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4336년(2003) 양력 정월 6일이다. 계미(癸未)년이다.
탈고한 지난 해 8월 7일 이후 다섯 달이 지났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과 《월간중앙》에 이미 발표된 1부, 2부의 오탈자 바로잡기와 약간의 문맥 변경만 남기고 3부의 교정이 오늘 다 끝났다. 지난 다섯 달 사이에 만해문학상 수상이 있었고, 또 대산(大山)문학상 수상이 있었으며 사상전집 전 3권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리고 12월 한 달 내내, 또 지금에까지 주한미군의 무한궤도차량에 압사한 두 여중생의 명복을 빌고 미주둔군 지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SOFA)의 전면개정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범연한 일이 아니다. 작년 6월의 '붉은 악마'가 '촛불'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먼저 사상전집 출판기념회에서 발표한 소감 내용과 만해.대산 두 문학상 수상소감 요지, '촛불'이라는 제목의 60매 가량의 글과 그 글이 실릴 《김지하의 화두―붉은 악마와 촛불》의 머리글, 군대에 간 막내 세희(世熙)를 면회간 일, 그리고 올해 2월 하순에 출간예정인 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의 서문과 〈다시 회상을 마치며〉라는 마지막 몇 줄의 느낌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지난 8월 이후에 나로서는 내 생애에서 퍽 중요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연히 여러 가지 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감회들이 다름 아닌 내 생애의 어떤 결구(結構) 비슷한 것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상전집 출판기념회 소감 요지 (4335. 10. 25)**
국가적 비전이 바뀌고 있다.
이제까지의 근대화, 공업화와 민주화, 사회변혁이라는 두 가지 비전이 세계와 동북아의 물류 중심으로의 비약이라는 경제사회적 비전 쪽으로 바뀌고 있다.
물류중심으로의 비약이라는 비전은 남북한 공유의 전 민족적 비전으로까지 부상되고 있다.
남북 접근과 민족통일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물질이 있으면 정신도 있다.
경제 옆에는 문화가 있는 법이다.
물류의 중심은 곧 문화교류에서도 중심이어야 한다.
대륙과 해양, 아시아와 유럽, 즉 동서양 사이의 문화교류의 중심으로 한반도가 또한 제때에 비약해야 한다.
세계문화창조와 교류융합의 허브로서의 위상에는 그만한 조건이 따른다.
아시아의 고대에 대한 대대적인 문예부흥, 세계문명사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대규모 문화혁명, 그리고 이와 같이 고대로 들어가는 문예부흥과 미래로 나아가는 문화혁명을 똑같이 관통하는 새로운 미학의 건설, 즉 문학예술과 역사와 철학을 통전하는 새 차원의 문화 및 문화이론의 창조, 이 세 가지가 조건이다.
이 과제는 우리가 동아시아 전 민족들과 구미, 이슬람 등 전 세계인과 함께 그들의 공동참여를 통해 달성해야 한다. 대혼돈에 빠진 세계사의 갈증에 찬 요구에 대한 아시아의 답변이다.
나는 이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미력이나마 나의 여생을 걸겠다.
***만해문학상 수상소감 (4335. 11. 25)**
옳지 못한 정치에 대한 긴 세월의 저항은 일상적 삶의 황폐와 나날의 정신적 고통으로 귀결되었다. 근 10년 간 나는 거의 잊혀졌고 혼자였다. 그러나 그 고통은 어쩌면 여러분 자신의 고통이기도 하다. 만해상은 바로 이 일치 때문에 주어지는 것 같다.
기이한 일은 또 있다.
이 상이 나의 모순어법에 동의를 표시한 점이다.
나는 20대에 이미 형식논리와 변증법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특히 변증법에 대한 일방의 흡수와 타방의 극복을 내 삶의 한 과제로 설정했다.
세계는 변화했고 인류의 정신도 크게 바뀌었다.
