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부터 아내와 나는 한달에 한번씩 전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순례하고 하루이틀 정도 거기 묵어서 오기로 했다. 명산과 대찰의 크고 맑고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함이다.
그중에도 큰 사찰이면 대웅전 뒤꼍 어디쯤에 반드시 모셔놓은 자그마한 삼신각(三神閣)이나 칠성각(七星閣), 북극전(北極殿) 등에서 겨우겨우 숨이나 쉬고 있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과 일곱 별의 풍류선도에 그 큰 다물(多勿, 고토회복, 마고복본)을 기원하기도 한다. 불교의 보편진리 속에서 새로이 꽃피는 풍류의 예감은 얼마나 아리따운가!
이것은 나의 시심(詩心)을 자극하고 나의 시업(詩業)을 다시 열었다.
하룻밤의 그 텅빈 허공!
아름다운 단청 속의 맞배팔작집들! 그 공포들! 알매와 부연의 섬세함들!
그 모든 장엄 속에서 솟아나는 그 텅 빈 허공 속에 핀 한송이 흰 수선화!
몸과 마음이 다 개운해져서 돌아온 날은 숱한 메모를 뒤적이며 시를 쓰기 바쁘고 쓰면 또 투고하기 바쁜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아,
그동안 나도 모르게 역공부를 통한 한국 유학과 불교 속의 선도를 두루 공부하고 있었고 또 앞으로도 공부할 것이며 포함삼교(包含三敎)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했으니 그 이상의 행복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다녀온 곳만도 가야산 해인사(伽倻山 海印寺), 영축산 통도사(靈축山 通度寺),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 백양사(白羊寺), 구룡사(九龍寺), 금산사(金山寺), 선암사(仙巖寺)와 화엄사(華嚴寺), 그리고 부안(扶安) 내소사(來蘇寺)와 동래 범어사(梵魚寺), 쌍계사(雙磎寺), 실상사(實相寺) 등이었다.
작년초 영축산 통도사의 후미진 비로암(毘盧庵) 뒤뜰에 있는 자그마한 북극전(北極殿) 앞에 섰을 때다.
스님들은 간곳없고 노을 무렵에 풍경만이 뎅그렁 뎅뎅 울리고 있었다. 문득 6, 7년간 적막했던 시업이 다시 활기를 찾는 듯 시상들이 돌아오고 또 돌아왔으니 그것이 나의 사찰순례 연작시의 첫문이 열리던 때다. 〈북극전 1, 2, 3〉편을 여기에 이어 쓴다.
***北極殿 1**
이제
내 곁엔
아무도 없고
하늘에도 한 자취 없고
대낮에 칠성별 깔려 있을
북쪽끝의 어딘가
누군가
그 뒤에
숨어 있을까
버림받은 한 한국인
내 곁에
단 하나 풍경소리
저 외로운 임재 곁에
***北極殿 2 **
도망쳐 왔구나
알겠구나
슬픈 사랑 때문에
멀리멀리 도망쳐왔구나
대웅전 너머 언덕 또 언덕
저 쓸쓸한 독수리 두 발톱 아래 깊이
숨어 있구나
드러날 그날까지
홀로 수천년을
호랑이 등 위에서
방울 칼 거울
거울 칼 방울
칼 방울 거울
그 사이 성좌는 팔방에 율려를 뿌리고
대륙은 끝없이 말씀을 흩었네라
영축산 비로암 뒤
숨죽인 북극전
내
이제야
문득 알겠구나
어찌해
당신이
서자인지를.
***北極殿 3**
문득
일어서리라
겨울 산다화 뚝뚝 지는 날
三笑窟 스님들
鏡虛 鏡峰 明正 스님
무릎밑 들고나는
잔바람 결에도 드디어는 일어서리라
아아
극락암에서 서리라
남조선에서 서리라
북극전 속 감추인
소소리 바람소리
풍경 흔드는 저 흰 그늘
내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三南의 푸른 술
술잔의 神託이여
일어서리라
神佛山 아래
언양 밤 골목에서
언듯 스쳐간
處容의 뒷모습 따라
아득한 옛날의
神市여
和白이여
은혜로운 새 쇳소리
風流여 風流여
겨울 산다화
뚝뚝 지는 날
남조선 거리거리에 서리라
문득 일어서리라
일어서
제 스스로
뚜벅뚜벅
北極 가리라.
* 통도사 비로암 뒤편 호젓한 북극전에는 환웅천황(桓雄天皇), 삼신(三神)과 북두칠성(北斗七星)이 남몰래 모셔져 있다.
"남조선 거리거리에 일어서, 문득 일어서 제 스스로 뚜벅뚜벅 북극 가리라" 했다.
누가 아니라 하겠는가?
저 수수백만의 붉은 치우의 물결들, 저 '대~한민국'의 함성들이 누구의 지시도 강제도 없이 문득 일어서, 남조선 거리거리에 일어서 제 스스로 뚜벅뚜벅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과 치우(蚩尤)와 그리고 칠성(七星)의 저 북극(北極)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절 순례는 계속되고 있다.
불교의 보편진리와 개벽사상에 터한 한국의 자생풍수지리 속에서 꽃봉오리가 새로이 터져오르는 새 세대의 풍류선도(風流仙道)의 연작시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 길을 나의 길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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