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을 비롯해 적절한 보건의료에 접근하는 것은 인권이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인 17억 명가량이 필수 의약품과 백신에 안정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의제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초국적 제약 회사들이 벌인 소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98년 2월 39개의 초국적 제약 회사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의약품 관련 법률이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 협정(트립스)과 남아공 헌법에 위반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대상이 된 법률은 고가의 특허 의약품을 다른 나라에서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해 오는 조치 등 의약품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이는 HIV/AIDS가 주요한 사회적 문제인 남아공에 매우 필요한 조치였다.
제약 회사들의 소송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적으로 HIV/AIDS 감염인, 국제 보건 및 인권 활동가들이 제약 회사들의 소송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의약품 접근을 증진하는 조항을 봉쇄하고자 하는 초국적 제약 회사의 조치는 보이지 않는 아파르트헤이트로 비유되었다.
게다가 소송의 대상이 되었던 남아공 법률의 조항들이 사실상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의 권고안에 기반을 둔 것으로 드러나면서 제약 회사들의 주장은 법률적인 측면에서도 힘을 잃었다. 결국 2001년 4월 제약 회사들은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환기시킨 것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약이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의약품을 구하지 못해 생명을 잃거나 건강 악화를 경험하게 되는 지구적 현실이었다. 처음에는 의약품에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점차 의약품뿐 아니라 백신, 진단법, 의료 기구, 기타 예방 기술 등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폭넓은 보건의료의 문제로 관심이 확대되었고, 세계보건기구, 각국 정부, 국제 보건 단체, 대학, 공공/민간 협력체 등에서 보건의료에 대한 접근을 향상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져왔다.
하지만 새로운 보건의료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 증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로라 프로스트와 마이클 라이히의 <의료 접근성 : 가난한 나라에는 왜 의료 혜택이 전해지지 못할까>(후마니타스 펴냄)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한 의료 기술에 접근할 수 없는가? 접근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역시 비용이다. 또한 "취약한 공공 보건의료 체계, 건강에 대한 정치적 책임성의 부재, 공공 및 민간 보건의료 시설의 부패, 국제 무역 및 특허 분쟁, 질병과 치료에 대한 문화적 차이, 생산품을 분배 처방 전달 사용하는 데서 발생하는 어려움"도 장벽으로 존재한다. 비용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공정한 시스템 형성을 방해하는 경제, 사회, 정치적 구조야말로 그러한 장벽들의 기초가 된다.
"단순히 약, 백신, 기타 보건 의료 기술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질병과 지속적인 빈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보건의료 기술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질병과 가난을 개선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성을 향상하거나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지 여섯 가지 사례를 들어 서술하고 있다.
그 사례들은 기생충, 성병, 말라리아, 간염, 원치 않은 임신 등의 건강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의약품, 백신, 진단법, 피임법, 기구 등의 다양한 보건 의료 기술 영역을 망라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빈곤한 사회에 의료 기술이 도입되고 확산되는지 혹은 그것이 장벽에 부딪치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친절한 용어 해설도 수록되어 있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의약품을 비롯한 의료 기술에 접근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정부와 환자 모두 비용 부담 능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소외 열대 질환 중 하나인 주혈흡충증의 경우가 그 하나다. 주혈흡충증은 말라리아 다음으로 유병률이 높은 기생충 질환으로, 인간의 혈관 내에 기생하는 기생충(주혈흡충)에 의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 추정 감염자 약 2억 명 중 1억8000만 명가량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데, 이들은 영양실조, 빈혈, 성장 장애, 인지 장애, 만성 건강 문제 등의 건강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프라지콴텔'이라는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을 증진하는데 주혈흡충증관리기구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본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대부분의 주혈흡충증 유행 국가에서는 프라지콴텔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약품의 가격 적정성 때문이었다. 세계보건기구는 약품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막상 약품의 가격 책정이나 유통 방식 등에 대해 관여할 수 있는 길을 서면으로 명시하지 않아 접근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민간 부문의 정규 시장에서는 같은 약품의 가격이 주혈흡충증관리기구가 국제 입찰을 통해 수주하는 가격의 10~30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형성되는데, 주혈흡충증이 주로 유행하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가격에 치료제를 구매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주혈흡충증관리기구는 기존의 독점 시장에 경쟁을 도입, 여러 생산 업체들이 국제 입찰에 참여하게 해 프라지콴텔의 가격 적정성을 높일 수 있었다. 또 세계보건기구, 세계식량계획 등과 협력해 학교 보건을 통해 프라지콴텔의 사용을 촉진함으로 프라지콴텔의 접근성 확대에 기여한 것으로 서술된다. 프라지콴텔의 접근성 확대는 상당 부분 2002년 주혈흡충증 관리 기구의 설립에 기댄 것이었다.
가격 적정성을 높이는 데 있어 조직적 구조의 중요성은 B형 간염 백신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로 두드러진다. 수십 년 간 개발도상국에서 B형 간염 백신의 접근성이 낮았던 주요 이유는 백신의 가격이었다. 197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백신 생산의 주체가 공공 부문에서 민간 부문으로 이전되면서, 백신 생산도 공중 보건의 관점보다는 시장의 관점에 많은 부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제약 회사들이 선진국을 대상으로 하는 값비싼 백신들을 개발하면서 기존 백신들은 생산량을 줄였고, 개발도상국에서는 백신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해 새롭게 등장한 행위자들이 B형 간염 백신의 가용성, 가격 적정성, 정부의 관련 정책 채택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이 책은 진술하고 있다.
특히 1999년 세계보건기구, 유니세프, 세계은행, 게이츠재단의 아동백신계획, 일부 국가 정부가 모여 창립한 GAVI의 역할을 주목한다. GAVI는 아이들이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질병들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창설됐는데, B형 간염 백신을 다른 주요 백신들과 더불어 재정 지원 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B형 간염 백신에 신규 생산자가 진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생산량이 증가해 백신 가격이 개선될 수 있었다.
주혈흡충증과 같은 소외 질병 치료제나 백신의 사례 모두 대량 구매를 할 수 있는 조직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가용성, 가격 적정성 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접근성 증진을 위해서는 개발도상국 자체의 생산 능력을 확보하고, 스스로의 조달 능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 개발도상국에서 지속적인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의료 전달 체계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GAVI가 처음에는 예방 접종의 기초 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에 국한하다, 의료 체계 강화에도 재원을 배분하도록 한 것은 바람직한 변화이다. 이밖에 이 책에서는 각 사회의 정치적, 역사적 상황과 최종 사용자들의 인식이 의료 기술에 대한 접근성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의료 접근성의 과정이 주로 보건 전문가 내지는 공급자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의약품을 비롯한 의료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경험하게 되는 의료 접근상의 어려움과 성공 사례도 경제 사회적 맥락에서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이지리아에 있는 친구 로즈메리가. 자신의 나라 나이지리아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한 로즈메리, 하지만 자신이나 딸들이나 1년에 수차례씩 말라리아로 고생하는 건 정말 끔찍하다던 그녀에게 책에 소개된 말라리아 진단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그리고 케냐의 나루모루에서 날 보며 활짝 핀 웃음과 함께 "잠보(안녕)"를 외치던 아이들, 주기적인 가뭄 때마다 빈번해지는 수인성 질병으로 고생하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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