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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국가도 무서워한 박지원의 천재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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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 후기 국가도 무서워한 박지원의 천재성은?

[철학자의 서재] 박지원의 <열하일기>

압록강 험한 물살을 건너며

정조 4년(1780년) 6월 24일 아침이었다. 물빛이 오리 대가리처럼 푸르다고 해서 압록강이라 부르는 국경 나루터 구룡정(九龍亭)에 사신단 일행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황제가 된 지 45년을 맞는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신 축하 사절단이었다. 아직도 장마가 걷히지 않아 검푸른 물결이 넘실대는데다 아침부터 비까지 오락가락 해서 순조로운 도강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미적거리다가는 칠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판단한 정사(正使) 박명원이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에 이날을 도강 날짜로 박아 넣은 것이었다. 8촌 형 박명원을 따라가는 박지원도 마부 창대와 하인 장복이를 앞뒤로 세운 채 줄에 들었다. 그의 말안장에 걸린 가방에는 벼루와 거울, 붓 두 자루와 먹 하나, 공책 네 권과 여행 일정표가 담겨 있었다.

건너는 절차가 시작되자 사람은 본적, 이름, 사는 곳, 나이, 키, 수염이나 흉터가 있는지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말도 털빛까지 기록한다. 깃대를 세 개 세워 놓고 금, 진주, 인삼, 수달가죽 같은 금지 물건들을 뒤지는데 하인들은 바지춤까지 끌렀지만, 비장이나 역관들은 보따리만 풀어 본다. 금지 물건이 첫 깃대에서 발각되면 곤장을 치고 물건을 빼앗으며, 둘째 깃대에서 발각되면 귀양을 보내고, 셋째 깃대에서 발각되면 목이 잘린다. 하지만 문제가 될 물건들은 의주 상인들이 이미 강 건너로 옮겨 놓은 뒤이니 뒷북치기일 뿐이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의주부윤과 아전들, 장교들과 기생들까지 작별 인사차 나온 사람들을 뒤로 하고 강을 건넌 일행은 30리를 더 간 뒤 구련성에서 노숙을 하였다. 이것이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첫 날의 기록이다.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보리 펴냄). ⓒ보리
여행을 앞두고 설레지 않을 사람은 없다. 새로운 것을 본다는 기대도 있고 처음 가는 곳에 대한 불안도 있을 것이다. 처음 먹어 볼 음식부터 처음 보는 광경과 처음 만나는 사람들 모두 기대 반 불안 반일 것이다. 그런 마음은 인도로 가던 혜초나 중국으로 오던 마르코 폴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오늘날 배낭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우선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 다르며 그에 따른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관점이다. 관점의 차이는 똑같은 분단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도 분단의 격차를 벌리는 영화인가 아니면 좁히는 영화인가의 차이로 나타나곤 한다. 관점이 다르면 어떤 이는 무심코 지나치지만 어떤 이는 세세하게 살피고 기록한다.

<열하일기>는 그런 점에서 여행 기록의 압권이다. 박지원은 늘 두루마리로 된 화선지를 들고 다니다가 생각이 떠오르거나 기록해야 할 사물을 보면 붓과 먹을 꺼내 두루마리 종이를 풀어 쓴 다음 찢어서 보관하는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그가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두툼한 보따리를 보고 사람들이 황제의 하사품이라도 있을까 해서 풀어 보았지만 보따리에서 나온 것은 기록한 종이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열하일기>에 나타난 박지원의 관점은 무엇이었을까? <서경> '대우모(大禹謨)'에는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그에게 왕위를 물려 준 순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덕은 좋은 정치를 베푸는 데 있고, 정치는 백성을 잘 기르는 데 있습니다. 정덕(正德)과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을 조화롭게 성취하십시오.” 정덕은 백성을 도덕적으로 바로잡는 것이며, 이용은 백성들의 삶을 편하게 하는 것이고, 후생은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 덕을 바로 잡는 일을 첫째로 꼽았다. 하지만 박지원은 달랐다. 그는 <열하일기> 첫머리 '도강록'에서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이 있은 뒤에야 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 쓰임을 편리하게 하지 못하고서 삶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삶을 풍요롭게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덕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처럼 박지원은 백성들을 위한 이용후생의 관점으로 <열하일기>를 기록해 갔던 것이다.

