 다른 ‘나’들이 개입하여 더 많은 균열과 다양성을 추가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는 주체의 그림을 더 참되고 온전하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품어본다.
우선 ‘주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김상봉과 나를 비롯한 한국어 사용자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잠정적인 정의를 내놓을 필요가 있다. 특히 인문학자가 아닌 일반인은 ‘주체’라는 단어를 사용할 기회조차 드물 테니, 그저 암묵적인 이해를 전제하고 ‘주체’를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는 “주체성이란 다른 무엇보다 자기의식에 존립한다”(180쪽)는 김상봉의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면서 일반인에게 더 잘 와 닿는 상식적 정의로 ‘주체란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다’를 나란히 놓겠다. 아주 쉬운 이야기다. 김상봉, 이 글을 쓰는 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저마다 주체다. 동의어를 꼽자면, ‘주체’, ‘나’, ‘자아’가 기본적으로 같은 뜻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한 사람이 자신과 맺은 “자기관계”(63쪽 등)를 표현한다. 요컨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체란 자기관계다.’
위 인용문에서 김상봉은 “자기의식”을 주체의 본질로 내세우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의식은 자기관계의 한 유형이므로, 이 일반적인 정의를 받아들이리라 믿는다. 물론 ‘자기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자기관계인지, 이를테면 ‘나’와 ‘나’가 서로를 바라보는 자기관계인지, ‘내가 내 맘대로 안 돼’라는 말에 담긴 갈등하는 자기관계인지, 서로 대화하는 자기관계인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자기관계인지 등은 매우 중요한데, 이 문제는 차차 다루기로 하자. 일단 중요한 것은 ‘주체란 자기관계다’라는 가장 일반적인 정의이며, 한국어 사용자 대다수는 이 정의에 동의할 것이다. 이제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담긴 김상봉의 주체 이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2.
김상봉은 서양 철학이 이야기해온 “홀로주체”를 비판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서로주체”를 참된 주체로 옹호한다. 홀로주체란 무엇일까? 우선 그것의 상징은 나르시스다.
“너 없는 나르시스의 정신세계를 가리켜 우리는 홀로주체성이라 부른다.”(135쪽)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보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전설 속 나르시스처럼, 홀로주체는 “타자적 주체 없는 세계에 홀로 군림하는 주체”(166쪽)다. 더 깊이 분석해서 홀로주체의 근본 구조와 특징을 밝혀내면 “홀로주체성은 (…) 자기관계와 자기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 (…)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234쪽)이다. 김상봉은 이런 홀로주체가 서양 철학의 역사 전반에 스며들어있다고 본다. 근대를 넘어 니체의 철학에서도 발견되는 서양 철학의 변함없는 근본 특징은 “이제나저제나 자기만을 욕구하는 아집 (…) 집요한 홀로주체성”(133쪽)이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자아가 홀로주체성 속에서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161쪽)
그렇다면 김상봉의 “서로주체”란 무엇일까? 우선 “서로주체성은 (…)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234쪽) 혹은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주체성”(22쪽)이다.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만남”, 정확히 말해서 “인격적 타자와의 만남”(167쪽)이다. 실은 이 만남이 김상봉의 주체 이론의 주춧돌이며 더 나아가 그가 구상하는 철학체계 전체의 주춧돌이다. “우리의 과제는 만남이 (…) 주체성의 가능성을 위한 근거임을 밝히는 것이요, 넓게는 그것이 우리의 경험과 생각 일반의 제일 근거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169쪽)
“요컨대 철학의 체계 자체를 철두철미하게 만남의 이념 위에 세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170쪽)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보듯이, 김상봉의 의도는 기존 주체 이론의 보완이 아니라 혁신이다. “서양적 주체성은 지양되고 극복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33쪽) 그는 서양적 주체성, 곧 홀로주체성을 밀쳐내고 “새로운 주체성의 이념”(233쪽)을 확립하고자 한다. 홀로주체성은 아예 틀렸거나 결함이 있는 개념이라는 뜻일까? 그렇다. 최소한 결함이 있다. 그래서 그는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의식”(267쪽)을 이야기하고 “온전히 내가 된다”(248쪽)는 것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이처럼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서양적 홀로주체를 비판하고 한국적 서로주체를 새롭고 온전한 주체로 옹호하는, 일종의 편 가르기 구도를 기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편 가르기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개념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상실”(203쪽 등)이다.
김상봉이 보기에 한국인은 역사에서 진정한 ‘자기상실’을 겪어본 반면, 서양인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선구적으로 시도하는 한국인의 주체 이론은 오만한 서양인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한국인의 주체 이론은, 자기상실을 겪어본 사람들의 이론답게, 주체성과 자기상실을 뗄 수 없게 연결해야 한다. 서양인의 주체 이론에서도 “자기거리”(203쪽 등), “자기분열”(204쪽 등), “자기부정성”(203쪽 등) 등의 부정적 측면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이 서양적 개념들은 진정한 자기상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자기상실’은 김상봉이 강조하는 ‘만남’의 의미를 알려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가 “주체성은 그 자체로서 만남”(248쪽)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기상실을 동반한 만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만남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민족이라 하여 슬퍼할 필요는 없다.”(289쪽) 이런 의미에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이론은 “자기상실 속에서의 자기실현”(233쪽)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자기상실을 동반한 만남’을 서양 철학의 혁신을 위한 열쇠요, 한국 고유의 철학을 위한 주춧돌이요, 이 겨레가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기 위한 돌파구로 내놓는 것이다.
이 정도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해야 할 이 만남의 성격을 알려주는 다른 표현들은 “하나 됨”(248쪽), “일치”(248쪽), “결속”(299쪽), “모심”(295쪽 등), “섬김”(295쪽 등), “배움”(296쪽 등), “매혹”(230쪽 등) 등이다. 그리고 만남의 결과는 공동체다. 김상봉이 말하는 만남은 “더불어 고통받고 더불어 세계를 형성하는 능동적 주체들의 공동체”(18쪽), “모두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모든 타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생성되는 공동체”(300쪽)를 낳는다. 이로써 체계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저자는 그런 공동체의 실현을 꿈꾸며 책을 마무리한다. 여기까지가 <서로주체성의 이념>에서 내가 주목하는 주요 내용이다.
이제 간단히 내 소감을 밝히겠다. 나는 “주체성은 그 자체로서 만남”(248쪽)이라는 김상봉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 그러나 어떤 ‘만남’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느냐 하는 점에서 김상봉과 나는 퍽 다르다. 김상봉의 “만남”이 “결속”으로 특징지어진다면, 내가 생각하는 ‘만남’의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으로는 “결속”보다는 차라리 ‘싸움’이 더 적합하다. 나는 이를테면 노조 대표와 경영자의 만남, 저자와 서평자의 만남을 나름의 주체 이론의 핵으로 삼는다. 또한 나는 ‘주체성 그 자체인 만남’이 “자기상실”을 동반한다는 김상봉의 생각에도 동의할 수 있다. 단, 그가 “자기상실”을 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고 전제할 때만 그렇다. 그런데 내가 해석하기에 김상봉은 “자기상실”을 나와는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듯하다. 아마도 이 문제가 이 글 전체의 핵심일 것이다.
이제 김상봉의 야심찬 주체 이론에 대해서 크게 네 가지 의문을 제기하겠다. 위에 열거한 그의 과제 네 가지와 연계된 나의 질문들은 이러하다. 1)왜 서양을 굳이 밀쳐내는가? 2)서양적 홀로주체성에는 없고 한국적 서로주체성에는 있다는 “자기상실”은 정확히 무엇인가? 3)왜 시종일관 지배/예속의 구도에 집착하는가? 4)철학자 김상봉은 주체 아닌 자를 주체로 만들 생각인가?
저자가 설정한 과제 하나하나에 의문을 제기하는 셈이니, 결코 만만한 서평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처구니없는 우려를 표하고자 한다. 저자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이 현실적인 공동체에 의존한다면, 그 서로주체성은 각 개인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상충할 위험이 있다. 물론 김상봉의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감안하면, 이 우려는 정말 어처구니없다고 일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오해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래서 그 자신도 문득 “너희들[노예적 정신들]에게 한 말이 아니야!”(239쪽)라고 쏘아붙일 필요를 느낀다면, 차근차근 풀어헤쳐 약점이 될 만한 자리들을 드러내고 점검해야 한다.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우려를 정말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올바른 길이다.
