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뜨악했다. 왜 하필이면 붉은색이며 또 왜 하필이면 악마란 말인가? 깊이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발한 것, 자극적인 것, 모난 것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 나름의 해프닝쯤으로 여겼다.
듣자하니 기독교쪽에서는 악마라는 용어에 대해 항의했다 한다. 또 늙은 축에선 '붉은 빛'과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라는 붉은 티셔츠의 슬로건을 못마땅해했다 한다.
<사진; 붉은악마 사진파일>
내가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월드컵에서 선수들의 선전(善戰)을 독려하는 붉은 악마들의 응원이 아연 돋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더 나아가 내가 적이 놀란 것은 그 많은 숫자, 그 높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사고 한 번 사건 하나 터지는 일 없이 장내의 질서를 차분하게 유지한 점과 경기 후엔 거리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는 붉은 셔츠 젊은이들의 극과 극 사이의 조화로운 행동을 보고 나서다.
그러나 참으로 놀란 것은 그 다음부터다. 그들의 '대~한민국'의 연호와 뒤를 이은 '짝짝짝 짝짝'의 박수가 모두 우리 민족음악의 기본박자인 '3박(拍) 플러스 2박' 즉 '엇박'이라는 점을 깨닫고 나서, 또 그들의 시뻘건 도깨비 로고가 사실은 배달국(倍達國) 고조선의 천황 '치우'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그리고 그들이 국기(國旗)인 태극기를 망토로, 모자로, 스커트나 바지로까지 만들어 입고 얼굴의 스티커로까지, 흔들어대는 상징으로까지 드높이는 것을 보고나서다.
선수들 또한 놀라웠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이 돋보이고 투철한 정신력이 도리어 몸을 앞서는 한판 '기(氣)'싸움이었으니, 수비수가 공격을, 공격수가 수비를 융통성 있게 자유자재로 원활하게 해치우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뛰고, 외국 선수의 반칙에는 오히려 아량을 베푸는 그 탁월한 유격전 못지않은 팀워크와 경기운영의 묘수(妙手)는 놀라움 이외의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었다.
더욱이 독일과의 경기에 패배한 직후 붉은 악마들 속에서 튀어나온 두 가지 연호는 눈물 나는 것이었다. 패배한 한국선수들에게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였고, 승리한 독일선수들에게는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였다.
이것은 또 무엇일까?
'관용'과 '우정'이다. 이른바 '톨레랑스'라는 것이 프랑스인만의 전유물도 아니었고, '우정'이라는 것이 유럽인들의 독점품목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내가 가장 놀라고 신기해한 것은 이런 일이 어떻게 한 지도자나 한 집단의 지시.조직.강요 하나 없이 간단한 틀 몇 개만 가지고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물결치듯 수백만 인파 속에서 창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였다.
한마디로 말하자.
'아름다웠다.'
다시 말하자.
'자랑스러웠다.'
몇몇 교수 나부랭이들이 '나치즘'이니 '쇼비니즘'이니 '파시즘'이니 하고 떠들었으나, 그건 모두 헛소리요 우스갯소리였다. 왜냐하면 월드컵 전체를 통해서 나타난 것은 붉은 악마와 시민들, 그리고 선수들이 모두 다 복잡성.다양성.개성.혼돈을 사랑하는 세계시민이었으며, 월드컵 주최국으로서의 예절과 균형과 질서를 옹호하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붉은색이 기조로되(통일성, 질서), 온갖 패션, 갖은 치장(다양성, 혼돈)이 혼란스럽게 나타남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역동적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터키와의 삼사위전이 열리던 날, 나는 스스로 제안해서 한국관광공사 지하강당에서 '붉은 악마들을 위한 김지하의 태극기 이야기'라는 1시간짜리 강의를 했다. 그 요지가 《주간한국》과 《동아일보》 출판국에 의해 활자화되었다. 또 정신세계사의 송순현 사장과 춘천의 정성헌 형은 정기적인 붉은악마들의 공부모임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공부의 결과가 정신세계사에서 단행본으로 곧 나올 것이다.
이삼 일 전에 나는 《월간중앙》의 부탁으로 〈유월개벽(六月開闢)―붉은 악마들의 새 문화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이라는 65매짜리 긴 글을 써주었다. 나의 회상은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나 자신에 대한 결론을 향하고 있다. 실패한 내 삶과 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삶 속의 어떤 새로운 창조에 대한 지향만은 실패도 망실忘失도 아닌 명백한 사안이다. 붉은 악마들의 새 문화에 대한 나의 긴 글로 그것을 대신한다. 그것, 그리고 그들이 나의 회상의 민중적.민족적 결론이다. 그러니 제목을 차라리 '흰 그늘'이라 부름이 옳을 듯하다.