세계화와 지역화가, 보편적 지구화와 개인화가 같은 지평에서 함께 보합적 관계를 갖는 세상이다. 모순 사이의 통일성, 상생과 상극, 극단과 극단 사이의 상호보완성, 음양법, 연기법, 'No'와 'Yes', 즉 불연기연의 생명논리, 그리고 서양의 모순어법, 즉 '옥시모론'이 현실적인 평화의 논리, 논리적 평화로서 대중화되어야 하는 시대다.
만해문학상이 바로 이 점에 동의한 점이 나의 놀라움이다.
마지막으로 창비가 제기한 '동아시아론'은 이 시대의 중요한 담론이다. 쇠퇴의 기미가 보이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다만 동아시아론이 현실에서 힘을 가지려면 다음 세 가지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하나는 아시아의 고대에 대한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인의 대대적인 문예부흥, 그리고 새로운 생태학과 영성의 미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문화혁명, 마지막으로 이 부흥과 혁명을 다같이 관통하는 새로운 미학의 탐구와 그 보편화다.
우아미(優雅美) 대신 숭고미(崇高美)가 중심에 서는 괴기와 환상이 현실주의와 결합하는 이른바 '추(醜)의 미학'이 전면에 떠올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과 무의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에콜로지와 사이버네틱스, 종이문학과 디지털문학이 서로 결합․융통하는 새 세대의 새로운 미학일 것이다.
이러한 삼대 과제를 조건으로 함으로써만 동아시아 문학과 문화론은 비로소 그 현실적 힘을 갖게 될 터이다.
***대산문학상 수상소감 (4335. 11. 28)**
소감 발표를 4분 안에 끝내야 한다.
문득 생각이 미치는 것이 있다.
대산문학상과 만해문학상을 거의 동시에 받은 점이다. 한 후배가 말했다.
"큰 산과 만 개의 바다를 누비는군요"라고.
산과 바다는 그야말로 대륙과 해양이다. 대륙과 해양의 교류, 교차, 융합은 한반도 남북한 공유의 민족사적 비전이 되었다. 한반도 전체가 대륙과 해양 사이의 '랜드 브리지', 즉 거대한 부두로 평가되어 세계와 동북아의 물류 중심기지로 상승할 것이다.
그 밖에 산과 바다는 또 무엇일까?
추사 선생이 즐기는 시구 중의 하나에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山嵩海深)'라는 말이 있다.
산이란 생명의 상징이고 바다는 영성, 즉 마음의 상징이다. 생명의 최고 표현, 최고의 아름다움은 '숭고함'이며 영성의 최고 표현, 의식의 최고 가치는 '심오함'이다.
이것은 또한 생태학과 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고 전통적으로는 목숨을 최고 가치로 하는 선(仙)과 마음을 중심 바탕으로 하는 불(佛)의 교호결합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미래 인류문화의 핵심 내용이다.
앞으로의 문학은 바로 이 같은 산과 바다의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 오늘날 생태시와 명상시, 괴기성과 환상성이 젊은 문인들 속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괴기성에는 숭고함이, 환상성에는 심오함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나에게 문학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시를 쓰기가 날로 더 힘들어진다. 살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부디 이 상의 수상을 계기로 나의 문학에 높은 숭고함과 깊은 심오함이, 생명과 영성이 함께 깃들이기를 기원한다.
***강연집 《김지하의 화두―붉은 악마와 촛불》의 머리글: 붉은 악마와 촛불**
'붉은 악마'는 들끓는 불이요 태양이고, '촛불'은 달빛이며 고요한 물이다.
그런데 붉은 악마가 바로 촛불이다.
유월의 젊은 그들이 곧 십이월의 젊은 그들이다.
불이 물이 되고 양이 음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양이면서 음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세대가 무엇인가를 할 것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혼돈과 황폐와 재앙에 빠진 인류 및 지구의 뭇 생명에게 새 삶, 새 문화, 새 문명의 원형을 제시할 것 같다.
그들이 세계사의 방향에 나침반이 되어주는 한, 이 민족은 그 누군가 예언한 바 있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라.