본격적인 해체 작업에 앞서 예비 작업이 필요하다. 다루려는 과제가 워낙 크고 밀도가 높아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난해하기 마련인지, 주체도 예외가 아니어서, 주체를 논하는 것은 무한히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길을 잃기 십상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앞뒤가 다른 말을 하다가 끝내 말을 잃게 되는 불상사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꼼꼼히 살펴보면, 중요하고 난해한 대목들에서 김상봉도 스텝이 꼬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거리” 혹은 “자기부정성”(203쪽 등)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수동성”(176쪽 등)이 나쁜 것이었다가 좋은 것으로 바뀌고 또 거꾸로 바뀌면서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사실 주체라는 논제 자체가 그렇게 꼬이고 얽힌 논의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측면이 확실히 있다. 오죽하면 헤겔은 주체의 구조를 “모순”이라고까지 불렀겠는가!
그러므로 전설 속의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에 의지하듯이, 일단 나의 주체 이론을 정리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갈 필요가 있다. 서평자로서 부적절한 짓일 수도 있겠으나, 어쩔 도리가 없다. 주체라는 미로에 들어가면 거의 누구나(아마 헤겔조차도!) 헤맬 뿐더러, 둘이 들어가면 두 배로, 셋이 들어가면 세 배로 헤매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내가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으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나의 주체 이론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헤겔의 주체 이론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이, 김상봉은 보기 드물게도 헤겔의 주체 이론에 매우 우호적이다. 그가 아는 한, “서양의 철학자들 가운데서 이런 서로주체성의 통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이가 바로 헤겔이다.”(249쪽) 물론 나는 이 말에 곧이곧대로 동의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헤겔을 어떻게 해석하고, 누구의 해석이 맞느냐가 아니다. 김상봉이 자신의 주체 이론을 내놓은 것처럼 나도 나의 주체 이론을 내놓고 대화하는 것이 옳다. 내가 굳이 헤겔을 언급하는 것은 그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체 이론이 김상봉의 것과 번지수가 전혀 다르지는 않음을 미리 말해두기 위해서다.
다음 절에서 펼칠 알쏭달쏭한 철학적 논의를 우회하고 싶은 독자를 위해 나의 주체 이론을 요약해서 제시하겠다. 나에게 주체의 본질은 ‘시스템 안의 <나>와 시스템 밖의 <나>가 나누는 대화’다. 그러므로 주체 안에는 반드시 깊은 ‘균열’(시스템 안과 시스템 밖을 가르는 균열)이 내재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면에서 그 균열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대화하며 산다. 바꿔 말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체다. 이 말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심이 있다는 말,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 불성을 품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다음 절은 이 내용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대목이므로 매우 중요하지만, 부득이하다면 이 내용을 마음에 담아두고 4절로 건너뛰어도 좋다.
3.
주체 혹은 ‘나’란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다. 벌써 이 정의에서 주체의 본질이 자기관계(‘나’라고 부르는 ‘나’와 ‘나’라고 불리는 ‘나’ 사이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자기관계일까? 이 정의는 자기관계를 ‘부름/불림 관계’로 특정한다. 그러나 굳이 따지려 들면, 어떤 식으로든 이미 자기관계가 맺어져 있으니까 ‘자기 부름’이 유효하고 정당하지 않겠는가?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원한다면 ‘자기의식’, 곧 ‘부름/불림 관계’에 선행하는 ‘의식함/의식됨 관계’를 더 근본적인 자기관계로 상정할 수 있겠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한다. 김상봉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이란 다른 무엇보다 자기의식에 존립한다.”(180쪽)
하지만 ‘나’라는 자기관계를 ‘자기의식’으로 대표하는 것은, 무릇 새를 참새로 대표하거나 무릇 나무를 소나무로 대표하는 것처럼, 특정한 맥락을 전제하지 않는 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물론 그 맥락은 철학의 최후 정초(모든 철학적 주장을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을 밝혀내는 일)와 얽혀있어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김상봉의 이론은 이 맥락을 대체로 언급하지 않고, 나 역시 이 글에서 굳이 철학의 정초 문제를 끌어들여 자기의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요컨대 자기의식, 곧 ‘내가 나를 알아챔’은 자기관계의 한 유형이며, 나는 이 유형을 기본으로 삼는 입장을 수용한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나’라는 자기관계의 유형이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점이다. 세상에 오만가지 자기관계가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예컨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아마 일부 독자는 대번에 ‘이것은 자기관계가 아니잖아!’라고 반발할 것이다. 그런 독자에게 이렇게 반문하겠다. ‘작가/작품 관계’가 자기관계가 아니라면, ‘의식하는 나/의식되는 나 관계’는 자기관계가 맞는가? 이 둘째 관계에도 뚜렷한 균열이,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심연 같은 균열이 내재한다(이 균열을 김상봉은 “자기거리”라는 멋진 표현으로 부른다). 자기관계가 지극히 오묘한 것은 그 균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균열 덕분에 성립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관계를 완벽하게 같은 ‘나’와 ‘나’ 사이의 관계로 상정한다면, 삼천대천세계에 자기관계는 없다. 알다시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자기관계도 ‘아버지(성부)/아들(성자) 관계’다. 불교에서는 아마 “보살/중생 관계”가 이와 유사할 것 같다.
‘작가/작품 관계’가 자기관계의 한 유형이라는 것에 여전히 의문이 드는 독자는 주변의 작가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작가에게 작품은 ‘세상에 내놓은 나’다. 그래서 ‘작가/작품 관계’는 자기관계가 맞다. ‘내 목숨처럼 소중한 작품’, ‘내 몸과도 같은 작품’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과장은 있을지언정 비논리적인 헛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작가/작품 관계’를 해명하지 못하는 논리가 틀려먹은 것이다.
물론 작품에 작가가 오롯이 담기는 경우는 당연히 없다. 작품을 내놓는 순간, 작가는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한다. 즉, 작가와 작품 사이에 ‘자기거리’가 발생한다. 그렇다, 무릇 자기관계는 자기거리를 품기 마련이다. 김상봉의 말마따나 “자기의식은 언제나 자기거리의 의식”(203쪽)이다. 그 자기거리에 여러 감정이 끼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개의 작가는 자기 작품이 한편 자랑스러우면서도 몹시 부끄럽다. 자랑스러움은 순간이고, 부끄러움은 오래 간다. 하지만 길게 보면 자랑스러움도 부끄러움도 덧없다. 남는 것은 세상에 나와 있는 작품과 그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선 작가가 맺은 자기관계뿐이다.
또 다른 예로 ‘나’와 ‘나의 행동’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아마 이번에는 많은 독자가 이 관계를 자기관계로 인정하지 싶다. ‘나’가 누구인지를 ‘나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니까 말이다. ‘나’는 곧 ‘나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 자기관계, 곧 ‘나/나의 행동 관계’에도 자기거리가 내재할까? 지금 거론되는 것이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라면, 이 자기관계에도 당연히 자기거리가 내재한다. 도덕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이 자기거리는 ‘나’와 ‘나의 행동’을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나’와 ‘이렇게 행동하는 나’로 고쳐 쓰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 사이에 분명히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거리가 있을 때만, ‘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나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나의 행동’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참고로 ‘나’가 뇌병변 장애인이라면, ‘나의 얼굴 찡그림행동’은 도덕과 무관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이 경우에 ‘나/나의 행동 관계’는 도덕적 자기관계와 무관한 또 다른 유형의 자기관계로 보아야 한다.
