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예술은 왜 존재하는가, 카프카가 가르쳐 주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예술은 왜 존재하는가, 카프카가 가르쳐 주었다

[정여울의 '마음이 머무는 곳'<2>] 체코 프라하, 카프카 박물관

며칠 전 케이블TV에서 추억의 영화 <러브스토리>를 보다가 깜짝 놀란 장면이 있다. 가난한 빵집 딸로 자라난 여주인공 제니퍼가 병석에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난 남편 올리버가 당신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 묻자 제니퍼는 이렇게 대답한다. “절벽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느낌이야. 아주 천천히. 그러다가 땅에 이미 떨어져 있기를 바라는 기분. 알아?” 올리버가 눈물이 그렁한 표정으로 알 것 같다고 대답하자, 제니퍼는 반신반의한다. “거짓말. 평생 절벽에서 떨어져 본 적도 없으면서.” 보내는 이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떠나는 이의 고통만 할까. 하지만 올리버는 자신도 절벽으로 추락하는 그 느낌을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도 절벽에서 떨어져본 적 있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제니퍼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싱긋 웃으며 맞받아친다. “얼마나 멋진 추락이었던가.”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를 읊으며 그녀는 미소 짓는다.

바닥모를 심연으로 천천히 추락하는 느낌. 차라리 얼른 이 지친 몸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그 추락이 무섭거나 아프기보다는 ‘이토록 아름다운 추락은 다시없을 거야’라고 느끼는, 고통스러운 희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을 때의 비극적인 황홀경이기도 하고, 가슴 시린 문학작품을 읽었을 때의 슬픔 어린 희열이기도 하다.

내게는 카프카가 그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천천히 추락하는 느낌. 그 추락의 고통에 비례하는 기묘한 환희 같은 것. 천천히 떨어지느니 차라리 빨리 추락해버렸으면 바라다가도, 이 추락의 생생한 아픔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기분. 나는 카프카를 통해 몰락의 의미를, 상실의 그림자를, 사라짐의 비애를 배웠다. 특히 요즘 내 마음의 문을 시도 때도 없이 두드리는 작품은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Joseph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열린책들 판 <변신>(홍성광 옮김) 수록)이다. 자신들에게 예술이 얼마나 필요한지 인정하지 못하는 종족들 앞에서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마다 애타게 청중을 그러모아 노래인지 집회인지 기도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공연을 펼치는 여가수 요제피네. 그녀는 노래를 잊은 종족에게 마지막 남은 노래를 선사하는 살아있는 화석 같은 존재다. 고달픈 삶에 짓눌려 예술을 사랑할 권리마저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 [그림 1] 카프카 박물관 전경: 카프카의 이니셜이기도 하고 그의 대표작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케이의 이니셜이기도 한 거대한 ‘K’가 박물관의 수문장이 되어 카프카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여행자를 반긴다. ⓒ이승원

카프카 박물관 앞 벤치에 저물녘까지 앉아 있으면서 나는 카프카가 바로 그 요제피네를 닮은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보았다. 쥐들의 종족은 요제피네의 노래를 ‘찍찍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펼치는 신비로운 공연 앞에서는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한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예술의 감동을 바라면서도, 막상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오거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진지한 응답을 회피해버리는 사회. 나는 여가수 요제피네의 투쟁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오직 예술을 통해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살아내려 하는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독을 떠올렸다. 요제피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고 또 참다가 노래로 자기 종족의 고통 받는 영혼을 일깨우려는 장면은 언제 읽어도 가슴 시리다.

▲ <변신 : 프란츠 카프카 중단편집>(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우리의 삶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날이면 날마다 깜짝 놀랄 만한 일과 불안한 일이 생기고, 희망이 샘솟았다가 공포가 엄습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을 개개인이 혼자서 감당해낼 수 없다고 해서 매번 동료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그럴 때마다 요제피네는 자신이 나설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그녀가 그곳에 나타난다. 그 섬세한 존재가 특히 가슴 아래 부분을 떠는 것을 보면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그녀는 온 힘을 노래에 집중시키고 있는 듯이 보이고, 노래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그녀 내부의 모든 것에 그녀의 모든 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힘을 빼앗긴 듯이 보인다. 그녀는 벌거벗은 몸이 되고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어, 단지 천사들의 보호에만 맡겨진 듯 하고, 완전히 힘을 빼앗긴 상태에서 그녀가 이처럼 노래 속에서 사는 동안 차가운 미풍이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그녀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카프카,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 중에서