북학파의 대부 박지원

▲ 연암 박지원의 초상(손자 박주수의 그림). ⓒ후손 박찬우 소장

박지원은 영정조 시대를 살았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파 싸움을 막으려 했으며 기득권 세력만이 아니라 서얼까지도 가려 쓰면서 나라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런 상황에서 박지원은 현실의 문제점을 바로 보고 근대를 향한 대안을 만들어가던 북학파 학자들의 대부였다.

박지원은 당시 집권 세력이던 서인 노론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5대조 할아버지가 선조의 사위였고, 8촌 형은 영조의 사위였으니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박지원은 글도 늦게 배웠고 벼슬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 열여섯 살에 장가를 들고 나서야 장인과 처삼촌에게 글을 배웠으니 일반적인 양반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이미 세상 물정을 다 알고 나서 시작한 늦깎이 공부가 그를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더구나 박지원은 34세가 되어서야 초시를 보았고,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더 이상 다음 단계 시험을 보지 않았다. 친구들이 억지로 권해서 다음 시험을 보았지만 답안지를 내지 않았다고도 한다. 아무튼 박지원은 출세와는 담을 쌓은 채 벼슬 욕심 없이 일생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처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을 통해 서양 학문을 직접 경험하였고, 이를 토대로 점점 어려워져 가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특히 성리학자나 다른 실학자들과 달리 공업이나 상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나라를 쳐서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북벌론에 맞서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오자는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북벌과 북학은 모두 집권세력인 서인들 내부의 논쟁이었지만, 북벌이 체제 유지를 위한 이론이라면 북학은 개혁론인 셈이다. 바로 그 북학론의 중심에 박지원이 서 있었다.

이용후생과 북학을 날줄과 씨줄 삼은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사신 행차에 참여한 박지원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두 달 동안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전체 일정은 5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압록강부터 북경을 거쳐 열하에서 황제를 만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머문 시간까지만 기록하였다.

사신 일행이 북경에 도착해 보니 황제는 북경이 아니라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들은 늘 초원에 풀이 돋기 시작하면 열하로 갔다가 초원에 이슬이 내리면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엄청난 대 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족의 준동을 막기 위한 정책적 고려였다. 그래서 사신 일행은 무려 422리 길을 황제가 수시로 보내오는 사자의 독촉을 받으며 하룻밤에 아홉 차례나 강을 건널 정도로 강행군을 한 끝에 5일 만에 열하에 도착하였다.

태어나서 조선 땅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박지원이지만 그의 눈썰미는 대단했다. 그는 황제가 열하에 머무는 상황을 천하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라고 평가하였다. 청나라 황제가 천하 안정의 관건인 몽고족의 턱 밑에 가 있는 이유를 간파한 것이다. 그는 또 청나라가 많은 학자들을 동원해서 고금도서 집성이나 사고전서의 편찬 같은 대규모 문화 사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학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그 숨통을 틀어쥐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어루만지는 짓이며, 교묘하고 엉큼스러운 천하를 우롱하는 재주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박지원은 천하 돌아가는 이치를 한 눈에 꿰뚫어보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큰 틀 뿐 아니라 작은 것들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집의 구조와 벽돌 쌓는 법, 창문과 문틀 모양과 기와까지 유심히 살폈고, 마을 변두리에 놓인 가마의 효율을 관찰하기도 했으며, 구들이나 굴뚝도 세심한 눈으로 살피고 있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다가도 곁에 있는 우물의 구조와 두레박 사용법, 심지어는 물을 져 나르는 지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중국의 자연과 기후, 풍속, 수레와 도로, 다리의 구조와 배의 모양, 말 기르는 법, 심지어 술 마시는 법까지 조선의 그것들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성 쌓는 법을 비롯하여 중국의 문물제도에 대해서도 유심히 살폈고,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대해 필담을 주고받으며 토론하기도 했으며, 청나라 인물들을 놓고 평을 하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정책, 다른 민족에 대한 종교정책 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역사에 대한 박지원의 식견도 여러 곳에 보인다. 백이·숙제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고, 만주를 지나다가 쌓고 있는 봉황성을 보고는 이 성이 안시성일지 모른다고 하면서 한사군에 대한 기록을 함께 언급하며 조선학자들의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의식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박지원은 다양한 일을 경험하였다. 지금 심양이라 불리는 성경에 잠시 머문 때에는 그 곳 상인들과 사귀면서 며칠 동안 밤마다 만나 필담을 나누기도 하였고, 옥전현 주막집 벽에 쓰여 있던 글을 옮겨 적어 와서 유명한 <호질>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또한 <옥갑야화>에는 유명한 <허생전>이 들어 있다. 황제의 생일잔치인 만수절(萬壽節)에서 공연된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하기도 했고, 코끼리나 마술 공연을 본 기록도 남겼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공부 길