‘나’와 ‘나의 행동’ 사이에 ‘자유’라는 이름의 자기거리가 있을 때만 ‘나’가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실은 법체계와 일상의 상식이다. 다르게 행동할 수 있으므로 ‘나’는 ‘나의 행동’과 다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행동’을 ‘나’로 (요컨대 자기관계를)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헤겔이 즐기는 축약표현을 흉내 내자면, ‘나’는 ‘나의 행동’을 떼어놓음과 동시에 거둔다(aufheben).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이다’라는 진술 속에서 ‘나’와 ‘무엇’이 맺는 자기관계를 생각해보자. 이 글을 쓰는 나는 번역가이니, 구체적으로 ‘나는 번역가다’라는 참된 진술을 살펴보자. 이 진술 속에서 ‘주어-나’는 ‘번역가’라는 ‘술어-나’와 자기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자기관계는 당연히 자기거리를 품는다. 내가 번역가이기만 하겠는가? 보다시피 나는 이런 철학적인 글을 쓰는 저자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번역가다’라는 참되고 유의미한 진술이 성립한다. 만약에 내가 번역가이기만 하다면, 위 진술은 ‘번역가는 번역가다’가 되어 아예 무의미해질 것이다. 요컨대 ‘나는 번역가다’라는 진술 속에서 ‘나’는 ‘번역가’라는 술어 속으로 완전히 쏟아져 들어가 머물지 못하고 되튀어 주어의 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번역가’를 거둔다. 거꾸로 말하면, 이 진술 속에서 ‘나’는 ‘번역가’를 거둠과 동시에 떼어놓는다.
이밖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자기관계가 존재한다. 나와 내 자서전 사이의 관계, 나와 내 몸 사이의 관계, 나와 내 자식 사이의 관계, 생물학자인 나와 생물학계 사이의 관계, 말하는 나와 그 말을 무의식적으로 듣는 나 사이의 관계, 지금의 나와 10년 전의 나 사이의 관계, 물리학 책을 읽는 나와 시를 쓰는 나 사이의 관계,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판단하는 나와 일개 서민의 처지에서 판단하는 나 사이의 관계,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 나와 내 안에 불성이 있음을 믿는 나 사이의 관계, 나의 왼손과 나의 오른손 사이의 관계. 이것들은 모두 ‘나’가 좋은 싫든 ‘나’(또는 ‘나’의 것)로 인정하는 무언가와 ‘나’ 사이의 관계다. 또는 ‘나’가 ‘나’로 인정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다. 어디에나 연속성 못지않게 뚜렷하게 균열(“자기거리”)이 있음을 눈여겨보라. 아마 여기까지는 거의 누구나 동의하리라 믿는다.
이제 크게 한 걸음 내딛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양자가 서로를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똑같은 연속성/균열을 품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관계의 한 유형이다. 이 사실은 특히 양쪽 당사자가 보편적 관점을 추구하고 언어가 관계를 매개할 때 잘 드러난다. 예컨대 사형과 사제 사이의 관계, 상담자와 피상담자 사이의 관계, 저자와 서평자 사이의 관계, 칸트와 헤겔 사이의 관계, 의상과 원효 사이의 관계, 설득하는 정치인과 반발하는 유권자 사이의 관계. 헤겔이라면 이 마지막 예를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로 표현할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에나 똑같은 연속성/균열이 다양한 모습으로 있다는 점이다.
깊이 따져 들어가면, 언어를 매개로 삼는다는 것과 보편적 관점을 추구한다는 것은 같은 말일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나’의 내면에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는 연속성/균열, 곧 “자기거리”의 원천이 바로 언어일 가능성이 높다. 나 자신에게도 어렵고 벅찬 논의를 피하기 위해 나는 어디에나 있는 자기관계를 그냥 ‘대화’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려 한다.
참고로 내가 말하려는 ‘대화’는 흔히 ‘변증법’으로 번역되는 헤겔의 ‘디알렉틱(Dialektik)’과 맥이 닿는다. 헤겔이 말하는 ‘디알렉틱’은 항상 이미 어디에나 있는 자기거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과정이다. ‘변증법’은 상반된 둘을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드는 과정이라던데, 그런 ‘변증법’은 내가 아는 ‘디알렉틱’의 정반대에 가깝다.
아쉽게도 김상봉의 주체 이론은 언어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아주 흥미롭게도 “보는 것과 듣는 것”(253쪽)을 다루는 대목에서 언어(정확히 말해서 ‘말’)를 적잖이 건드린다. 그는 ‘보기’를 통해 매개되는 서양적 주체의 자기관계에 맞서서 듣기 혹은 “부름과 응답”(272쪽)을 통해 매개되는 자기관계를 새로운 주체 이론의 활로로 삼는다. 나는 김상봉이 어렴풋이 감지하고 “부름과 응답”이라고 표현한 모범적인 자기관계가 다름 아니라 언어적 관계, 곧 대화라고 본다.
‘대화’는 지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주체만큼 중요하냐고? 그렇다! 내가 보기에 대화는 주체의 본질적 활동이요 심지어 다른 이름이다. 김상봉이 “주체성은 그 자체로 만남”이라고 매기면, 나는 “주체성은 그 자체로 대화”라고 받겠다. 하지만 꼭 짚어둘 것이 있다. 이 대목에서 아마 많은 독자가 묻고 싶을 것이다. 주체성 자체로까지 격상된 ‘대화’는 ‘나’와 ‘나’ 바깥에 실재하는 ‘너’ 사이의 대화냐, 아니면 ‘나’와 ‘나’ 사이의 내면적 대화냐? 어쩌면 김상봉도 이 질문을 던지고 싶을지 모르겠다.
물론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와 자기 사이의 대화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적 대화를 구분할 수는 있겠다. 전자는 안 보이고 후자는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전자는 개인 안에 진정한 의미의 자기거리가 생겨나는 과정일 테고, 후자는 개인이 자신의 치우친 관점을 인정하고 더 보편적인 관점을 추구하는 과정일 테니, 결국 양쪽 다 ‘자기거리의 형성 과정’이 아닌가! 자꾸 전자는 가짜 대화고 후자는 진짜 대화라는 식으로 반발하면, 나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지만, 다행히 받아칠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 언어에서는 개인의 내면적 대화를 일컬어 ‘생각’이라고 한다. 반면에 일상 언어에서 ‘대화’는 개인과 개인 간의 활동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땅의 문화는 언제부터인지 ‘생각’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멋대로 생각한다’, ‘생각만 하고 자빠졌네’ 따위의 부정적인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매몰되어 생각의 진면목을 못 보거나 왜곡하면 곤란하다. 진짜 생각은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가 나누는 진짜 대화다. 생각할 때 ‘나’는 특수한 개인으로서 ‘제멋대로’ 상상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진짜로 생각하는 개인은 어떤 기관이나 공동체에도 뒤지지 않는 공적인 무게를 가진다. 아니 오히려 모든 공적인 무게의 유일한 출처는 진짜로 생각하는 개인이다.
민주공화국의 투표를 생각해보라. 요란한 선동과 홀림과 설득과 대화가 잦아든 뒤, 결국엔 각 개인이 홀로 기표소에 들어가 남몰래 공화국의 미래를 결정한다. 모든 각자의 내면에서 진짜 생각이 작동하고 진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없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제도다. 제도야 서양에서 들어오다 보니 그런 것이고,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 제멋대로 생각해서 투표하거나 생각만 하고 자빠졌다가 욱 하는 감정으로 우르르 쏠려 투표하는 것일까? 이 땅에서는 개인이 진짜 생각의 능력을 자부하거나 자각하거나 타인에게서 확인하거나 타인의 천부적 능력으로 인정하는 일이 드물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은 우리 각자가 그런 내적인 대화 능력을 가졌다고 전제한다. 나는 이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각자는 내면에서 진짜로 생각한다. 즉, 자신과 대화한다.
다음으로 일상에서의 ‘대화’를 생각해보자. 진짜 대화 역시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는 희귀조류와 다를 바 없다. 특수한 ‘나’와 특수한 ‘너’가 진짜로 대화하려면, 특수한 ‘나’가 이미 내면에서 보편적 ‘나’와 대화하고 특수한 ‘너’ 역시 이미 내면에서 보편적 ‘너’와 대화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양쪽 당사자 각각이 외적인 대화와 더불어 내적인 대화를 이어갈 때만, 일상에서 ‘대화’라고 부르는 외적인 대화가 진짜 대화가 된다. 이럴 때만 참된 설득, 합의, 타협, 차이 인정이 이루어진다. 설득당하는 ‘나’는 설득에 성공하는 ‘너’에게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일까? ‘너’에게 “매혹”(김상봉이 중시하는 개념이다!)되거나 ‘너’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는 그런 경우가 적잖은 듯하다. 그러나 더욱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이 우리의 대화를 그런 경우로 깎아내리는 일은 더 잦은 듯하다. ‘선배 잘못 만나 의식화되었다’라는 한때의 시쳇말을 떠올려보라. 이 말은 선배와의 대화와 동시에 ‘나’가 내면에서 자유롭게 진행한 ‘자기대화’를 아예 무시하거나 업신여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나’를 설득한 당사자, ‘나’의 생각을 바꾼 당사자는 선배가 아니라 바로 ‘나’다. 설득은 이럴 때만 진정한 설득이다.