유월개벽―붉은 악마들의 새 문화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지난 6월, 한 달 내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어대며 사람들이 뛰쳐나와 야단법석하던 그 문화적 태풍을 도대체 무엇이라 이름지어 부를 것인가?
그냥 '월드컵'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감히 '유월개벽'이라 부르고자 한다. 개벽이 아니라면 그 사태를 지시할 수 있는 마땅한 말이 우리에겐 없다.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열광한 붉은 셔츠만도 7백만, 텔레비전을 싸고돌며 흥분한 붉은 가슴까지 합친다면 3천만이 훨씬 넘는다.
문제는 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한 달이라는 긴 기간 내내 보여준 그 어마어마한 열광과 역동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폭력사건이나 불미스러운 사고 없이 질서를 지켜주었고, 단 한 오리의 국수주의적 오만함이나 민족적 편견의 노출 따위 없이 돈독한 국제주의적 예절과 주최국으로서의 세계인다운 반듯함과 의젓함을 애써 지켰다는 그 기적적인 기록이다.
이것이 과연 현실인지를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요즈음의 나의 버릇이다.
그러나 유월개벽은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이 꿈이 아닌 바로 현실이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심각성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비겁한 태도들이 지식인들 속에서 슬며시 나타났다는 점, 이점이 아마도 유월개벽에서 유일한 사건이요 사고일 것이다.
누군가 '나치즘의 예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이 독일에 패배했을 때 붉은 악마들 속에서 터져나온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라는 국제적 우정의 연호가 나치즘의 예감일까?
누군가 '파시즘의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역시 독일에 패배했을 때 한국대표선수들에 대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라는 관용의 연호가 붉은 악마들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파시즘의 가능성일까?
어젯밤 라디오는 지난 번 터키전에서 패배한 한국인들이 도리어 승리한 터키인에게 보여준 그 깊은 우정에 감사하여 터키를 관광하는 모든 한국인에겐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앙카라발 터키 뉴스를 보도했다. 그럼에도 대구의 터키전에서 '대~한민국'이 외쳐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는 이유만으로 '쇼비니즘'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조국을 지향하는 일체의 민족통일 대업(大業) 따위가 역시 갈데없는 쇼비니즘이겠다.
그래도 되는가?
지식인들 중에는 유월개벽이 그저 '일회적(一回的) 사건에 그칠 것이라고 얕보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다. 직무유기다. 왜냐하면 설령 그것이 일회적이라 하더라도 지식인이란 그것을 역사의 '악센트'로 파악하여 그 근거와 사유와 맥락과 방향을 샅샅이 궁구窮究해야 마땅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런 명백한 부정적 태도만이 아니다. 긍정적인 쪽으로 분류되는 태도들 안에마저 문제는 있다. 문화, 그것도 시민문화, 민중문화의 개혁을 전업으로 하는 문화전문가들조차 유월개벽의 그 '민족적이면서 세계적인' 독특한 메시지에는 한 오리의 관심도 없이, 그저 '광장문화의 회복'이니 '문화민주주의의 갈망' 같은 문화적.정치적 구호로만 유월개벽을 한꺼번에 정리해버리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 역시 심각성의 회피이다.
광장문화도 문화요, 문화민주주의도 문화다. 그것을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광장이나 민주주의라는 외면으로 세 발짝 나갔으면 문화라는 내면으로 최소한 한 발짝 정도는 들어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가 무엇인가? 동양적 개념으로 문화는 우선 내면적 사태다. 그렇게 본 뒤에야 비로소 그 외면화를 논의할 수 있는 것이 동양의 문화개념이다. '무늬가 안에 있다(文在內也)'라거나 '무늬가 그 가운데 있다(文在其中)'라는 역리(易理)가 그것을 뜻한다.
유월개벽의 경우에 무늬나 문채(文彩), 즉 문화는 바로 저 끝없이 되풀이된 연호와 박수와 로고와 태극상징 '안'에, '그 가운데에' 들어 있다. 이것을 끄집어내어 자각화하고 명제화(命題化)하는 이제부터의 노력마저 게을리한다면 앞으로의 문화개혁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예 없는 것도 창조라는 이름 아래서 쥐어짜내야 할 그런 문화사적인 대전환점이 바로 지금이다. 더욱이 저 숱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리버럴리스트들이 그처럼 깊이 심취해 있는 동북아 전통문화의 원형 계승과 그처럼 깊이 갈망해 마지 않는 동북아 문화전통의 창조적 해석에 단 한 발자짝이라도 접근해야만 이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다운 세계적 지성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하물며 바로 그와 같은 내용들, 관점들이 젊은 군중의 끝없는 함성 속에 되풀이되고 되풀이되어 마치 상식처럼 관통하고 있음에랴!
