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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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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9>

지용

나의 시 〈백학봉(白鶴峰)〉에 지용상(芝溶償)이 결정되었다.

지용이 누구던가?
근대 백 년에 가장 뛰어난 시인이다.
나에게 열여섯부터 이른바 문학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이가 중동학교의 국어교사였던 이인순 선생님이신데, 그이의 이대 국문과 스승이 바로 지용이시었다.

나는 이선생님으로부터 해방 직후의 누우런 말똥종이로 인쇄된 지용의 전 작품들을 물려받아 읽고 또 읽었다. 그 중에도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고향〉이었고 〈고향〉 중에도 가장 아픈 부분이 "마음은 언제나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그리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였다.

열네 살에 고향에서 뿌리뽑혀 먼 객지로 흘러갔으니, 객지를 떠돌며 끝없이 하염없이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또 먹었으니…….

그런 나에게 지용문학상이 주어지다니!

그러나 문득 감동에서 깨어나 냉정을 되찾은 나는 서서히 부끄러움에 빠져들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내 시가 지용상 자격이 있는 것일까?

이를 악물고 흥분을 떨어낸 뒤 두 편의 시를 비교해보았다. 한 편은 지용의 《백록담》 가운데서도 백미(白眉)인 〈구성동(九城洞)〉, 다른 한 편은 이번에 지용상을 수상한 나의 〈백학봉〉이다.
먼저 〈구성동〉,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 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다음은 〈백학봉〉이다.

멀리서 보는
백학봉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知詵 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 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 자락이 펄럭,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결과는 분명하다. 족탈불급(足脫不及)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지용을 계승하고 있는 점이 있으니 아마도 '흰 그늘'이겠다. 《백록담》 전체가 그렇거니와 특히 지용은 〈장수산(長壽山) 1〉에서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장수산 2〉에서는

흰 시울 아래 흰 시울이
눌리워 숨쉬는다.

그리고 〈백록담 1〉에서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백록담 3〉에서는

白樺 옆에서 白樺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이렇다.
이러매 지용이 나의 선인(先人)이 아니랴?
나에게 웅숭깊은 창조의 고인(古人)이 아니랴?
나는 수상소감에서 다음과 같은 뜻을 밝혔다.

이번에 정지용문학상 수상소식을 전해 들으며 '나 같은 대중시인에게 지용 선생 같은 아주 까마득한 높은 봉우리에 계신 분의 감성, 혹은 영성과 이성이 연속될 수 있겠는가' 해서 놀랐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의 시학적 명제인 '흰 그늘'에서 지용 선생과의 연속성이 발견되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흰빛과 그늘은 상호 모순됩니다. 그늘이란 삶의 신산고초를 말하고 흰빛은 신성한 초월성을 뜻합니다. 이 두 개의 모순된 명제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지용 선생의 〈백록담〉에서 '흰 그늘'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늘이란 판소리나 시나위, 춤에서까지도 통용되는 미학적 원리입니다. 판소리에서는 아무리 소리를 잘해도 귀명창들이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 그러면 그 사람은 끝납니다. 그늘이란 두 가지, 즉 삶의 윤리적 측면에선 신산고초가 무한히 심한데도 그것을 넘어서려고 애쓴 성실한 인생의 흔적이고 미학적으로는 목에서 몇 사발의 피가 터져나오는 지독한 독공수련의 결과입니다.

윤리적 삶과 미학적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우리의 선조들은 가르쳤습니다. 컴컴한 고통의 흔적이 없는 초월성은 공허하며, 우리 민족의 빛이기도 한 신성한 흰빛과 결합하지 않는 어두운 고통만의 예술은 맹목입니다.

10여 년 전 저는 컴컴한 어둠과 눈부신 흰빛의 분열을 포함한 환상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질환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3년 전인가 율려학회 세미나 직전의 어느 날 대낮에 한 영적인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자계시였는데, 한글로는 '흰 그늘', 한자로는 '白闇', 영어로는 'white shadow'라는 세 가지 문자가 차례로 보였습니다.

그 뒤로 이것이 율려의 핵심문제이고 우리 풍류의 가장 중요한 미학적 특징이며 정신적으로 나의 분열이 통합되기 시작하는 조짐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즉 고통 속에서 성실하게 삶을 밀고 나아갈 때 넋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무늬'가 살아나는 것 아닌가! 정신분열의 통합이 가능한 것 아닌가! 이것은 내게 미학적 통합이자 윤리적 통합이며 동시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정신병의 극복이었습니다.

나에게 지용 선생은 우뚝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시 세계는 세 가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톨리시즘, 하나는 모더니즘, 하나는 향토색 짙은 사실적인 민족주의입니다. 이 세 가지가 분열되고 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 가지가 서로 부딪쳐 혼란과 갈등, 대립하지 않고 편안하게 공존하고 동거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것이 온전한 인간, 특히 훌륭한 시인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 측면이기도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성과 이성과 영성의 동거공존. 가톨리시즘은 영성을, 모더니즘은 이성을, 향토색 짙은 사실적 민족주의는 감성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셋은 다름 아닌 풍류선도의 핵심, 정기신(精氣神)과 천지인(天地人)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분열이 작위적 노력 없이도 한 차원으로 승화되고 통합될 수 있는 것이냐? 과연 이런 점에서 근대 이래의 어떤 시인도 지용 선생을 뒤쫓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백록담〉을 쓸 수 있는 시인은 아직 없습니다. 그 셋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동거하며 '흰 그늘'의 새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승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한낱 대중시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볼 때 이 나라의 시인이란 좀 특이한 존재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많고 가난하면서도 시를 쓰며 시집이 몇천 부씩 팔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의 문화창조를 이끌어나갈 사명과 직결될 것입니다. 그 점에 대중시인인 저의 시학적 명제인 '흰 그늘'의 미학적 중요성도 있다고 믿습니다.

부디 이 '흰 그늘'이 저만 아니라 앞으로 나올 숱한 젊은 시인과 많은 기성 시인들께도 하나의 준거기준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용 시인의 흰 그늘과 흰빛과 컴컴한 고통의 그늘, 이 미묘한 삼자 결합의 세계를 연구하셨으면 합니다.

나는 수상식 얼마 전 수상을 기념하는 대담 자리에서 나의 민족문학의 사형(師兄)인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를 만났다. 그의 말 가운데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 깊이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것은 두 마디였다.

"못난 시 좀 부지런히 쓰고 좀더 어수룩해지도록!"

"삶에서 어수룩해지고 시에서 못나도록!"

이 가르침을 그대로 관철하려고 명심한 내 마음에게 주는 선물이었을까? 수년 전에 써두고 완전히 잊어버렸던 미발표 시고 백여 편이 어느 날 우연히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곰곰이 살펴보니 그리 잘난 시도 아니지만 그리 막되먹은 낙서시도 아니어서, 이른바 '어수룩한 삶, 못난 시' 축에 들듯 싶어 감히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내었다. 8년 만의 시집 《화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있으니 이 여러 편의 시들이 하나같이 일관하는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흰 그늘'이라는 점이다. 조금은 그늘 쪽에 또 어쩌면 흰빛 쪽에 이리저리 너무 기울고 있긴 하나, 그리고 아직은 흰 그늘의 시학이 자각되지 못하고 있긴 하나.

그렇지만 여전히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시편들이 지용 시의 미학적 수준에는 족탈불급이라는 점이다. 해설픈 산등성이를 천천히 넘어가는 사슴의 표현을 감히 누가 어찌 흉내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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