사실 박지원은 사신단의 정식 수행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사신 행차를 따라 나선 길은 여행길이 아니라 공부 길이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보고 들은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함께 주고받은 필담까지를 소중하게 간직한 채 돌아왔다. 더구나 그에게는 술안주로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쪄서 내 온 것을 잊고 이야기에 몰두할 정도의 열정이 있었다. 그 기록들이 모두 박지원과 함께 연암골까지 왔고 3년 정도의 정리 과정을 거쳐 빛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열하일기>를 다 쓰기도 전에 정조에게까지 알려지면서 오늘날 국가보안법 하에서처럼 금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선비들이 빌려서 베껴보는 책으로 쓰이다가 19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담았던 자신의 생각을 실현해 볼 수 있을 정도의 벼슬을 지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가졌던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이용후생의 꿈은 그를 따르던 젊은 학자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열정이 <열하일기> 속에 담겨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지원이 열하를 다녀온 때는 18세기 후반이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열하’는 어디일까? 그리고 우리가 그 ‘열하’를 간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해 올 것인가? 비록 시대는 달라졌지만 우리를 둘러 싼 국제관계는 여전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지원의 눈을 따라 <열하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만난 중국이 보이고, 그의 사상이 보이고, 조상들의 슬기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는 오늘 필요한 우리의 눈으로 새로운 <열하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읽기, 깊이 읽기


박지원, <열하일기>(리상호 옮김, 보리 펴냄, 2004)
이 책은 북녘의 문예출판사가 펴낸 <조선고전문학선집>을 보리출판사가 <겨레고전문학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펴낸 것이다. 상·중·하 세 권으로 나누어 <열하일기> 전체를 번역하고 원문을 실었는데, 이제는 남녘에서 많이 없어진 순수한 우리말을 최대한 살려서 번역한 점이 뛰어나다. 일부 남녘에서 쓰지 않는 용어가 나와 불편한 점이 있지만 가장 추천할만한 번역서이다.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펴냄). ⓒ북드라망
고미숙,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개정 신판 북드라망 펴냄, 2013)
이 책은 <열하일기>를 중심축에 두었으되 박지원의 다른 저작들까지를 포함하여 필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의 뛰어난 글 솜씨가 돋보이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박지원의 사상을 끌어내고 있다.

박지원, <열하일기>(민족문화추진회 옮김, 솔출판사 펴냄, 1997)
이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가운데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만을 완역한 책이다. 한문 투의 번역을 지양하고 현대적인 문장을 썼다. 보리출판사가 펴 낸 북녘 문예출판사 번역본과 대조하면서 보면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 <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 펴냄, 2009)
박지원의 문학을 전공해 온 역자의 오랜 노력이 읽히는 번역서이다. 기존 번역서의 오류를 최대한 줄였으며 박지원이 다녀온 길에 대한 답사를 토대로 사진과 도판을 붙여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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