‘너’가 ‘나’를 설득했다는 말은, ‘나’가 이미 아는 바를 ‘너’가 ‘나’에게 깨우쳐주었다는 뜻이다. 특수한 ‘너’가 매력이나 위력으로 ‘나’의 내면을 점령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가 고맙지만, ‘너’는 자기가 한 일은 사실상 없다고 말하고, 그 말은 실제로 옳다. 진정한 대화에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유지시키는 것은 ‘나’ 자신이다!
요컨대 진정한 대화는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반드시 양쪽 당사자의 내적 대화(곧 ‘생각’)와 더불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적 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외적 대화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거꾸로, 외적 대화를 인정한다면 내적 대화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외적 대화가 “서로주체”의 본질이고 내적 대화가 “홀로주체”의 본질이라면, 서로주체를 추어올리면서 홀로주체를 깎아내리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처사일 수 있다.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풀다 보니 ‘개인의 생각’과 ‘개인들 간의 대화’를 제법 길게 논했지만, 다시 본류로 돌아가 이 글을 쓰는 나의 주체 이론을 정리할 때다. 위에서 나는 자기관계의 다양한 예를 열거하고, 이 ‘관계’의 진면목을 ‘대화’로 규정하면서, 아마도 김상봉이 “부름과 응답”으로 표현한 바가 ‘대화’일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제 대화로 맺어진 양쪽 항을 개념화할 차례다.
자기관계를 맺은 양쪽 항을 가리키는 개념 쌍으로 우선 “주체로서의 나”(266쪽)와 “객체로서의 나”(266쪽)가 있다. 흔히 ‘주체로서의 나’는 ‘나-주체’로, ‘객체로서의 나’는 ‘나-객체’로 축약된다. 자기관계를 맺은 두 항을 이렇게 ‘나-주체’와 ‘나-객체’로 규정하면, 자기관계는 주객관계다. 그리고 주객관계로서의 자기관계는 기본적으로 ‘참인 문장에서 주어/술어 관계’와 구조가 같다. 참인(그렇지만 동어반복이 아닌)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는 서로 같으면서 또한 다르다. 마찬가지로, 자기관계를 맺은 나-주체와 나-객체도 서로 같으면서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관계를 주객관계로 규정하는 것에 아무 불만이 없다. 주체 이론에서 자기관계가 토대 중의 토대인 것처럼, 논리학에서 주술관계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다. 그리고 이 두 관계가 공유한 구조가 주객관계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김상봉은 주객관계에 불만이 많다. 그는 주객관계로서의 자기관계를 “사물적 자기관계”(266쪽)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온전한 자기관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나를 의식하되 오직 사물화되지 않는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만이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의식”(267)이다. 젊은 피히테의 목소리를 그대로 듣는 듯한 이 문장에 얼마나 뜨거운 충정이 배어있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그런 순결한 자기의식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자기관계는 ‘객체화’(곧 “사물화”)와 결부되어있다. 혹시 김상봉은 “사물화되지 않는 주체로서의 나”를 만나는 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피히테도, 셸링도, 심지어 헤겔도 한때 그런 특별한 길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적어도 헤겔은 언제부턴가 그 기대를 접었다! 오로지 ‘사물화된 나’에서 ‘주체로서의 나’를 보는 것(원한다면, ‘사물화된 나’를 ‘주체로서의 나’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주체와 나-객체가 맺은 주객관계의 참된 의미다.
김상봉은 왜 주객관계로서의 자기관계에 불만을 품을까? 아마도 주객관계에서 근본적인 분리를, 더 나아가 지배/예속 관계를 보기 때문인 듯하다. 우선 그는 숱한 근대철학 비판자들과 다를 바 없이 주객분리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처럼 생각이 모든 생각되는 대상과[,] 주체와 객체로서 분리되고 나면 우리는 객관적 대상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린다.”(113쪽)
뽕짝만큼 자주 들어 익숙하지만 실은 애매하기 그지없는 이 말 속에 근대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도사리고 있다.
한없이 복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요점만 말하겠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은 분리인 동시에 연결인 묘한 관계가 도처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앎과 관련해서 거론되는 주객관계도 그런 묘한 관계의 한 예다. 위 인용문에서 “생각”이 ‘대상에 대한 생각’이고 “생각되는 대상”이 ‘그 대상 자체’라면(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위 인용문은 요령부득이다!), 이 두 항 사이에서도 분리와 연결의 이중주가 일어난다. 바꿔 말해 ‘생각된 대상’(=‘대상에 대한 생각’)과 ‘있는 그대로의 대상’ 사이에서 분리와 연결의 운동이 일어난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쉽게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생각된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하곤 한다. 거꾸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다시 ‘생각된 대상’으로 재조명되기도 한다.
근대철학이란 주체(‘생각된 대상’)와 객체(‘있는 그대로의 대상’) 사이의 이런 넘나듦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사상이다. 어떻게(혹은 무슨 권리로) 주체가 객체의 노릇을 하고, 또 거꾸로 객체가 주체의 노릇을 하는가? 이것이 근대철학의 화두다. 근대철학이 보는 주객관계는 기본적으로 이런 넘나듦 관계다. 근대철학이 주체의 객체 노릇이나 객체의 주체 노릇을 원천 봉쇄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다. 따라서 근대철학이 상식적인 진리 개념인 주객일치를 원천 봉쇄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다.
하지만 김상봉이 주객관계를 밀쳐내는 더 큰 이유는 그가 이 관계에서 지배/예속을 연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주객관계는 기본적으로 불평등관계다.
“인간은 (…)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172쪽)
김상봉에게 객체 되기는 “전락”이다. 다음 대목은 주객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더 상세히 보여준다.
“주체는 (…)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235쪽)
“활동의 능동적 주체”(261쪽)와 “그 활동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객체”(261쪽)라는 표현에서는 김상봉의 주객관계가 능동/수동 관계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는 자기관계를 주객관계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나의 의식 속에서 내 앞에 마주 선 나를 하필 대상과 객체로서 간주하는 것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타성에 지나지 않는다.”(267쪽)
요컨대 김상봉은 주객관계를 일종의 주종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둘러보면 김상봉뿐만이 아니다. 근대를 비판하겠다고 나서는 지식인들이 주객관계를 이야기한다면서 주종관계를 이야기하는 경우를 흔히 접할 수 있다. 대체 어떤 주체와 어떤 객체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이런 어법을 구사하는 것일까?
이번에도 복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내 생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객체는 ‘나’의 작품, 바둑을 두는 ‘나’가 두는 한 수, ‘나는 번역가다’에서 ‘번역가’다. ‘나’는 ‘나의 작품’을 지배하고, ‘나의 작품’은 ‘나’의 지배를 받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이번에도 주변의 작가에게 물어보라. 오히려 ‘나의 작품’이 ‘나’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작가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나’가 ‘나의 작품’을 지배한다는 말이 부분적으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나의 작품’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황, 즉 ‘나의 작품’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진정한 주객관계는 ‘나’와 ‘나의 작품’이 분리되었을 때 성립한다. 이 상황에서 ‘나의 작품’이 ‘나’의 지배를 받는가?
예컨대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김상봉의 지배를 받는가? 천만에! 이 작품은 김상봉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와 있은 지 오래고, 김상봉은 오히려 이 작품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처지다. 보라, 나처럼 개뿔도 없는 놈이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물어뜯을 때,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새까맣게 몰려들어 이 역작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김상봉은 속수무책이다. 설령 그가 예컨대 이 글의 주요 논점들은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진의’와 무관하다고 맞받아치면서 자신의 순수한 ‘주체’를 야수의 이빨로부터 보호하더라도, 세상에 나와 있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이런 식으로 갈가리 찢기면서 나름의 삶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그가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세상에 내놓은 것 자체가 이런 능욕을 감수하겠다는 선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객체화’의 전형이며 그 결과로 나오는 ‘객체’는 ‘세상에 내놓은 나’다.