그것들을 자각화.명제화하는 곳에 지식인과 문화전문가들의 사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북아의 모든 것이 다 선(善)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유월개벽에 대한 중국의 속내 깊은 시샘이 무엇과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유월개벽에 대한 일본의 겉치레뿐인 칭송이 어디와 무엇을 겨낭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짐작해내야 할 것이다.
남은 때가 그리 많지 않다.
세계에 있어서의 동북아!
동북아에 있어서의 허브!
전 세계적 물류와 동서남북 문화 교류의 허브!
그것이 결판나는 때가 그리 멀지 않다. 그러하매 유월개벽의 그 빛나는 나날에 나타난 붉은 악마들의 새 문화, 새로운 문화적 코드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여기에 펼쳐보이는 것 또한 시절에 대해 그리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민족철학인 역리에서 일종의 운수(運數)로 치는 하나, 셋, 다섯, 일곱 그리고 아홉의 순서대로 말해나가겠다.
하나.
유월개벽의 외면적 경과는 매스컴에 의해 정확히 보도되어 이미 드러났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음양(陰陽)'이다. 그렇다면 그 숨겨진 하나의 내면적 규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태극(太極)'일 것이다.
음(陰)과 양(陽)이 서로 물고 돌아가는 근본적인 하나의 차원, 즉 '중도(中道)'가 바로 태극이다. 그것은 현대과학의 개념으로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요 문명사의 용어로는 '역동적 균형'이며 문화적 패러다임으로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합성어인 '카오스모스(chaosmos)'다.
셋이 다 한 뜻, 한 태극이다.
그 어마어마한 열광과 역동과 혼돈에 가까운 활력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게 안정된 질서와 균형과 예절을 잃지 않았고, 모두 다 붉은 색 일색이요 일사불란한 그 통일성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혼란할 정도의 다양한 패션과 재치 넘치는 개성적 표현들로 인해 도리어 해체적이었다.
양극단의 모순에도 오히려 조화를 이룸으로써 지나친 통일성 일변도의 중심중심주의나 지나친 다양성 일변도의 탈중심적 해체주의 양쪽의 위험을 군중 자신의 의지와 감성으로 이미 일찌감치 넘어섰다는 말이다. 많은 내외의 평자(評者)들이 한결같이 바로 이 점을 두고 기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애당초부터 우리가 지닌 독특한 민족성(民族性)이 아닐까?
민족의 조상인 단군이 북방 대륙계의 유목이동민인 환웅의 영성(靈性)과 남방해양계의 농경정착민인 웅녀(熊女)의 감성(感性) 사이의 사랑과 결혼에 의해 탄생한다는 신화 자체가 우리 민족성의 상징적 근거가 아닐까?
민족성은 있다.
인간성.민족성이란 본디 없다는 속류유물론이야말로 오류다. 착오를 범하기 십상인 무상(無常)한 감각체험에 근거를 둔 판단체계로서의 유물론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착오요 오류인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총괄적 현실의식과 초의식, 무의식을 통합하는 인간의 우주적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근본성품〔性〕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고, 민족 또한 그렇다.
이렇게 보는 것이 도리어 외면과 내면, '아래로부터의 기제(機制)'와 ;위로부터의 기제'를 하나로 융합한 가장 영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첨단적 인식론이자 믿음직한 존재론일 것이다.
이른바 태극이 이것 아닐까?
셋.
