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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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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73>

검은 산, 하얀 방

그 뒤 며칠 있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가운뎃방 흐릿한 전등 밑에서 내 마음 속에서부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무슨 시행들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에게 받아쓰라고 부탁하고 곧 구술하기 시작했다. 제목까지도 흘러나왔으니 '검은산 하얀방'이었고 즉각 나는 검은산이 두타산 무릉계를, 하얀방이 백방포와 백방산을 상징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 이 '검은산 하얀방'은 내 환상병의 시작이니 '검은 그늘'과 '흰 빛'의 깊은 분열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러매 정신신경과의 거인인 이부영(李符永) 박사가 나의 경우를 단순한 정신병이 아니라 '종교적 환상'이라고 진단한 까닭이다. 칼 융식으로 말한다면 결국 검은산과 하얀방의 통합, 눈부신 흰빛과 컴컴한 그늘의 창조적 통일이야말로 내 정신의, 내 넋의 제일과제였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 가운데 그 어떤 남성도 이 시행들을 가타부타 없이 일체 침묵으로 평가하지 않는데 단 세 사람의 여성, 장모님인 박경리 선생과 시인 허수경과 그리고 내 아내만이 그것을 내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내게 지금으로서도 분명한 것은 '검은산 하얀방'이 지금도 내 넋의 떨림과 흐름중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이제는 모순되면서도 일치조화하는 '흰그늘의 길'에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행들은 그 구술내용에 단 한 자도 수정가필하지 않고 그대로 분도출판사에서 시집이 되어 나왔다는 점을 밝혀두며 시행 전체를 회고록의 한 맥락으로서 그대로 드러내 보고자 한다. 먼저 서시 〈촛불〉이다.

***촛불**

나뭇잎 휩쓰는
바람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버리고
어둠속으로 그애도 가버리고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소리냐 비냐.

***검은산―무릉계에서**

***화살내**

화살은 왜 나에게 떠오나
화살은 왜 나를 향해서 오나
화살은 왜
화살은 왜 내 가슴에 아프게 박히나
화살은 왜 이 개울을 따라서 흘러오나
화살은 왜 물을 따라 흐르나
화살은 물을 따라 나에게 오고
나는 물을 따라 화살을 거슬러가고
너는 누구냐
물.

***피쏘**

번득이는 것이
왜 빛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눈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햇빛뿐일까요
하늘에 가득찬 총알 총알 총알
그 구리의 빛은

찢어진 왼쪽다리 끌며 당신 찾는데
내 외침만 찾을까요
내 눈만 찾을까요
내 손만 찾을까요
찢어진 다리 흐르는 피가 흘러가는 곳
거기 당신이 누워 숨지고 있겠지요
아아 피쏘 속에서
당신 누워 숨지고 있겠지요
가물거리는
마지막 생각
가물거리는 마지막 눈
그 속에 타고 있는
삼화사 촛불
마지막 들리는
삼화사 독경소리
마지막 보이는
삼화사 쇠부처님
아아
물방울.

***쇠부처 굴**

옆으로 가자
곁으로 가자
앞으로 가자
뒤로 가자

같은 것 같은 이야기
우린 갇혔다
고목이 웃는다
벼락맞은 바위들이 웃는다

죽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죽은 것은 물만이 아니다
우릴 죽이는 하늘까지도 죽어가는 것이다
절벽에 대고 이마를 찧는다
내 이마를 찧으며
절벽이 넘어져 오는 날
물방울 하나
내 목구멍 속에 타는
물방울 하나.

***호랑바우**

돌이 소리질렀다는데
나는 듣지 못했는데
돌 속에서 아이들이 노래불렀다는데
나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돌 뒤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는데
나는 보지 못했는데
엄마를 부르며
아빠를 부르며
아이들이 노래불렀다는데
나는 듣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돌 위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통곡해 울었다는데
나는 보지 못했는데
하늘은 어찌 저리도 푸른 것이냐
삼화사 종소리는
내 신발 끝에 눈물과 함께 떨어지는데.

***아랫쏘**

가거리 얘야
이 어미 간다
가거라 이 어미 제삿날을
잊지 말아라 얘야
가거라 가거라
새처럼 높이 뜨고
여우처럼 빠르게
가거라 얘야
이 피바다에서.

***비리내골**

비라도 왔으면 좋지
이 피 씻어주게
눈이라도 왔으면 좋지
이 기억 얼려주게
벼락이 쳐라
천둥은 쳐라
해일이 넘쳐라
하늘은 소리질러라
땅도 소리질러라
내 눈물을 소리질러라
내 울음으로 울어라

타죽은 고목에 걸린
살점 앞에서.