‘나의 한 수’도 마찬가지다. 바둑돌을 내려놓자마자,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그 한 수가 기사를 지배한다. ‘나는 번역가다’에서 ‘번역가’가 ‘나’의 지배를 받는가? ‘나’가 번역 일을 할 때, ‘번역가로서의 나’가 ‘나’의 지배를 받는가? 그럴 때 ‘나’는 능동적이고, ‘번역가’는 수동적인가? 억지스러움을 무릅쓰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대답할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진실은 ‘나’가 ‘번역가’로서 활동한다는 것이며, 이때 ‘나’와 ‘번역가’가 맺은 주객관계는 지배/예속, 능동/수동, 적극/소극과 무관하다.
김상봉이 “나를 의식하되 오직 사물화되지 않는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추구하고 “나의 의식 속에서 내 앞에 마주 선 나를 하필 대상과 객체로서 간주하는 것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타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를 주객관계의 전형으로 보기 때문인 듯하다. 만일 그가 자신과 <서로주체성의 이념> 사이의 관계를 주객관계의 전형으로 보았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주객관계로서 자기관계의 전형은 ‘나를 세상에 내놓는 나’와 ‘세상에 나와 있는 나’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일컬어 ‘자기 객체화’라고 하며, 이는 ‘자기실현’과 동의어다. 시를 써서 세상에 내놓지 않는 시인은 시인이 아닌 것처럼, 자기 객체화를 하지 않는 ‘나’, 자기를 세상에 내놓지 않는 ‘나’는 ‘나’이기는커녕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관계가 주객관계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둘째, 자기관계를 맺은 두 항을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 규정에 잘 부합하는 예로 앞서 언급한 ‘나는 번역가다’에서 ‘나’와 ‘번역가’ 사이의 관계를 다시 들 수 있다. 번역가이지만 또한 그 이상인 ‘나’가 보편이라면, 번역가로서의 ‘나’는 특수다. 그러므로 ‘나/번역가 관계’는 ‘보편/특수 관계’다. 그렇다면 이 예는 주객관계로도 규정되고 ‘보편/특수 관계’로도 규정된 셈인데, 이런 중복은 모든 자기관계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세상에 나와 있는 나’는 ‘특수한 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나(위에서 ‘나를 세상에 내놓는 나’라고 부른 나-주체)는 ‘보편적인 나’로서 ‘특수한 나’와 분리되고 연결된다.
저 앞에서 ‘생각’과 ‘대화’를 논하면서 나는 이미 ‘보편적인 나’를 언급한 바 있다. 도덕적 자유를 논하는 대목에서도 ‘보편적인 나’가 사실상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특수한 나’의 행동을 제어하고 책임지는 ‘나’에게는 ‘보편적인 나’라는 명칭이 잘 어울린다. ‘개인 안에서 이런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가 늘 대화한다’라는 사태를, 철학에서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불성’이라는 개념으로,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상식에서는 ‘양심’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고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들의 언어 사용에서 ‘주객관계’가 상당히 오염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이라는 개념도 때가 잔뜩 끼어 ‘억압’의 냄새를 풍기곤 한다. 김상봉도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나로부터 소외된 초자아”(122쪽), “이름만 ‘나’일뿐, 나와 상관없는 어떤 초월적인 초자아”(122쪽),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자립적인 초자아”(123)를 언급한다. 나는 “개인으로서의 나”로부터 분리된 ‘보편적인 나’를 과연 어떤 서양 철학자가 이야기했는지 묻고 싶다. 김상봉은 칸트와 독일 관념론자들이 이야기했다고 해석하는 모양인데, 나는 이런 해석을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서는 꽤 많이 들었으나 적어도 칸트와 헤겔을 이렇게 해석할 길은 정녕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특수한 나’와 ‘보편적인 나’ 사이의 자기관계다. 이 관계를 벗어난 ‘특수한 나’는 아예 ‘나’가 아니다. 이 관계를 벗어난 ‘보편적인 나’도 마찬가지다. 자기관계에서 이탈한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아’라는 표현을 걸칠 자격이 없으므로 그냥 ‘권력자’나 ‘억압자’라고 불러야지 ‘초자아’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나’를 높이면서 ‘특수한 나’를 낮추고 나-주체를 주목하면서 나-객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워낙 강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나는 더 중립적인 개념 쌍을 대안으로 내놓겠다. 그것은 ‘시스템 밖의 나’와 ‘시스템 안의 나’다. ‘시스템 밖의 나’는 ‘나-주체’ 혹은 ‘보편적인 나’에 해당하며 가치중립적이다. ‘시스템 안의 나’는 ‘나-객체’, ‘특수한 나’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꽤 장황하게 개관한 나의 주체 이론을 요약할 수 있다. 나에게 주체란 ‘시스템 밖의 나’와 ‘시스템 안의 나’ 사이의 자기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 밖의 나와 시스템 안의 나가 나누는 대화’다. 모든 각자가 이런 주체라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근본 전제일 뿐더러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기도 하다. 모든 각자가 주체라는 것은, 각자가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것, 각자 안에 항상 이미 불성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김상봉은 <홀로주체성의 이념>에서 “홀로주체”와 “서로주체”를 구분하고 전자를 비판하면서 후자를 옹호했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의 논리에 설득당하지 않았다. 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시스템 안에 있든지 또한 그 시스템 밖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시스템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져 항상 내적으로 대화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내가 헤겔을 비롯한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깨쳐 도달한 믿음이며, 우리가 이미 속한 민주공화국의 근본 전제다.
굳이 “홀로”와 “서로”를 넣어서 표현하자면, 나의 주체는 항상 이미 서로이며 홀로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특수한 너와 만나든 말든, 공동체에 속하든 말든, 나의 주체는 김상봉이 추구하는 “서로주체”의 자격을 항상 이미 갖췄다. 나의 주체는 현실적인 공동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서 어떤 공동체 안에 있든지 또한 그 공동체 밖에 있기 때문에, 나의 주체는 보편적인 인권, 인간 존엄, 불성, 양심을 가진 놈, 구원받은 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결코 벗을 수 없는 놈이다.
이제부터 내가 김상봉의 주체 이론에 대해서 제기한 네 가지 질문을 짚어가면서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하려 한다. 비판의 근간은 이미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남은 일은 되도록 쉬운 말로 조목조목 따지는 것뿐이다.
4.
1)왜 서양을 굳이 밀쳐내는가? 김상봉은 매우 솔직한 저자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라.
“그런[자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선생들 아래서 남이 그린 자화상을 학습했을 뿐 자기의 얼굴을 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기를 그리기 위해서는 자기와 남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가 선행적 과제였다.”(20쪽)
요컨대 그의 서양 밀쳐내기는 그가 개인적 경험에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여 스스로 짊어진 과제다. 그에게 이 과제가 얼마나 절실할지 능히 짐작한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제를 공유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나는 “그런 선생들”이 가르쳐준 남의 자화상이 가짜일 수 있다고 느꼈다. 실은 많은 선생들이 가짜 서양철학을 가르쳐왔다고 느꼈다. 내가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면, 서양이 동양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고, 헤겔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기독교의 구원이 불교의 불성과 다르지 않고 심지어 내가 철학 따위 공부하지 않아도 늘 느끼는 나의 양심과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고 느꼈다. 나도 김상봉처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땅의 철학 선생들이 의도적이거나 본의 아닌 사기꾼일 수 있다는 경계심을 일찌감치 품었다. 그래서 나는 서양을 밀쳐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가 진짜 진리라면 이미 내 안에도 스며들어 있다고, 내가 이미 진리를 품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남이 말하는 진리에 혹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밀쳐내지도 않는다. 진리가 어찌 둘이겠는가!