혼돈과 질서, 역동과 균형, 카오스와 코스모스, 통일과 해체, 그리고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부터와 밖으로부터 사이의 분열대립의 이중성, 즉 음양 및 '아니다, 그렇다'의 양가적(兩價的) 생명교차라는 현재차원과 동시에 그 음양을 뒤에서, 밑에서, 숨어서 추동하고 견제하고 비판 쇄신하다가 때가 되면 마침내는 태극 스스로가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 개벽하는 이 '셋'의 이치가, 바로 유월개벽에서 우리가 뚜렷이 본 것이고 앞으로 민족통일의 대사변에서 우리가 다시금 보게 될 진정한 대개벽의 예감이요 그 내용이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이 '셋'의 이치와 신화를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로 상징하였으며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천부경》으로 논리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셋'의 이치는 우선 '천(天).지(地).인(人)의 삼대 원리이다. 한민족이 바야흐로 국운상승(國運上昇)의 때를 맞았다는 것은 부질없는 헛소리가 아니다. 천시(天時)란 반드시 있는 것이어서 모처럼 월드컵의 주최국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시간의 신비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세계사의 여러 대립국면들의 교차와 교류일치의 지점으로 부상하면서 그 창조적 합일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 기대되는 동북아, 그중에서도 또한 물류(物流)와 문류(文流)의 허브라는 한반도의 지리학적 요건 자체가 지리(地利)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남북민족의 유례없는 상호접근 상황 아래서 대한민국 전 인구의 70%라는 십대, 이십대, 삼십대 신인간(新人間) 세대의 단합된 민족문화역량으로서의 놀라운 성장 자체가 그대로 인화(人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지.인'의 '셋'의 이치는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人中天地一)'는 주체적 융합점으로 나타나, 오늘의 유월개벽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주체로 기대되는 청소년과 젊은 여성층의 주도력에 의해 폭발한 것이다.
앞으로 '셋과 하나의 이치(삼일신고와 인중천지일의 이치)'는 계속해서 우리 사상과 문화의 모터가 되어줄 것이며, 이 '셋'의 차원변화와 '아니다, 그렇다'의 생명논리는 동서양을 넘어선 생명.생태.생성 과학의 기본이론으로 크게 확산될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은 깊은 생명학의 이치가 한국의 절대다수 청소년과 여성에 의해 일개 축구응원의 외침으로까지 현실화․구호화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자각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문화화하고 그 문화화에 의해 민족통일이라는 새로운 창조적 통일원리의 차원으로 상승하면서 개벽할 것이 틀림없다.
다섯.
유월개벽에서 나타난 붉은악마 세대의 새 문화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젊은 새 세대만의 독특한 문화요, 민족 전체의 고유한 문화이며, 전 세계 인류의 새로운 문화의 새 알맹이와 새 틀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글의 핵심인 '3박 플러스 2박'이 그것이다. 3박자가 새로운 알맹이고 2박자가 새로운 틀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미는 더 깊고 그 파급범위는 더 크고 넓다.
유월개벽의 특징 중의 특징은 응원단과 선수들이 이룬 혼연일체의 호흡(呼吸)에 있다. '호'와 '흡'의 멋진 플러스 말이다. 만약 응원단의 열광을 3박자라고 한다면 선수들의 균형을 2박자라 할 수 있고 만약 응원단의 질서를 2박자라 한다면 선수들의 에너지를 3박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분류해서 '응원단의 3박 플러스 선수들의 2박'이라고 우선 가름해보자.
'3박 플러스 2박'은 민족음악의 기본박자요, 민족문학의 기본 음보音步이며 민족문화의 핵심 철학 원리다. 그것은 민족역사로 본다면 북방계 환웅족과 남방계 웅녀족의 플러스이며, 유목이동문명과 농경정착문명의 모순과 일치의 플러스이면서, 백두대간 동쪽과 서쪽의 삼수분화(三數分化)와 이수분화(二數分化)의 세계관.가치관 및 문명과 정치의 역동적 통합인 것이다. 그리고 철학으로 본다면 음과 양이요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영성과 감성 및 이성, 주체와 타자, 남성과 여성, 왕권과 부족공동체적 화백(和白)의 정치철학인 통일과 자유의 결합, 그리고 경제원리인 우주생태적 인간주의와 사회경제적 호혜주의의 결합인 신시(神市)의 경제 철학 등이다.
만약 응원단의 3박이 이와 같은 '문(文).사(史).철(哲)'의 문화원리, 즉 문학.문화.예술적 표현원리와 민족역사의 현재적 원형과 민족적이고 동양적이면서 인류적.우주적인 오래고 새로운 철학법칙의 삼자결합을 함축한다면, 선수들, 태극전사들의 2박은 개인개인의 육체와 정신의 통일, 기(氣) 중심의 수련과 신인간적 삶의 수양, 즉 '싸움의 예절', 그리고 단체.사회.세계적으로는 모든 대립항의 모순과 일치를 조화시켜 탁월한 유격전쟁과도 같은 놀이와 싸움의 '기우뚱한 균형'의 결합을 목표로하고 결국에는 호모 크레아티부스와 호모 루덴스의 결합, 일과 놀이를 균정하는 데에 그 중심이 놓여 있다.
3박이 역동.변화.혼란.혼돈.움직임, 즉 양이요 붉은 빛이요 남성이며 하늘이고 불이라면, 2박은 안정.균형.평형.평화.고요와 질서, 즉 음이요 푸른 빛이며 여성이요 땅이고 물이다.