나는 프라하에 세 번이나 방문했지만 카프카를 진정으로 만났던 것은 마지막 방문, 2013년 여름이었다. 두 번째 프라하 여행에서 나는 카프카 박물관을 아무리 돌아도 ‘카프카는 여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프카는 박제된 박물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가 걸었던 길, 카프카가 살았던 집, 카프카가 방문했던 식당이나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프카가 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 속에 카프카에 대한 절실한 목마름이 부족했던 때였다. 세 번째 프라하 방문 때는 마음속에 ‘카프카’라는 거대한 물음표가 있었다. 내가 카프카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우울할 때마다 더 깊은 우울과 마주하기 위해 카프카를 꺼내 드는 심경을, 스스로 이해하고 싶었다.

▲ [그림 2] 카프카 박물관 앞에는 언제 봐도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오줌싸개 동상이 있다. 이들은 엉덩이를 덩실덩실 흔들면서 오줌을 분출하는 쇼를 보여주며 관람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카프카의 유머, 카프카의 명랑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멋진 작품이다. ⓒ이승원

카프카도 요제피네처럼 절박하게 ‘오로지 예술에 집중하느라 생활에는 도저히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상태’를 경험했던 것이 아닐까.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밤에는 소설가로 일하면서 그는 “차가운 미풍이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그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세상의 혹독한 추위와 맞서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예술 활동을 존중해주지 않는 동족들 앞에서 가냘픈 목으로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는, 종족 중에서 유일하게 노래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음악가. 이것은 예술이 점점 자신의 진정한 거처를 찾지 못해 점점 씨가 말라가는 상황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요제피네의 종족들은 자신들이 ‘어린애 같은 요제피네를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보살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제피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을 ‘노래’의 힘으로 보호해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요제피네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종족을 보호하는 쪽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의 노래가 정치와 경제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를 구해주고 있으며, 바로 다름 아닌 그 노래가 그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노래가 우리의 불행을 몰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불행을 견뎌낼 힘을 우리에게 준다고 생각한다.
-카프카,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 중에서


불행을 없애주지는 못해도 ‘불행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고유한 힘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아무리 주어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예술의 혼이 청자의 마음속에 전달될 리 만무하다. 요제피네가 원하는 것은 그녀가 오직 예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동족들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보호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노동 때문에 예술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점점 더 예술의 고통과 노동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야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요제피네에게도 같은 수준의 노동을 요구했던 이들의 성화에 지쳐 요제피네는 마침내 무대에서 쓰러져버리고 말았으며 완전히 실종되어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요제피네는, 아니 예술은, 이제 이 종족의 역사에서 완전히 멸종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이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권리를 망각했을 뿐 아니라, 한때 요제피네의 노래가 얼마나 든든하게 자신들의 상처받는 영혼을 치유해 주었는지, 한때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예술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예술의 마지막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전 생애를 걸고 투쟁하였는지조차 망각해버렸다.

▲ [그림 3] 카프카 생가 앞에 조성된 작가의 부조. 카프카의 생가 앞에는 카프카를 기념하는 카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맥주와 커피를 즐긴다. ⓒ이승원

예술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들이 견뎌야 할 가장 큰 불행. 그것은 바로 ‘청춘이 없다’는 것이었다. 청춘은 물론 어린 시절도 없이,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을 향한 투쟁에 온몸을 맡겨야 하는 쥐들의 인생. 그것은 점점 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청춘’이라는 낭만을 반납하며 어린 시절부터 ‘어떤 꿈을 꿀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혹독한 현실과 닮아 있다. 쥐들이 태어나 조금이라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게 되면, 그 즉시 어른처럼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리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어른들은 아이들을 생존 투쟁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없다는 것. 살아가는 일에 모두 지쳐 있어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주는 영혼의 고양감 같은 것은 너무도 부담스럽고 피곤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노동의 불안, 생존의 불안, 주거의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하는 쥐들은 아무 조건 없이 예술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빈자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투명한 마음이 없기에. 생활이라는 이름의 유독가스에 감염되어 그 어떤 ‘생활 바깥의 삶’, ‘예술을 위한 예술’을 위한 마음자리가 남아 있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린 음악을 즐기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음악이 주는 흥분과 날아오르는 기분은 우리의 둔한 느낌과 맞지 않는다. 우리는 피곤한 눈빛으로 손짓을 하면서 음악을 그만하라고 제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찍찍거리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가끔씩 조금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제격이다. 우리들 중에 음악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동표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을 계발하기도 전에 억압해버릴 게 분명하다.
-카프카,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 중에서