김상봉은 이광수, 박종홍 등의 “서서 죽는 것보다는 무릎을 꿇고 사는 것을 선호하는 노예적 정신들”(239쪽)이 자기를 상실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서로주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상실’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다가, 문득 자신이 본의 아니게 이들 노예적 정신까지 함께 옹호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자각한다. 이 대목에서도 그는 솔직한 저자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그는 자기상실의 긍정성을 강조하다말고 “너희들[노예적 정신들]에게 한 말이 아니야!”라고 쏘아붙여 사실상 자신의 난처함을 시인한다. 하지만 그렇게 쏘아붙이고 말 일이 아니다. 그들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주체라는 불가침의 전제 아래 그들의 행적을 꼼꼼히 따져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옳다.
내가 보기에 김상봉을 이런 곤경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패착은 ‘자기상실’이라는 몹시 무딘 개념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사대주의와 지배계급의 매판적 행태를 자기상실이나 수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라고(237쪽) 강변하지만, 애당초 ‘서로주체성’의 철학자로서 “자기상실 속에서의 자기실현”(233쪽)을 옹호해야 하고 “주체성을 잃은 겨레의 고난”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는 이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라는 카드를 다시 꺼내들고 새삼 “능동성과 자발성”(238쪽)에 힘을 실어주는데, 이 해법은 효력이 없다. 생각해보라. 매판 자본가와 매판 지식인에게 능동성이 없나? 천만에! 그들은 누구보다 더 능동적으로, 그야말로 악착같이 사리사욕을 추구한다. 애당초 그들의 상태를 ‘자기상실’로 오해한 것이 결정적 패착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사대주의자와 매판 지식인은 노예가 아니다. 주체로서 실은 ‘특수한 나’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보편적 대국大國(혹은 서양)’이라는 현란한 허울을 뒤집어쓰고 남들을 기만하는 사기꾼이다.
결국 문제는 “자기상실”이라는 불투명한 개념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2)서양적 홀로주체성에는 없고 한국적 서로주체성에는 있는 “자기상실”은 정확히 무엇인가? 김상봉은 “자기거리”, “자기부정성”, “자기분열”(204쪽 등)을 대충 같은 뜻으로 쓴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 용어들은 주체의 구조(혹은 삶)에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균열’을 표현한다. 이 균열은 시스템 안 ‘나’와 시스템 밖 ‘나’의 맞섬이므로 주체에 필수적이다. 김상봉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성하는] 주체의 자기분열은 불가피하다.”(209)
사실 나는 김상봉의 “자기거리”라는 표현을 아주 멋지다고 평가한다. ‘자기거리’라는 개념 하나로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대체할 수 있다고까지 여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자기상실”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상실이란 자아 상실, 주체성 상실, 자기거리 상실일 텐데, 나의 주체 이론에서는 이런 일이 완전한 형태로는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나? 불성이 소멸할 수 있나? ‘나’가 인간 존엄이나 양심을 상실하는 사태가 과연 가능한가? 물론 불성과 양심에 때가 끼는 일, 존엄한 ‘나’가 시스템 안에서 도구로 취급받는 일 등은 늘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주체성 상실’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수 있다.
김상봉이 말하는 “자기상실”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주체가 품은 대단히 심각한(“자기거리”, “자기분열” 등으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균열을 뜻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자기거리”, “자기분열” 등과 달리 유독 “자기상실”만큼은 서양인을 배제하고 한국인에게만 적용하려 한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근대적 한국인이] 겪어야 했던 주체의 자기분열은 (…) 실재적인 타자 속에서의 자기상실을 통해 발생한 자기분열”이었다.(213쪽) 반면에 서양철학이 말하는 “자기분열”은 “자기상실”을 통하지 않은, “단순히 내재적인 자기분열”(213쪽 같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오해가 발생한다고 느껴서인지, 김상봉은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는 독일 관념론이 주체의 자기거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마치 우리의 자기상실과 자기분열의 아픔을 대신 말해주는 철학이라는 환각에 빠지게 된다.”(204쪽)
나는 김상봉이 자꾸 “아픔”이나 “고통”(18쪽 등) 같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자기상실”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감정은 제쳐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냉정하게 보면, 이런 의미의 “자기상실”은 ‘내가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하는 듯하다. 그런데 김상봉은 이런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서양적 주체성에서 박탈한다. 이는 그가 서양적 주체성의 ‘자기거리’를 사실상 ‘거리 없음’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옳은 해석일까?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요컨대 “자기상실”을 ‘대단히 심각한 균열’로 이해하면, 김상봉의 서양적 주체 비판과 한국적 주체 옹호는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지 않은 주체’ 비판과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은 주체’ 옹호로 귀착한다. 바꿔 말하면 ‘자기상실과 무관한 주체’ 비판과 ‘자기상실과 뗄 수 없게 얽힌 주체’ 옹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한 나의 응답을 새삼 요약하면 이렇다.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지 않은 주체’는 아예 ‘주체’가 아니며, 서양사상은 대체로 이런 주체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은 주체’가 서양철학 주류의 탐구 과제였다. 특히 헤겔이 일관되게 이야기한 ‘주체’는 확실히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은 주체’다.
대관절 왜 김상봉은 서양적 주체의 ‘자기거리’를 ‘거리 없음’으로 해석하는 것일까? 그의 자상한 설명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양 근대 철학이 주체의 자기거리와 자기의식의 타자성을 문제 삼을 때, 그들이 알고 관심을 갖는 타자는 오직 주체 내적 타자, 즉 반성 속에서 정립되고 반성 속에서 지양되는 타자적 자기라는 사실이다.”(210쪽)
나는 “지양”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또 다른 설명에도 이 단어가 나온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들 철학자들[서양 근대 철학자들]이 ‘…아닌-나가 나와 같다’고 말할 때, 아닌-나란 주체가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 스스로 정립한 타자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처럼 타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주체 자신 속에서 지양될 수 있다.”(211쪽)
김상봉의 “지양”은 철학계의 통상적인 어법에 따라 헤겔의 “아우프헤벤(Aufheben)”을 옮긴 번역어일 텐데, 놀랍게도 그는 헤겔의 “아우프헤벤”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지양”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지양”은 간단히 ‘없앤다’는 뜻으로 읽힌다. 둘러보면 이것은 현학적인 한국어 사용자들이 두루 쓰는 어법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경우에 무언가를 ‘지양해야 한다’는 말은 그것을 없애거나, 밀쳐 내거나, 그치거나 하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헤겔은 “아우프헤벤”이 이런 뜻이 아니라고, 이 단어가 가리키는 활동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다 가졌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앞에서 나는 아무 설명 없이 ‘거두다’라는 표현을 몇 번 썼다. 새삼 설명하자면, ‘거두다’는 내가 ‘아우프헤벤’의 번역어로 선택한 멋진 우리말이다. 안중근이 이토의 목숨을 거둘 때, ‘거두다’는 부정적인 색채가 짙다. 반면에 구호단체가 고아들을 거둘 때, ‘거두다’는 긍정적인 색채가 짙다. 나는 헤겔의 “아우프헤벤”에 분명히 들어있는 이 두 번째 긍정적 의미를 간과하지 않는 것이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거두다’라는 번역어가 ‘지양하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헤겔이 관심을 가지는 타자가 “오직 주체 내적 타자”라는 김상봉의 말은 지당하다. 그 타자가 “지양되는(거둬지는)” 타자라는 말도 대체로 옳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지양(거둠)”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주체 내적 타자’는 주체가 항상 이미 거둬 품고 있는 타자다. 구호단체가 거둔 고아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듯이, 주체가 거둔 타자도 끊임없이 주체와 대화하며 잘 산다. 우리가 ‘시스템 안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아 논의를 펼친다면, 그 ‘나’가 거둔 ‘주체 내적 타자’는 ‘시스템 밖의 나’다. 즉, ‘나’의 보편적인 측면, 가능적인 측면, 불성, 양심 등이다. 거꾸로 ‘시스템 밖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그 ‘나’가 거둔 타자는 ‘시스템 안의 나’다. ‘나’의 특수한 측면, 현실적인 측면, 중생심 등이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나’가 모든 각자 안에 ‘거둬져 있음’이라는 형식으로 들어앉아 끊임없이 대화한다는 것이 내가 헤겔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깨친 주체 이론의 요체다.