그러므로 '3박 플러스 2박'이란 다름 아닌 '엇박'으로 길었다 짧았다, 빨랐다 느렸다, 이리 치다 저리 치다, 어울렸다 흩어졌다, 대립했다 통일됐다, 잉어걸이, 완자걸이처럼 끝과 처음이 서로 늦게 빠르게 교호교차하며 전체적으로 움직이다 고요했다 하는 '혼란스러운 균형'으로서 민족문화의 핵심이자 민족음악의 기본이다.
이 '엇박'이 곧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요 '역동적 균형'이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합성어인 '카오모'이고, 이것이 곧 혼돈과 복잡성, 애매성과 해체, 탈중심 일변도로 기울어지는 서구문명 속의 21세기 인류에게 그 나름의 혼돈의 질서, 그 나름의 역동하는 균형, 그 나름의 카오스모스의 새 차원, 새 나침반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무엇으로 그것이 나타났는가?
본디 2박 또는 4박인 '대한민국'을 '민국'의 2박은 그대로 두되 '대'를 '한'까지 길게 끌어 '대~한'의 3박을 만들고 거기에 급하게 '민국'의 2박을 붙여버렸다. '짝짝짝 짝짝'의 '3박 플러스 2박'의 박수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또한 '불림'과 '장단'으로 나타났다. 탈춤에서는 '낙양동천 이화정'이라는 '불림'이 '덩덕기 덩덕'의 '장단'을 부르듯이, '대~한민국'이 불림이라면 '짝짝짝 짝짝'은 장단이 된다. 우리 민요에서 후렴을 먼저 하고 가사가 있는 노래를 하듯이 '대~한민국'이 양이라면 '짝짝짝 짝짝'은 음이요, 부분적으로 보아도 '대~한'이 양이면 '민국'은 음이다. 또한 '짝짝짝'이 양이라면 '짝짝'은 음이 된다. 결국은 태극과 음양의 관계인 것이.
그러나 그 혼돈성.역동성을 더 복잡화시키는 점에 착상한다면 '태극'보다도 오히려 '궁궁(弓弓)'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와 같은 '3박 플러스 2박'이 '엇박' 또는 '혼돈박'에 기초하여 민요풍으로 복잡화시킨 것이 곧 '아리랑'이고, 록으로 복잡화한 것이 '오 필승 코리아'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궁궁'은 더 확장되어 '궁궁을을(弓弓乙乙)'로 복잡화.다양화.혼돈화한다. 그럼에 '태극이면서 궁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서양인들은 바로 이 모순된 통일형식 때문에 마음과 몸이 못따라 왔고, 발 박자가 안 맞아 혼란에 빠진 것 같다는 평론이 나왔을 정도다. 이런 문화, 즉 혼돈과 질서, 역동과 균형,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동시에 함께 붙어 있는 문화는 전 세계에 한국민족밖엔 없다. 혼돈이면 혼돈이고 질서면 질서인 것이다. 사실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문화 패러다임인 '카오스모스' 또는 '카오스모시스' 역시 프리고지네류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인 것이니 평형상태의 물에 일정한 높은 열을 가했을 때 비로소 새롭게 일어나는 대류, 즉 '기화(氣化) 현상'이지 그 자체로서 '애당초부터 혼돈이면서 질서인 태극 현상' 또는 '궁궁'인 지기(至氣) 현상은 아닌 것이다.
이 문화가 우리 민족의 독특하고도 보편적이며 신화적이면서 역사적이고 영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다섯'의 원리이다. 이 '다섯'이라는 엇박의 문화가 바로 역리의 기본으로서 태극, 음양과 나아가 오행인데 마치 서양식 모순어법 옥시모론(oxymoron)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얼핏 보아 변증법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엇박이나 역리와는 달리 모순어법은 형이상학적.정태적.연금술적이며 변증법은 모순성.투쟁성.대립성.정복성만을 중심으로 다루어, 공생과 상생 또는 조화 일치와 함께 드러난 현 차원과 숨은 새 차원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교차적 생명논리를 전혀 결핍하고 있다.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면서 동시에 통일되고 조화되는 것, 드러난 차원과 숨겨진 차원 사이의 끝없는 차원변화라는 음양 태극적 생성인 이 '엇박'과 '역리'는 모순어법의 한계와 변증법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한다.
