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미국뿐만 아니라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 시기 학살 책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중석 : 4.3 학살을 비롯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주민 집단 학살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난 이승만 대통령한테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학살이 일어나는 데 이승만 정권이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군경에 의한 학살이 많지 않았나. 그렇게 큰 규모의 학살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이 대통령의 태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어떤 태도를 말하는 건가.
서중석 : 초대 주한 미국 대사 무초는 이 대통령에 대해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을 신뢰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철저하고 완고한 독재자'란 평을 했다. 이 대통령에겐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가 있었다. 그의 감정적인 반공주의는 바로 이러한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통령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한 면을 보였다. 특히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사람에 대해선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 김구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이미 여순사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김구 암살과 관련해 이 대통령의 담화나 여러 자료, 증언을 보면 석연치 않은 것이 참 많다.
조봉암은 대선에서 두 번(1952년, 1956년)이나 차점자가 된 사람인데,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다. 조봉암 재판 관련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발언할 수 있나 싶은 부분들이 있다. (그렇게 이뤄진) 조봉암 처형은 불법이었다고 나중에 대법원에서 전원 일치로 무죄 판결을 하지 않나. (조봉암은 1959년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1년 대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편집자>)
장면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국무총리에서 해임되는데, 그때부터 이승만의 정적으로 부상한다. 장면은 1956년 8월 15일 부통령에 취임하는데, 취임식도 제대로 못 치렀다. (이승만 정권은 장 부통령에게) 취임사를 할 기회도 안 줬다. 그리고 부통령 관저는 항상 감시 대상이었다고 쓰여 있다. 월남(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왔을 때도 그랬다. 미국을 제외하면 이승만 정권의 제일 우방이라고 볼 수 있던 것이 베트남하고 대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한 영국 등과 (관계가) 별로 안 좋았고 일본하고도 사이가 안 좋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우방인 월남 대통령이 와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장면 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응오딘지엠은 천주교 신자였다. 장면 쪽도 어떻게든 보고 싶어 했는데, (이승만 측의 방해로) 끝내 못 봤다. 이승만이 장면에게 보인 태도를 보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
추종자 아니면 적…"대규모 학살, 이승만에게 큰 책임 있다"
프레시안 : 투철한 반공 세력조차 이념 공세를 당하는 일이 생긴 것도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사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에겐 비판 세력, 반대 세력을 빨갱이와 연관시키는 면이 상당히 있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 대해 색깔로 표현하기도 했다. '공산당의 보호자'라는 식이었다. 민주당이 자신 못지않게 극우 반공적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자신에 대해 강하게 비판적으로 나오면 이 대통령이 '저거 색깔이 이상한 자들 아니냐',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요즘 극우 세력이나 권력 쪽에 있는 사람들이 비판 세력을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 시기엔 빨갱이로 몰릴까봐 (다들) 전전긍긍했다. 김창룡이니 원용덕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프레시안 : '빨갱이 만들기'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서중석 : 1960년 마산의거가 일어났을 때, 친일파는 이걸 빨갱이가 사주한 사건으로 조작하려고 심지어 죽은 학생의 호주머니에 이상한 쪽지를 집어넣어 사건화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난다. 이게 결정적으로 4.19를 유발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4월 13일에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 이렇게 이야기한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말이다. "지금 조사 중"도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다. 한국전쟁 때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무대와 검찰, 경찰로 구성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는데,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을 때도 바로 특무대장, 검찰 책임자, 치안국장이 참여한 비상 기구를 만들었다. 배후를 조사하라는 거였다. 배후가 뭐가 있겠나. 이건 빨갱이 만들어내라는 얘기하고 비슷한 거였다. 여기에서 뭘 하려고 했는지, 나중에 그 진실이 보도되지 않나. (이런 걸 고려할 때) "지금 조사 중", 이것도 마산 사람들에겐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4월 15일에 나온 특별 담화는 표현이 더 강했다. 거기엔 공산당이란 단어가 9번인가 나온다. 이분이 아주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상당히 긴 담화문을 냈다. '이 대통령은 3.15 부정 선거와 학생들의 시위 같은 걸 몰랐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이 두 개의 담화문이다. 제2차 마산의거에 대해 그렇게 강한 표현을 써가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 건 그게 전국적으로 번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 아니겠나). 이승만 대통령은 굉장한 정치 감각을 가진 분이었다. 정치 10단이라고 항상 말하지 않나.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엄청난 위협이랄까, 강한 조치를 한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 불순분자 제거"…이승만의 무서운 담화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의 그러한 태도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의 이런 엄벌주의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엄벌주의를 보여준다. 이분은 (테러로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에 가서 독려하는 연설도 했고, 제주 4.3사건 군법회의와 관련해서도 사형을 선고한 사람을 하나하나 살펴봤다는 증언도 나온다. 특히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대통령이 낸 담화문(1948년 11월 5일)을 보면 참 무섭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프레시안 : 어떤 내용이었나.
서중석 : 그 담화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어 총과 다른 군기를 가지고 살인, 충화(衝火)하는 데 여학생들이 심악(甚惡)하"다고 하면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이렇게 담화를 발표한다.