김상봉의 “자기상실”이 ‘내가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한다면, “자기상실”은 한국적 주체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특징, 모든 주체의 근본구조다. 그러므로 김상봉이 “자기상실”을 한국인만의 몫으로 규정한 것에 나는 반대하는데, 혹시 그가 말하는 “자기상실”의 의미를 내가 오해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무슨 말이냐면, 김상봉의 “자기상실”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때때로 일상에서 접하는 어법대로, “예속과 수동성”(176쪽)을 뜻하는 듯도 하다.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런 의미의 “자기상실”은 “수난”과도 잘 어울린다.
“주체성의 상실은 언제나 수동적 당함 곧 수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177쪽)
만약에 김상봉의 “자기상실”이 정말로 이런 의미라면, 나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예컨대 이런 문장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철학이 할 일은 정신이 예속의 상태를 벗어나 자기를 찾고 주체성을 회복하도록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다.”(28쪽) 물론 일상 언어에서는 납득할 만한 문장이지만, ‘주체’의 본질을 ‘자기관계’(혹은 “자기의식”)로 전제하고 펼치는 김상봉의 철학적 논의에서는 이런 문장이 적잖은 혼란을 일으킨다. ‘지배/예속 관계’에서 ‘지배자’, 또는 ‘능동/수동 관계’에서 ‘능동자’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주체’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김상봉이 한편으로 밀쳐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계속 참조하는 헤겔과 더불어 내가 말하는 주체는 ‘지배/예속 관계에서 지배자이더라도 또한 그 관계 바깥에 있는 놈’이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지배/예속 관계에서 예속자이더라도 또한 그 관계 바깥에 있는 놈’이 주체다. 지배자냐, 예속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특수한 나’일 뿐이고, 주체란 그런 ‘특수한 나’로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나’와 대화하는 놈이다. 수동자든, 능동자든, ‘능동/수동 관계’ 전체를 성찰할 줄 아는 놈이 주체라는 얘기다. 김상봉 자신도 잘 알듯이, 주체는 근본적으로 자기관계다. ‘특수한 나’가 예속자가 되는 것과 ‘특수한 나/보편적 나 관계’가 존립하는 것은 일단 별개의 사안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질문이 제기된다.
3)왜 시종일관 지배/예속의 구도에 집착하는가? 김상봉은 서양을 지배자로, 한국을 예속자로 보는 듯하다. 실제로 그가 말하는 “자기상실”은 일반적인 ‘예속됨’ 중에서도 특히 ‘서양에 예속됨’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다.
“쉽게 말해 보편화된 서양 정신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자기 본래의 세계관을 버리고 서구적 주체성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이전의 자기를 서양적 눈으로 객체화하고 타자화한다. 이것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의 자기상실이다.”(214쪽)
김상봉이 보기에 한국인들은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왔”(176쪽)다. 나는 김상봉의 불만과 울분에 뼈저리게 공감한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 지금 여기에 사는 많은 한국어 사용자들의 줏대 없는 태도에 대해서는 “자기상실”, “예속”, “수동성”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섬세한 진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앞서 나는 이광수나 박종홍을 현란한 허울을 뒤집어쓰고 남들을 속이면서 사익을 추구한 사기꾼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예속자도, 수동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기꾼이라는 규정으로 그들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어 공용화를 외쳤던 지식인 현영섭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민족의 고유 언어마저 선진 강대국의 것으로 갈아치우자고 나선 현영섭의 태도는 결국 이기심 추구일 따름인 매판과는 약간 다르지 싶다. 무언가 더 크고 나름대로 진실한 신념이 그의 태도에 배어있는 듯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광수나 박종홍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신념은 무엇일까?
우선, 나름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현영섭, 이광수, 박종홍은 절대로 노예가 아니라는 점부터 확실히 하자. 그들은 주체로서 행동했고,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한다. 김상봉 자신도 “외세에 스스로 굴종하는 버릇”(178쪽)을 지적함으로써, 현영섭 등이 대표하는 한국어 사용자들의 줏대 없음이 수동적 예속은 아님을 사실상 인정한다. 나는 이 지적의 취지에 동의하지만 “굴종”이라는 표현만큼은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다. 현영섭, 이광수, 박종홍에게 ‘너희들은 굴종적이야!’라고 외치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놈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한다’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현영섭 등이 품었던 신념,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번창하는 신념, 우리가 서양과 만나기 훨씬 전부터 품어온 그 신념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진리는 <나> 바깥에 있다’는 신념이다. 나는 이것을 ‘전(前)근대적 신념’이라고 부른다. 이 신념을 중심에 품은 자는 ‘전근대적 주체’다. 전근대적 주체가 바깥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어리석어서 천지 구분도 못하는 놈들이 안 받아들이고 뻗댈 뿐이다. 더 큰 진리, 더 센 진리는 더 멀리 있다. 낯설수록 더 참되다. 진리는 최소한 ‘나’에게 익숙한 범위인 한국어 사용권 너머에 있다! 그러니 “굴종”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전근대적 주체는 바깥의 낯선 진리를 능동적으로 영접한다.
이미 언급한 한 가지 요인은 매판 사기꾼들이다. 이들에게는 전근대적 주체가 필수 고객이다. 이들이 시장에 나와서 찬란한 홑껍데기 허울을 높이 흔들며 머나먼 바깥에서 구해온 새로운 진리라고 외칠 때, 혹해서 모여들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전근대적 주체들이 없으면, 이들은 생계가 막막해진다. 그러니 순박한 대중의 근대적 깨달음이란 매판 사기꾼에게는 목숨 걸고 막아야 할 재앙이다.
한 가지 요인만 더 언급하겠다. 주체의 삶, 곧 ‘시스템 안 나와 시스템 밖 나 사이의 대화’가 사실상 무의미해지는 극단적인 상황들이 존재한다. 불성, 양심, 인간 존엄, 인권이 헌신짝이 되는 상황, 오로지 ‘시스템 안 나의 생존’이 거의 전부인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전쟁이 그렇다.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거의 완전히 권력 시스템 안의 ‘특수한 나’로 쪼그라든다. 양심이고 뭐고 일단 살기 위해 센 놈 앞에 납작 엎드려 기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야만적인 상황은 애당초 막아야 하고, 벌어졌더라도 서둘러 타개해야 한다. 하물며 전쟁은 끝난 지 오래인데 여태 그 기억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내면에 각인되어 주체의 삶을 전근대적 단계에 묶어두고 있다면, 냉정하고 단호하게 떨쳐버려야 한다. 하물며 현 상황을 그런 전쟁 상황으로 호도하며 전근대적 신념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면, 절대로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모든 각자가 주체다. 주체가 전근대적 단계를 거치고 그 단계의 신념을 거둬진 형태로 지니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전근대적 신념만을 고수하면서 근대적 깨달음을 끝내 밀쳐내는 것은 병이거나 나쁜 짓이다. 병이라면 치유해야 하고, 나쁜 짓이라면 깨우쳐야 한다.
요컨대 나는 “예속”을 의미하는 “자기상실”과 관련해서도 김상봉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를 “예속”과 “수동성”으로 특징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우리 대다수가 ‘전근대적 신념과 매판의 고착화’에 능동적으로 동의해왔다고 보는 편이 더 옳다. 모든 각자는 운명적으로 주체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사람은 내면에서 능동적이기 마련이며 따라서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절대로 벗을 수 없다.
김상봉은 서양적 주체를 ‘지배하는 능동적 주체’로 비판하면서 밀쳐낸다. 그러다보니 그 자신도 ‘예속된 수동적 주체’를 옹호하는 구석진 입장으로 몰리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전체다. 주체는 ‘시스템 안의 나와 시스템 밖의 나가 나누는 대화’로서 능동적 측면과 수동적 측면을 모두 지니기 마련이다. ‘시스템 안의 나’는 특수한 상황에 어느 정도 예속된 수동적 존재이고, ‘시스템 밖의 나’는 그런 예속된 수동적 존재를 기꺼이 ‘나’로 인정하는 능동적 존재가 아닌가. 이런 복합구조를 당연히 감지하기 때문에 김상봉은 수동성 옹호로 기울었던 입장을 바꿔 다시 능동성을 추어올리면서 서양적 주체에 접근한다. 그러나 역시 서양은 밀쳐내야 하겠기에 또 다시 수동성으로 기운다.