민족문화의 바로 이런 특징은 앞으로 다가오는 신세대 신인류 문화의 특징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생명생성의 에콜로지와 영성소통의 디지털 사이버네틱스의 교호작용과 결합으로 보이는 차세대 문화와 문명의 핵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엇박' 다음으로 놀라운 것은 붉은 악마들의 그 시뻘건 '로고'다. 이 로고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일까?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배달국과 고조선 역사에 뿌리를 둔 현재적 역사 원형이 바로 이 로고다. 그것은 배달국의 제14대 천황 '자오지(慈烏支)',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살았다는 신화 속의 천황, 싸움과 전쟁의 신 치우 천황의 얼굴 모습이다.
당시 중국 화하족의 리더인 황제와 한민족인 배달국 동이의 리더인 치우는 74회나 전쟁을 치렀으며, 저 유명한 탁록전쟁에서 피비린내 나는 결정적인 전투를 치른다.
그 후 치우는 중국민족에게 두고두고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지금과 같이 두 뿔이 돋친 붉은 악마의 모습으로 전해내려 왔다.
동이족의 치우와 중국 화하족의 황제는 무엇 때문에 74회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였을까? 바로 여기에 중국과 한민족 사이의 문명관과 가치관, 세계관의 차이와 대립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일치점이 있고, 그러기에 그 역사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사의 미래에 하나의 의미심장한 현재적 원형이 되는 것이다.
4,500년 전 동북아에는 지구 기온의 대대적 상승과 함께 남쪽으로부터 북상한 남방계 농경정착문명이 전파되었다. 중국의 황제는 바로 이 농경문명 일변도로 중국을 쇄신하며 이전의 북방계 유목이동문명을 청산하고 모든 연관 부분을 숙청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이후 중화문명의 농업적 전통, 봉건제, 가부장제와 장자세습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정태적 우주관과 중국 중심주의, 제후국과 왕권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 동이족의 치우는 북방계 유목이동문명과 남방계 농경정착문명을 병행 조화 또는 공존 통합하려고 했고 유목적 영성의 가치관.세계관과 농경적 생명의 감성-이성적 가치관.세계관을 혼융하려고 했다. 환웅과 웅녀의 결혼의 신화 안에, 그리고 천제단(天祭檀)과 고인돌 안에 바로 이와 같은 유목과 농경, 대륙과 해양의 결합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 필사적인 문명전쟁에서 치우가 거둔 승리는 인류사적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 세계는 환경과 지구생태계의 오염.파괴로 신음하고 있다. 그리하여 부자나라 중심의 WTO 체제에 반대하여 많은 환경운동가와 생태주의자들, 제3세계 및 반(反)세계화주의자들은 일단 생명론적 차원의 새로운 유기농업과 생태학으로 세계와 민족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기농업과 생태학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유럽과 아메리카 중심의 지배적인 세계문명은 핸드폰과 노트북, 사이버와 디지털, 그리고 도시와 비행기, 공항, 주유소, 승용차, 호텔, 모텔, 항만을 일상화시켰다. 즉 유목문명의 부활이다. 유럽의 선진적 철학자들인 '자크 아탈리'와 '질 들뢰즈'까지도 미래에 도래할 세계문명은 유일하게 유목사회라고 일방적으로 못박아버린다. 들뢰즈의 경우 역사생성의 이중성.양면성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주장해온 자기철학에도 모순되는 태도, 즉 유목사회 일면성 강조라는 파탄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만큼 유목화의 요구 또한 큰 것이다. 문제는 농업 일변도나 유목 일변도의 외짝 문명으로는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배달 동이족의 치우가 세우려고 했던 '유목농경적(Nomadic-Agral) 이중적 통합문명'을 창조하는 비전을 의미 깊게 검토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시원에 있는 이같은 이중적 문명통합을 위한 줄기찬 투쟁의 원형을 자기들의 축구열을 표현하는 '로고'로까지 밀어붙인 붉은 악마들은, 참으로 인간과 민족과 세계인류와 지구생명계의 축복을 한아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엇박'과 '치우'에서 놀라는 사람들은 그 현란한 태극기와 태극무늬, 태극상징들의 물결 앞에선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기야말로 이 모든 현상의 원리를 안고 있는 하나의 무서운 철학책이다. 그것은 민족과 인류가 미래에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새롭고도 오래된 철학을 간단히 제기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태극기로 모자 만들어 쓰고 태극기로 망토 만들어 두르고, 태극기로 바지나 스커트를 해 입고 태극기로 스티커까지 만들어 붙이는 젊은 세대는 한마디로 '철학자들의 신세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태극기 자체가 심오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우선 국기(國旗)에 대한 강제적 존중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이 나타난 것에 박수하자! 다음에 그 철학적 깊이를 알고 나면 아마도 신세대 스스로 자연스럽게 태극기를 존중할 것이다.
