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9일 개헌에 관련된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저는 국민적 합의 수준이 높고 시급한 과제에 집중해서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한다"며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 일치 문제는 정치권, 학계, 시민사회, 국민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공론화되어 왔고 합의 수준도 높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주장대로 권력구조 개편에 한정되는 '원포인트 개헌'에 대한 학계와 시민사회의 공감대는 높은 편이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난 해 부터 "현 정권 내의 개헌은 안 된다"고 개헌논의의 촉발을 막아 왔다.
대통령이 헌법으로부터 보장받은 개헌발의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현재로선 그 가능성을 가늠하기는 힘들다.
이날 밝힌 대로 노 대통령은 후보시절, 당선자 시절에 이미 개헌을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개헌 추진 가능성을 극구 부인해 왔다는 점에서 '왜 이 시점에 개헌 카드를 던졌나'는 의구심이 남는다.
작년엔 "되지도 않을 일로 평지풍파 일으킬 생각 없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2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산행에서 당시 3개월 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언급하며 "(대통령) 임기 중간에 선거가 끼어 있어 문제가 있다"며 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형식 논리적으로는 2~3년 업적의 중간평가를 위해 적절하게 (임기 중간에) 선거를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면서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심판은 한꺼번에 모아서 딱 진퇴를 결정하는 게 적절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4년 중임제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대통령 당선 후 두 번째 대선을 진퇴까지 포함한 '대통령 중간평가'의 기회로 삼자는 주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이같은 발언이 개헌시사로 해석될 것을 우려해 "대통령이 개헌을 끄집어내 추진할 상황은 아니다"라며 "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개헌 문제를 들고 나오면 찬반 입장을 표명할 수는 있겠으나, 적극적으로 개헌을 주도할 수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노 대통령은 "개헌에 정책 우선성을 두지도 않고, 되지도 않을 일 갖고 평지풍파 일으킬 생각 없다"고까지 말했다.
당시 이병완 비서실장은 심지어 "대통령의 발언을 개헌으로 연결시켜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올해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이날 "저는 그동안 정치권의 논의를 기다려 왔다"며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1년 전에 비해 시민사회와 학계의 개헌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정치권이 정략적 판단 때문에 논의를 꺼리는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국회 상황이 더 힘들어진 점을 감안하면 "되지도 않을 일 갖고 평지풍파 일으킬 생각 없다"는 자신의 말을 뒤집은 것이 분명하다.
청와대 인사들은 고비고비 주요한 정치현안이 닥칠 때 '대통령 중임제 개헌안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으면 개헌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개헌안을 낸다고 해서 통과될 가능성도 없지 않냐"고 되물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9일에는 "단지 (대통령) 당선만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 있게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개헌을 지지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한나라당 대권주자들을 압박하며 "정치권과 국민 여러분의 결단을 당부 드린다"고 입장을 바꿨다.
청와대의 이같은 입장 변화는 일단 지난 연말부터 이어져 온 '할 말은 하는 정치'의 일환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최근 3부 요인 및 정당 지도부 초청 신년인사회에서 "국민들의 평가는 잘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작년에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여론의 역풍 가능성을 무릅쓰고 부산시의 북항개발계획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여론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거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이병완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 "정기국회가 끝난, 지난 연말부터 개헌에 대한 집중적 검토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최소한 손해볼 일은 없는 것 같지만…
이날 노 대통령이 "(개헌 제안에는) 결코 그 어떤 정략적 의도도 없다"고 강조했지만 노 대통령의 의도했든 말든 개헌논의는 거대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이후 열린우리당은 즉각 환영입장을 발표했고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중심당 등 비교섭 야당들은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면서도 원칙적 찬성 입장을 밝혔다.
오직 한나라당만이 "개헌과 개헌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차기 정권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며 기존의 당론을 고수했다.
하지만 개헌 필요성 자체에 대한 학계와 시민사회의 공감대가 높은 상황에서 개헌 논의가 활발해 질 경우 한나라당이 마냥 개헌논의를 외면하기도 어렵다. '아무리 옳은 사안도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하는 것은 무조건 반대하며 끝까지 발목 잡냐'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일부 후발주자는 이명박 전 시장 등과 차별화 전략 차원에서 개헌을 지지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자칫하면 자중지란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사수파다, 통합신당파다' '재야파다 과천파다'하는 우리당의 내홍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계산하면, 더 이상 별로 잃을 것도 없는 노 대통령 입장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 좋고 설사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손해보다는 득이 클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개헌정국'의 결산이 노 대통령에게 유리하기만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최근 들어 각종 정책현안은 그 사안 자체에 대한 합리적 평가보다 그 문제를 제기한 정치주체의 지지율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70%에 육박했던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대한 지지가 정부 여당의 지지율 하락세, 한나라당 지지율 상승세와 맞물려 날이 갈수록 떨어졌던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노 대통령이 제기한 개헌논의의 타당성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팽배한 반노 정서를 뚫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또한 부동산 문제, 경제적 양극화 문제 등 산적한 민생현안을 방기하고 추상적인 담론에만 매달린다는 '틀에 박혔지만 강력한 비판'도 노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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