어찌 보면 이것 역시 ‘대화’다. 책의 제목과 똑같은 제목이 세 겹으로 붙은 핵심 대목, 곧 제2부 “서로주체성의 이념”의 3장 “서로주체성의 이념”의 2)절 “서로주체성의 이념”(233쪽에서 239쪽)에서 펼쳐지는 이 기묘한 대화를 듣노라면, 마치 바닥에서 튀어 올라 다시 떨어지고 또 튀어 오르기를 반복하는 공을 보는 듯하다.
나는 애당초 김상봉이 지배/예속, 능동/수동이라는 구도를 바탕에 깔아 끝까지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느낀다. 김상봉은 주체의 수동성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애쓴다. “너”를 상대로 한 “섬김”, “모심”, “배움”, “매혹” 등의 단어에서 그 애씀이 물씬 배어난다. “매혹”을 뺀 나머지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두루 권장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김상봉의 설명을 잘 들어보면, “매혹”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단어들이 연상시키는 조화로움, 포근함, 흐뭇함, 황홀함, 다정함, 친숙함을 살과 뼈로 아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주체 이론의 주춧돌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참된 주체는 지배/예속이라는 ‘전근대적 구도’를 넘어선 곳에서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렵게 설명하더라도, “섬김”, “모심”, “배움”, “매혹”으로 표현되는 수동성에서는 “예속”의 향기가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굳이 주체 안에서 긍정적인 수동성을 찾으려 한다면, 다름 아니라 ‘책임’에서 찾아야 한다. 자유로운 주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절대로 벗을 수 없다. 보기에 따라 이것은 영원한 “예속”, 철저한 “수동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책임지기는 참된 자유를 비로소 실현하는 가장 능동적인 행동이다. 각자 자유롭게 행동하고 책임지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에 적합한 단어는 “섬김”과 “모심”이 아니라 “상호인정”, “배움”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 “매혹”이 아니라 “설득”이다.
김상봉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통해 매개”(299쪽)된 공동체, “모두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모든 타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생성되는 공동체”를 꿈꾼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낳는 만남을 “하나 됨”, “일치”, “결속” 등으로 표현한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서도 나는 강한 전근대성의 냄새를 맡는다. “응답”이 반발일 수도 있고, “만남”이 서로를 거두려는 양편의 치열한 ‘싸움’일 수도 있다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김상봉이 생각하는 응답과 만남은 반발과 싸움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는 “한국 땅에는 너무도 많은 세계관들이 중첩되어 있는 까닭에 단절 없는 잘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의 지평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는 잘 구성된 연속적인 자기 또한 없다”(188쪽)고 한탄한다.
이럴 때 김상봉은 전근대의 철학자다. 세상에 나와 있는 특수한 ‘나’들의 공동체에 “잘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그들 모두가 각자 품은 ‘보편적 나’가 말하자면 공통분모일 수 있겠지만, 이 ‘보편적 나’는 그냥 허공과 같아서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바람직하다. ‘나의 세계관’과 ‘너의 세계관’의 차이는 ‘특수한 나’와 ‘특수한 너’의 차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차이는 우리 각자에게 내면의 ‘자기거리’를, ‘보편적 나’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특수한 나’가 둘로 셋으로 갈라져서 생긴 내적인 차이도 마찬가지다. “잘 구성된 연속적인 자기”가 있는 전근대인보다 그런 자기가 없는 근대인이 자기 내면의 ‘허공’을 더 잘 본다.
김상봉이 “하나 됨”의 공동체를 꿈꾼다면, 나는 경영자와 노조, 여당과 야당, 저자와 서평자가 대화로 얽힌 세상에서 펼쳐지는 주체의 삶을 서술할 뿐이다.
4)철학자 김상봉은 주체 아닌 자를 주체로 만들 생각인가? 이 마지막 질문은 철학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겨레가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지 못했”(177쪽)다고 꾸짖는 김상봉의 통속적인 언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 땅에서 주체의 삶이 원활하게 펼쳐지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일 테고, 나는 그 지적에 동의한다. 우리는 늘 주체였다. 항상 이미 양심과 불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식적인 의미에서 주체답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면, 그것은 강력한 전근대적 신념이 비옥한 토양의 구실을 하고 그 위에서 매판 사기꾼들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원정출산, 조기 영어교육, 미국 유학이 성행하고 학계에서도 영어로 써서 해외 저널에 실은 논문만 우러러보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면, 이 세태에 대한 올바른 진단은 “자기상실”이 아니라 ‘전근대적 신념과 매판의 고착화’ 그리고 ‘예외적 공포의 일상화’다.
철학자 김상봉은 막중한 사명감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자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먼저 자기의 철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181쪽)
민족을 걱정하며 철학의 중요성을 외치는 그를 보노라면, 어이없게도 모세가 떠오른다. 예속된 민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다는 모세처럼 그도 주체로서 서지 못한 우리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것일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어린 싱클레어는 동네 깡패한테 약점을 잡혀 ‘빵셔틀’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예속”이다. 꿈속에서도 그 깡패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경기를 할 만큼 “수난”을 당한다. 그런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면, 그건 네가 그 사람에게 너 자신을 지배할 힘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야.” 만일 싱클레어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는 말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미안의 말은 너의 “수난”은 너 스스로 선택한 바라는 뜻이다. 위로는커녕, 숫제 싱클레어의 상처를 후벼 판다.
그러나 나는 이 냉혹한 말에 ‘너는 항상 이미 주체야. 주체답게 살아’라는 ‘좋은 소식’이 담겼다고 이해한다. 모든 각자의 책임을 일깨우는 이 말을 ‘기뻐하세요,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라는, 혹은 ‘자네가 부처일세’라는 복음으로 이해한다.
김상봉은 책의 결론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은 열어놓는다.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모든 구성원이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참여하게 해주는 지평이나 기제가 무엇인가[?]”(312쪽) 나는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런 보편적 주체적 참여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각자가 서로를 아무 조건 없이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시스템 안에 있든지 또한 그 시스템 바깥의 허공을 품고 그 허공과 대화한다는 것, 그렇게 이미 대화하는 자기관계로서 타인과 만나 더 크고 현실적인 차원의 대화하는 자기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값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모든 각자의 양심을, 인간 존엄을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쉬운 말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고맙게도 지금 여기는 이미 민주공화국, 인간 존엄에 대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인정을 주춧돌로 삼은 공동체다. 이것이 내가 <서로주체성의 이념>의 부름을 듣고 내놓는 응답이다.
나는 철학이 도처에 스며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김상봉은 진정한 한국 철학의 부재를 한탄하지만, 나는 한국어 사용자들의 삶 자체가 이미 한국 철학이라고 본다. 철학이 꼭 따로 있어야 하나? 이 질문은 진리가 어딘가에 따로 있어야 하느냐는 물음과 맥이 닿는다. 헤겔의 말마따나 진리는 전체다. 철학자의 역할은 도처에서 항상 이미 작동하는 진리, 철학, 곧 삶을 읽어내는 것뿐이다. 물론 이 역할이 거대한 자기관계의 완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는 역시 모세보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다. 나는 철학자로 국한될 수 없는 김상봉의 정치적 활동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지지한다. 나 역시 철학자로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5.
김상봉은 책의 머리말 위에 김남주의 시구 두 행을 따다 붙였다.
오 자유여
봉기의 창끝에서 빛나는 별이여
이 시구에서 죽창이 떠오르는 것은, 마침 갑오년이 다시 다가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갑오년, 주체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걷어내려 나섰던 그 ‘나’도 별을 보았을까? 암 그렇고말고. 그땐 밤하늘 훨씬 더 청명했을 테니, 별이 빛나도 무더기로 빛났겠지. 신발 끈 다시 동여매고 창끝에 내려앉은 별 보며 “그려, 사람이 하늘이여!” 다짐했겠지.
기왕에 감히 나선 걸음, 김상봉이 인용한 김남주의 시구 아래 내 문장 한 행을 마지막으로 감히 놓아본다.
항상 이미 모든 각자가 짊어진 허공의 무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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