세계의 모든 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태극기의 그 역리적 음양법이겠는데, 그것은 동이족의 문화적 산물인 복희역(伏羲易), 중국문화의 산물인 주역(周易), 그리고 다시 한민족의 신령한 문화적 산물인 정역(正易)을 다 관통하는 원리다.
우선 태극기의 흰색 바탕이 상징하는 의미를 보자!
그것은 단일민족을 뜻하고 순박하고 순결한 인간성과 민족성 그리고 세계 만방의 항구적 평화를 상징한다. 복판의 태극은 주역 등 역학과 관련하여 이미 누누이 설명한 바와 같은 천지음양(天地陰陽)의 대립과 통일이니, 동양과 민족철학의 핵심이요 새 시대의 세계철학의 기초원리로 될 것이다.
음양은 빛과 그늘,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역동과 안정, 변화와 질서, 카오스와 코스모스인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세 가지다. 먼저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통일하는 것이다. 상생과 상극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태극의 새 차원과 음양의 기존 차원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교차적 생명논리가 바로 세번째 원리로서 '중도(中道)'이다.
<건곤감리 그림파일>
<천지비 그림파일>
<화수미제 그림파일>
<수화기제 그림파일>
다음엔 네 귀퉁이에 있는 네 괘(卦)의 상징이다. 먼저 건(乾)과 곤(坤)이 뜻하는 바는 현실적으로는 천지비(天地否), 즉 혼돈.분열.쇠퇴이고, 바람직한 것은 거꾸로 '지천태(地天泰)', 즉 질서.통일.발전이다. 이것이 바로 주역 64괘의 첫 시작이다.
다음 리(離)와 감(坎)이 뜻하는 바는 현실적으로는 화수미제(火水未濟), 즉 미해결.혼돈.무한.개방이요, 바람직한 것은 수화기제(水火旣濟), 즉 해결.질서.완성.통일이다. 이것은 사실 주역의 첫째 괘인 건괘와 둘째 괘인 곤괘에서부터 주역 64괘의 끝인 제63괘 수화기제와 제64괘 화수미제인 것이니, 네 귀퉁이의 네 괘는 곧 주역 64괘 전체를 처음에서 끝까지 압축한 총체이다.
우선 네 괘상 자체가 오직 현실적인 민족상황만 표현하거나 아니면 바람직한 민족미래만을 상징하는 세계 국기들의 하나같은 일면성을 이미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우주생명.생성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웅변적으로 드러내어 모든 인간과 우리 민족과 세계 인류와 심지어 지구, 우주생명의 참된 삶의 이중적 실상과 그 희망의 차원까지도 보여주고 밝혀주는 상징이다. 개별적으로 본다면 '건'은 천도(天道)로서 정의(正義)를, '곤'은 지도(地道)로서 공동체의 물질적 이익〔共利〕을 뜻하여, 자유롭고 정의로우면서도 풍요하고 평등한 복지세계를 상징한다. '리'는 불이요 빛으로서 광명과 정열을, '감'은 물이요 그늘로서 지혜와 창조적 정서를 의미한다.
분열과 통일, 정의와 공리, 정열과 지혜, 즉 현실과 바람이 음양의 태극처럼 통전.공존한다면 어떤 철학 원리가 될 것인가? 대답은 이미 주어졌다. '엇'이요 '태극'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북한의 사회주의와 남한의 자유자본주의, 러시아.중국 등의 북방대륙세력과 미국.일본 등의 남방해양세력, 동양과 서양 사이의 상관성을 표현하며 그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기회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극과 극 사이의 창조적인 새 차원에로의 평화.통일.화해.일치와 2차원의 창조적 생산력을 의미한다. 태극기는 인간.민족, 그리고 현대적 상황 속의 인류, '우주'생명의 미래의 출구로서, 신생철학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신세대.신인류의 철학적 깃발이 아닐 수 없다. 역경(易經)의 상경(上經)의 제1, 제2괘가 '건곤'이요 하경(下經)의 마지막 제63, 제64괘가 '수화기제' '화수미제'이니, 태극기는 우주의 모든 철리를 다 포함한 것이다.
바로 이같은 붉은 악마, 즉 응원단의 3박, 또는 '문.사.철'의 3자결합의 문화가 선수단, 즉 태극전사들의 균형잡힌 예절과 역동적 투지의 통합, 즉 '기우뚱한 균형', 그리고 공격과 수비, 좌익과 우익, 전진과 후퇴, 집중과 분산이 자유자재한 완벽한 '유격전' 같은 '싸움의 예절'을 성취한 팀워크와 결합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유월개벽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바로 태극이자 토박이 우리말의 '엇'이다.