항상 지도자보다 민중이 훨씬 더 현명하고 용감하고 예감과 관용에 넘치는 민족이 이 민족이요 이 민족의 역사였다.
임진란에서 동학에서 의병과 삼일운동, 4월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지난 유월의 개벽적 사태에 이르기까지.
요컨대 리더십이 문제다. 정치는 아예 썩어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지식인은?
역시 의문부호로 남는다. 지난 유월에 붉은 악마의 대파도 앞에 압도되어 나치즘이니, 파시즘이니, 집단 히스테리니 운운하던 지식인들이 이제 와서는 10대, 20대, 30대 초반의 촛불시위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미군철수니 반미 같은 구호를 외쳐대며 10대보다 오히려 더 비전략적인 발언과 비현실적인 과격한 성명서들을 남발하고 있다.
촛불은 증오의 도구도 적대의 상징도 아니다. 그 반대마저도 결코 아니다. 촛불은 가장 경건하면서도 다소곳한 '모심'인 것이다. 촛불이 빛나는 밤거리에서 부시의 허수아비를 처형하는 사람들의 감수성은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순결하면서도 고요한 10대 소녀들의 손에 손에 받쳐든 촛불의 힘은 그따위 적대나 증오 같은 것과 비교도 안 되는 심오하고 공번된 신령의 위력을 지닌다.
흔히 정치적으로 문리가 터졌다고 말하는 지식인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의젓한 그들의 촛불을 보며 나는 세계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문화적 메시지에 결합된 그들의 미래를 깊이 확신하게 된다. '늘손'이 있는 세대다.
이 책은 붉은 악마와 촛불세대를 의식하면서 그들의 새로운 사상이 문화를 통해 나타나리라는 강한 예감 아래 행한 문학 등 여러 강연들과 두 개의 짧은 글로써 구성되었다. '붉은 악마'에 관한 글은 맨 앞에, '촛불'에 관한 글은 맨 뒤에 싣는다.
그 사이 우리 역사, 특히 근대가 시작되는 때에 여러 사건, 여러 사태들이 있었지만 나는 지난 유월의 붉은 악마의 한 달과 지금의 이 한겨울 촛불의 한 달에 직결된 선구적 사건을 1860년 4월 5일 11시 경주 용담에서 있었던 최수운 선생의 '동학계시(東學啓示)'와 1879년부터 1885년 사이에 충청도 논산 띠울마을에서 일어난 김일부 선생의 5년에 걸친 '간역묵시(艮易黙示)'에서 발견한다.
이 직결의 논리가 차차 세계사에서 강조되는 날이 올 것이다. 붉은 악마와 촛불세대가 세계역사의 방향이 그리로 향하도록 촉매할 것을 나는 믿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들은 결코 국수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감적으로 민족과 동양을 알고 있고 사랑한다. 그들은 결코 세계화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생리적으로 열린 삶, 전 지구적인 개방사회를 지지한다.
이것은 분명 모순이다.
모순은 그 자체로서는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순일 뿐이다.
그러나 모순어법이나 역설, 음양법이나 연기법, 불연기연법으로서는 도리어 통일이다.
모순이면서 통일인 바로 이 논리가 그들의 생활논리다. 내 나이 또래 근처의 지식인들이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역설을 그들은 생득적으로 받아들이고 익힌다. 누가 그들을 가르쳤는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컴퓨터에는 변증법이 없다."
다니엘 벨의 말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 왈, 생명은 변증법 대신 '아니다, 그렇다'의 역설법이 지배하며 생명을 모방한 컴퓨터나 엘리베이터가 가장 단순화된 이진법 체계라 한다.
생명만이 아니다. 영성, 즉 마음이라는 이름의 무의식의 운동 역시 '아니다, 그렇다'의 이중적 운동을 기본으로 한다. 참선은 끝없는 이중운동이다. 음양(陰陽)이나 색공(色空)이 다 그렇다. 심지어 이제는 문리학에서 문명사에서도 그렇다. 데이비드 봄과 루이스 멈포드가 그 사례다. 뇌수과학은 이 같은 운동에 먼저 착안하여 뇌의 모사물인 컴퓨터의 작동원리를 변증법이 아닌 역설과 이진법으로 착종시킨 것이다.