여순사건이 왜 일어났나.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친일 경찰에 대한 증오, 그리고 분단이 된 것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에 대한 강한 불만 같은 것이 한 요인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노인 대통령으로서 전 국민을 어루만져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느냐, 난 그렇게 본다. 이 점은 국회의 동향에서도 드러난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회는 내각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노인네는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얘기했다.
어린아이가 앞잡이가 돼서 총 같은 걸로 살인과 방화를 했다? 난 이게 어디다 근거를 두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학생들이 총을 들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어린아이가 총을 들었다는 자료는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의 지나친 엄벌주의다.
프레시안 : 참 무시무시한 담화다.
서중석 : 이와 비슷한 표현이 놀랍게도 85세 생일을 넘긴 노대통령이 1960년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나자 발표한 두 번째 담화문에 또 나온다. "과거 전남 여수에서 공산당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많이 죽였을 때 조그만 아이들이 일어나서 수류탄을 가지고 저의 부모들에게까지 던지는 이런 불상사는 공산당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그러니 난동을 일으켜서 결국 공산당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마산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위협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세상에 여순사건에서 조그만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난 아직까지 어디서도 그런 걸 못 읽었다.
왜 노대통령이 이런 담화문을 발표한 건지, 그 저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한국전쟁 시기에, 또 4.3과 여순사건 때 일어난 엄청난 주민 집단 학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 보도연맹원 유해 발굴 모습(2013년 10월).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됐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거짓말 방송으로 양산한 부역자에게 오히려 철퇴…사과는 없었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때 '부역자'를 양산하고 그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과 관련해서도 이 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서중석 : 부역자 처벌에 활용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뭐냐 하면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비상 조치령)이란 거다. 1950년 6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서 국무회의를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주재하고 이것을 결정했다. 참 불길한 일이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결정이었다고 본다. 놀라운 건 이 비상 조치령이 6월 25일자로 돼 있다는 거다. 사흘을 소급한 거다. 이게 가능한 건가. 그렇게 소급하는 게 맞는 건가. (소급 외에도) 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이 보인 모습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6월 25일 전쟁이 나자 이 대통령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날 저녁 주한 미국 대사에게 '(난)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뜻부터 밝혔다. 27일 새벽에 열린 심야 비상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심야 국회와 심야 비상국무회의가 열린 때와 비슷한 시각에 이 대통령은 미리 대기시킨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홀로 내려갔다. 국무위원에게도, 군 지휘관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전으로 가서 (육성을) 녹음해 서울에 방송을 틀게 했다. 전쟁 발발 후 대통령의 첫 방송이었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방송 요지는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모든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말 것이며 대통령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킬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자기 혼자 대전으로 피신했으면서 그런 (거짓말) 방송을 내보낸 거다. 서울 사람들이 (대통령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다음 날 새벽 두 시 반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그러면서 수많은 시민이 피신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부역자 아닌 부역자가 된 것 아닌가.
이렇게 대통령의 거짓말 방송 때문에 '잔류파'라 불린 부역자가 대량으로 산출됐는데, 정작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부역자를 엄벌하라는 초강경 조치를 내렸다. 너무나도 가혹한 일 아닌가. 그래놓고 이 대통령은 7월 1일, 이번엔 호남선을 타고 남해안을 돌고 돌아 부산으로 또 내려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프레시안 : 비상 조치령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 놀라운 대목이 많이 있다. '증거를 생략할 수 있다'는 대목도 있다. 증거를 대지 않고도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다 대부분 중형을 선고하게 돼 있었다. 특히 방화, 강간 등 몇 가지에 대해선 일률적으로 사형을 선고하게 돼 있었다.
한 재판관이 쓴 글을 보면 '(징역) 3년이나 5년을 선고할 만한 사건인데도 (비상 조치령 때문에) 사형, 무기 징역, 징역 15년 같은 중형을 선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며 '참 힘든 재판'이라고 토로하는 내용이 나온다. 판결하기 더 힘들게 한 건 단심이라는 점이다. 재판관이 한 번 잘못하면 돌이킬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단심이니 굉장히 빨리 재판하게 돼 있는 건데,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판결이 많았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건데, 그 당시 무죄를 선고하면 어떻게 됐겠나. 그렇게 살벌한 세상에서 (부역 혐의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비상 조치령은 부역자 처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참 무서운 일이다.
프레시안 : 국회는 이 전 대통령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서중석 : 당시 국회는 민간인들이 그런 식으로 희생되는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국회는 비상 조치령이 남용되는 것을 막고자 1950년 9월 '부역 행위 특별 처리법'을 만들었다. 부역자를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과 함께 사형(私刑)금지법도 통과시켰다. 9.28 수복을 전후해 여러 우익 청년 단체 등에서 법에 근거하지 않고 (부역자로 규정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테러도 자행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 만든 법이었다.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두 법에 대해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는 1950년 11월 두 법을 다시 통과시켜 법률로 확정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법들을 시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비상 조치령 때문에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자, 국회는 '비상 조치령 중 개정 법률안'을 다시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국회가 원안대로 다시 이 법을 통과시키는 일이 생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열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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