유월개벽의 또 하나의 이름은 '엇'이니 바로 동학의 '궁궁'이다. 그러므로 유월개벽의 깃발은 동학에서 후천개벽의 계시상징인 '태극이면서 궁궁(其形太極 又形弓弓)'인 것이다.
<사진: 붉은악마1 사진파일>
마지막으로 일곱.
'엇'이나 치우의 역사적 원형이나 태극처럼 인간과 세계와 우주 전체에로 차원을 바꾸어가며 거듭거듭 확산하는 새 문화, 새로운 태극문화의 물결이니 그 주체는 일곱이다.
첫째는 청년과 소년, 즉 청소년이다. 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고 세계의 신인류다. 유월개벽은 바로 이 주인공들 때문에도 불멸의 세계적 문화혁명.문화개벽이 될 것이다.
둘째는 청소년 못지않은 젊은 여성과 젊은 주부들이다. 유월개벽은 전 세계의 영성적 생명문화에 개벽적 페미니즘을 결합시켰다. 여성들의 음양태극, 여성들의 이중 통합적 문명, 여성들의 '카오스모스'가 민족은 물론 세계와 지구를 구할 것이다.
셋째는 인터넷과 언론과 방송이다. 즉 사이버나 디지털, 미디어가 유월개벽의 큰 공로자다. 가능한 한 그 긍정적 측면이 확대해석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인터넷과 미디어는 이제부터 유월개벽의 자각화.명제화.논리화.문화화에 앞장서야 한다.
넷째는 정부와 기업이다. 아마도 이 부분의 협조와 협력은 유월개벽에서 매우 중요한 방조자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부정적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 역할이 심각히 검토돼야 하되 결코 폄하되거나 적대시되거나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는 북한이다. 이탈리아전에서 붉은 악마의 카드섹션이 'AGAIN 1966'으로 형상화되었을 때 우리 민족의 심장은 눈물로 가득 찼다. 북한민족의 대이탈리아전의 승리를 남한민족이 다시 확보한 것이니, 이를 거스른 서해교전(西海交戰)은 참으로 큰 오류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민족과 유월개벽의 문화를 공유하고 공동으로 철학을 탐색하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여섯째는 아시아다. 붉은 악마는 카드섹션으로 '아시아의 자존심'을 그렸다. 중국의 속내 깊은 시샘과 일본의 겉치레뿐인 칭송은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야 한다. 유월개벽은 터키를 들어올리는 아시아적 함성으로서 중국과 일본의 오류와 위선까지 다 용서하고 포용하여 인류개벽의 동행자로 자리매김해주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포용력이었다.
일곱째, 한국이 포르투갈에 이기자 16강에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된 미국언론이 '생큐 코리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뽑았다.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에 대해서 '싸우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우호적'이었다. 놀라운 신사도(紳士道)다. 그러므로써 세계인류가 모두 주최자요 주체가 되었으니 무엇보다 앞선 공로요 성과다.
유월개벽은 문자 그대로 '월드컵'이었고, 그 주최국인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 부채를 탕감하는 세계사적 기회였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아홉'은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것은 이제부터의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붉은 악마는 또다시 올 것이다. 형태와 주제를 달리하면서 또 오고 또 올 것이다. 그것이 곧 '아홉〔九〕'의 비밀이다. '아홉'은 모든 것의 관건(關鍵)으로서, 우주의 '아홉 궁궐〔九宮〕'이요 세계의 '아홉 범주〔九疇〕'다.
유월개벽에서의 멋진 태극전사의 선수들과 붉은 악마의 응원단을 주인공으로 하는, 민족적이면서도 전 인류적이고 전 세계적인 아시아 고대의 문예부흥, 세계문화혁명이 확산적으로 거듭거듭 발화되어 참으로 유월개벽을 전 지구적 후천개벽으로까지 완성될 날을 기다린다.
민족전통을 지키면서도 오늘의 세계 인류와 신세대에 알맞게 창조적 문화로 변형시킨 유월개벽의 문화적 주인공들에게 다함 없는 사랑과 모심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단기 4335년서기 2002년 양력 7월 23일
일산에서 지하 모심.
그렇다면 12월 한 달 내내 벌어진 촛불시위는 무엇일까? 붉은 악마와 촛불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 글의 마지막쯤에 '촛불'이라는 60매 가량의 글을 덧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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