우주와 인류의 진화 역시 내면 영성과 외면 생명 사이의 이 같은 교호운동이며 모든 생성은 곧 이중적이다. 카오스 원리는 바로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붉은 악마, 촛불세대의 스승은 바로 인터넷이며 컴퓨터인 것 같다. 민족과 동양의 사상문화의 중핵으로 제시된 후천개벽의 원형, '태극궁궁(太極弓弓)'이 바로 이 같은 모순.통일의 이중운동과 논리의 이중성, 복잡성의 압축인 것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젊은 그들은 정치나 경제를 초점으로 보지 않는다. 문화가 초점이며 그 새 문화 속에서 새 경제, 새 정치의 새 씨앗을 보고자 희망하는 세대다.
그들의 책무는 막중하고 그들의 가능성은 엄청나게 크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일상생활 자체를 그러한 문화로 관통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미덕이다. 왜냐하면 우리 나이 또래 위아래가 다 함께 이론과 실천, 정신과 육체, 존재와 당위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고뇌해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촛불들은 그 이중성 자체를 살아 있는 삶의 실존적 논리로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붉은 악마들, 촛불들은 신화와 과학으로, 고대와 미래로 동시에 나아가며 동시에 쌍방향 통행을 시도하는 세대이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러하매 이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붉은 악마, 촛불들이 주체가 되는 문화운동이 남북한에 밀어닥칠 동북아 물류중심을 향한 경제특구의 확산과 병행하여 크게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세 가지 과제를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첫째, 지금 퍼지고 있는 복고와 신화적 판타지 지향을 상승시키며 본격화하는 아시아 고대에 대한 대규모 문예부흥을 전 세계적으로 진행하는 것.
둘째, 아시아 고대 르네상스로부터 발화되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토대로 하여 과학과 미학을 결합시키며 미래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여러 문화적 장애물에 대한 전방위적인 문화혁명을 진행하는 것.
셋째, 첫째의 '고대로 들어가는〔入古〕' 문예부흥과 둘째의 '미래로 창조적으로 나아가는〔出新〕' 문화혁명을 내내 관통하는 새로운 미학의 탐구로서 현재 진행중인 감수성 변동에 기초하여 괴기, 골계, 축제, 숭고, 심오, 환상과 차원 높은 실재론 등을 결합하는 '추의 미학'에로 미의식과 상상력의 대쇄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과제는 남북한과 동아시아, 나아가 유럽과 미국, 이슬람과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와 모든 아시아 민족들의 여러 문화인,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참가 속에서 다층위적, 다단계적, 다양식적인 탐구와 융합을 겨냥해야 할 것이며 한반도를 세계문화의 용광로요, 일대 해방구로 전변시키는 목표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나는 천시(天時), 즉 역사적 요청이 그러하고 지리(地理), 즉 세계에서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에서의 한반도가 가진 물심양면의 교류.교차.융합의 '허브', 중심으로서의 이점(利點)이 그러하고 또한 마지막으로 지난 유월의 700만 명이 넘는 '붉은 악마 세대'와 지금 진행중인 '촛불 세대'의 카오스 민중, 대중적 민중주체의 등장, 곧 인화(人和)가 그러함을 확인하고 또 확신한다.
전 민족 역사를 통해 오늘과 같은 웅혼한 대비약의 기회가 주어진 적은 별로 없다. 더욱이 문화적 비약의 컨텐츠인 새 삶의 원형이 이미 우리 앞에 뚜렷이 계시되어 있고 젊은 주체들이 벌써 그것을 접수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제시할 역사적 소명 또한 의식, 무의식 중에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
그들.
'붉은 악마와 촛불' 세대는 민족을 대표하여 곧 '성배'를 부여받은 것이다.
다만 그것을 그들 자신이 확실히 깨닫는가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이다.
4336년2003년
정월 초하루 일산에서
김지하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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