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셋째 주는 5년마다 민주주의의 축제인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시기이다. 지난해로 여섯 번째 치러진 이 기간의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 것은 1987년 12월 16일이었다. 그날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이끌어낸 6월항쟁의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였다. 분출하던 각계각층의 요구들이 자연스럽게 이 두 가지로 수렴되었다. 이 구호가 명령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제5공화국 헌법의 개정과 독재 정권의 퇴진이었다. 국민이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되 그 선거에 나설 후보군은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 온 사람이라야 했다.
그러나 6.29선언으로 국면이 전환되면서 두 개의 구호 가운데 '독재 타도'는 미완인 채로 남게 되었다. 퇴진해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군부 독재 세력이 집권당으로 살아남아 민주주의의 축제인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독재 정권이 '호헌'을 포기하고 민주 세력이 그들의 존립을 허용한 이 '타협'은 그 후 여섯 차례의 대통령 선거, 나아가 한국 정치 전반의 성격과 구도를 결정지은 계기가 되고 말았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국민의 힘으로 되찾은 대통령 선거의 첫 번째 무대부터 부작용을 낳았다. 민주화 이후의 축제가 되어야 할 대통령 선거가 '독재 타도'의 완수를 목표로 하는 6월항쟁의 연장선에 놓이게 되었다.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 후보로 흠결이 없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를 위해 둘 중 하나는 양보해야 하는, 꿈도 꾸지 않았던 단일화 요구에 직면했다. 당시 5공 세력이 단일화 불발을 내다보고 6.29라는 정치적 도박을 했다는 분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13대 대선은 마치 그들의 선견지명을 추인이라도 한 듯한 결과를 내고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대권을 목표로 삼는 정치가가 그 목표를 유보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는 것이 상식적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은 바로 그런 이유로 극심한 비난에 직면했다. 그들이 이런 비난을 들어야 했던 것은, 애당초 독재 타도라는 국민적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고 나름의 계산으로 독재 정권과 타협해 버린 전비(前非)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5공을 청산하고 출범했어야 할 제6공화국의 '시조'는 5공의 적자인 노태우로 낙찰되고 말았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신정부를 여전히 군사 독재의 잔재로 보는 국민의 저항에 직면해 노태우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보수 대 혁신의 구도로 바꾸는 공작을 감행했다. 보수 야당을 끌어들여 일본의 자민당 같은 거대 보수 정당을 탄생시킴으로써 영구 집권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대중이 먼저 합당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김영삼에게도 '오퍼(offer)'가 들어갔고 김영삼은 잽싸게 이를 받아들여 하루아침에 민주 투사에서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오늘날 박근혜 정부를 옹위하고 있는 서청원, 김무성 등은 그때 보스를 따라 전향한 왕년의 민주 투사들이었다.
노태우, 김영삼에 김종필까지 가세한 3당 합당은 6.29의 타협이 낳은 파멸적인 결과였다. 민주주의 세력은 그 후 7년 동안 거대 여당이 마음껏 나라를 망쳐 놓는 것을 목격한 뒤에야, 그것도 김종필, 박태준이라는 유신의 잔재 세력과 제휴를 하고서야 가까스로 1987년의 한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정권 교체를 이루고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전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IMF 위기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임기를 마쳐야 했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 역시 거센 양극화의 물결 앞에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 결국 5공에 뿌리를 둔 세력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구름처럼 모여든 시민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되살린 6월항쟁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군부 독재 세력은 6.29 타협을 통해 살아남았다. ⓒ연합뉴스 |
아직도 한국 사회 가로막는 6.29 타협의 저주
지난해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선거로 탄생한 박근혜 정부를 맞아 다시 한 번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도대체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것이 언제인데 아직도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황당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정확한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권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국가 기관에 도사리고 있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재 세력을 온존시킨 6.29 타협의 저주가 아직도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렇게 가로막고 있단 말인가?
3당 합당 이래 5공과 그 후계 세력이 애용해 오는 말이 '보수와 진보'다. 6월항쟁 이래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으니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제도권 정치 세력은 민주 세력이므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소멸했고 이젠 보수와 진보의 구도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유력한 제도권 야당 세력인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이 보수 세력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87년에 이룩한 성과를 지키고 가꿔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들은 지킬 것이 있는 보수 세력이다.
그렇다면 현 정권과 이를 위요하고 있는 세력은 어떤 의미에서 보수인가? 갖은 방법으로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을 차단하거나 호도하려 하고, 정당한 의혹과 요구를 내놓는 민주 시민과 보수 야당까지 종북 좌파로 매도하고(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라. '종북'이 '좌파'일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도대체 '좌파'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역사의 심판을 받은 친일파와 독재자를 미화하는 자들이 지키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1987년 이전의 질서나 그것을 뛰어넘는 퇴행적 체제라는 답밖에는 안 떠오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보수'가 아닌 '수구'라 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어느 사회에나 있는 구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도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은 군부 독재가 오늘의 수구 세력으로 진화하는 것을 방치한 6.29 타협에 기인한다. 혹자는 이집트, 리비아처럼 독재자를 처단한 곳에서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는 현상을 지적하며 6.29에서 멈춘 것이 옳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랍권의 혼란은 독재자를 처단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세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나타난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우리 국민의 저력은 굳이 4.19혁명과 6월항쟁을 들먹이지 않아도 1년 전의 선거 열기만으로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본다.
역사에는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란 것이 있다. 그것을 매조지지 않으면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마련이다. 해방 공간의 친일파 청산이 그것이고 6월항쟁 당시의 독재 타도가 그것이었다. 두 개의 과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무리하지 않으면 온갖 모습으로 문제가 비어져 나오게 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는 그 무슨 '종북 좌파'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1987년의 성과를 넘어 다수 대중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한국 사회를 진전시키고 싶어 하는 진보 세력이 있다. 그들은 상대할 가치가 있는 보수 세력과 벌이는 정정당당한 경쟁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1987년 우리가 멈춘 지점을 되돌아보고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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