▲ [그림 4] 카프카 동상. 카프카는 거대한 양복을 입은 ‘몸 없는 인간’ 위에 목마를 하고 앉아 있다. 옷은 입고 있지만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인간.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아프게 질문하게 만드는 동상이다. ⓒ이승원

그저 찍찍거리는 소리, 누구나 낼 수 있는 평범한 소리에 만족하면서, 영혼을 뒤흔드는 소리, 너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만 같은 예술의 소리에는 귀를 영영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음악을 즐기기에 너무 늙어버린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늘 백척간두에 서 있는 자신들을 돌보느라 타인을 돌보기는커녕 자신의 사랑도 꿈도 희망도 반납해야 하는 쥐들의 운명. 자신조차 돌보기 힘든 이들에게 ‘예술을 돌본다’, ‘예술가를 돌본다’는 상상은 자리 잡기 어려웠다. 그 속에서 요제피네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귀먹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추종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열광과 박수갈채가 아니라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관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잃어버려 다시는 찾을 길 없는 행복’의 길을 그녀의 음악 속에서 발견한 경험이 있다. 예술만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극한의 희열과 감동의 순간, 그 순간이 연주해내는 기적과 축복의 목소리를, 카프카는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음들에 스스로 경탄한 나머지 점점 생기를 잃어가며, 쓰러질 것 같은 이러한 기분을 이용하여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가는 자신의 예술적 행위에 새로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 사람들은 저마다 사지의 힘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고, 쉬지 못한 자는 편한 마음으로 널찍하고 따스한 이들의 침대에서 피로를 풀며 팔다리를 한 번 쫙 뻗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요제피네는 이를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 같다고 하고, 우리는 이를 심금을 울리는 소리라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일찍이 거의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음악이 자신을 기다리는 순간을 발견함으로써 사람들에게는 다른 그 어디보다도 이곳이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그 안에는 무언가 가련하고 짧은 어린 시절이 담겨 있고, 잃어버려 다시는 찾을 길 없는 행복이 담겨 있다.
-카프카,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 중에서

▲ [그림 5] 카프카의 묘지 앞에는 카프카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이 놓아두고 간 온갖 선물들과 꽃다발들이 한가득 놓여 있다. 자신이 읽고 있던 일본어판 카프카 선집을 묘지 앞에 그대로 두고 간 여행자의 따뜻한 손길이 아름답다. ⓒ이승원

우리는 언제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때,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이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없을 때도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예술의 감동에 몸을 맡길 수 있을 때가 아닐까. 평소에는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다가도 아름다운 음악이 귓속을 간질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음악을 기다리지 않아도, 음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음악을 들을 장소가 없다고 핑계를 댔지만, 버스 안이든, 지하철 안이든,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 곳은 그곳이 바로 최고의 공연장이구나. “그 안에는 무언가 가련하고 짧은 어린 시절이 담겨 있고, 잃어버려 다시는 찾을 길 없는 행복이 담겨”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내가 오래 전에 두고 왔기에 다시는 방문할 수 없는 버려진 영혼의 장소. 그 의미를 몰라 더더욱 붙잡을 수 없었던 그 짧은 어린 시절. 우리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지만 결코 다시는 방문할 수 없는 그 시간 속으로 데려다주는 문학. 카프카의 묘지에서 나는 상상해보았다. 휘파람인지 콧노래인지 흥얼거림인지 잘 알 수 없는 희미한 음색으로 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카프카의 노랫소리를. 누구도 문학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꺼져가는 이야기의 불씨를 되살려 우선 홀로 스러져가는 자신의 영혼부터 필사적으로 데워야 했을 한 젊은 예술가의 고독을. 나는 카프카 작품의 심오한 의미는 잘 모른다. 하지만 카프카를 읽을 때 나는 온전히 ‘나 자신’이 된 듯한 충만함을 느낀다. 이토록 불안하고, 절망적이고, 쓸쓸한 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나다운 나’라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카프카를 통해 발견한다. 불행을 제거해줄 수는 없어도 불행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예술의 뜨거운 온기를.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