***문깐재**

잔잔한 풀 위에 바람 흔들림이
이마 위에 그늘지는 것을
알겠는가
묻는 나는 모른다
잔잔한 풀 위에 바람 흔들림이
너의 머릿속에서 파고 있는
홈의 뜻을 아는가
피는 피를 부르고
바람은 낮게 속삭이며
물과 함께 먼길을 가더라

내 눈에 타는, 밤새 타는
이상한 핏발
이제 나는 안다
돌의 역사를
돌의 신음의 역사를.***고사목**

고목에 기대서서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서서만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설 때만
고목을 생각하자
불타죽은 나무
나무의 혼을.

***두타산**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이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
나는 이것을 두타산에서 배웠다

개새끼들!

***용추다리**

내 오른팔을 호랑가시나무라고 불러라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
있다면
내게 힘이 있다면
한 팔로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한 팔로 너희들의 삶을 껴안아주고 싶구나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서
나의 힘없음을 비웃는구나.

***윗용추**

왠지 그럴 것 같애
왠지 필요할 것 같애
배낭에 금강경을 넣고 갔었다
왠지 머리 뒤끝 잡아당기는 것 같애
왠지 머리끝 섬뜩섬뜩 서는 것 같애
지은 죄도 많고
지을 죄도 많아
금강경을 읽었는데
금강경을 읽었는데
문득 바람결에
용성스님의 금강경이
날아가 붙은 바위를 보니
바위에 새긴 글자
범소유상 개시허망
돌 하나 굴러 소리없이 물에 잠긴다.

***너럭바위 1**

한 노인을 만났는데
한 미친 노인을 만났는데
양파를 질겅질겅 씹으며
알젖을 똘똘 뭉쳐
하늘에 던졌다
받아먹는 노인을 만났는데
고양이 같은 눈빛
이글이글 타는 눈빛
수세미 같은 머리
한 노인을 만났는데
가라사대
사람은 손을 손으로 저울질할 일이다라고 하더라
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
오십 개의 우물터가 있었다고 하더라
오천 명이 한날 한시에 총맞아 죽었다고 하더라
사멧골 제사는 모두 한날 한시라고 하더라
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
돌아오는 길에
피쏘 너럭바위 위에
아로새겨진
토포사! 토포사! 토포사!

***너럭바위 2**

술잔 가녘에
술병 주둥이를 때리며
혀를 차는 버릇은
나에게 예전에는 없었다
술병 주둥이로
술잔 가녘을 때리는 버릇도
나에게 예전엔 없었다
오늘 바람은 불고
하늘은 차다
웬일인가.

시행은 멈춤없이 검은산에서 하얀방으로 넘어갔다.

***하얀방―백방포에서**

***백방1**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여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어느 나무에
어느 나무 그늘에
그 사연 새겨졌는가
내 이제 짧은 머리
짧은 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서서
홀로
잿빛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긴 왜 이제 항구가 아니냐.

***백방 2**

하얀 방에 누웠네
내 누구를 원망하랴
하얀 방에 누웠네
내 이제 와서 누구를 기다리랴
저 형광등 소리
저 형광등 타는 소리
빛깔이 아닌
빛깔이 아닌
흰빛깔이 아닌
가래 타는 소리
곁에 하나만 있다면
곁에 하나의 휴지통만 있다면
내 누구를 원망하랴
더 무엇을 그리워하랴
어차피 죽어가는 것을
그리고 가래를 뱉고난 뒤
어차피 난 일어서 이 자리를 떠날 것을.

***백방 3**

흰 물결에 갇힌 때를 기억하자
흰 눈에 갇힌 때를 기억하자
흰 방에 갇힌 때를 기억하자
그러나 기억할 수 있겠는가
흰 살에 갇힌 때를, 그 여자의 흰 살의
눈부심에 갇혔던 때를
만지지 마라, 머리 위에 난 상처는 만지지 마라
만지지 마라
머리는 하늘을 이는 것
너의 왼손이 너의 오른손이
하늘을 만져 죄짓게 하지 마라
만질수록 깊어지는 하늘의 병.

***백방 4**

사랑합니다 여보
부디 이 흰 빛을 기억해주세요
기억해주세요
백일이 넘도록 흰 방
흰 생각 흰 옷 흰 모든 날의 저 하얀 바람들을
매일 나가미 위에 서서 웁니다
나가미가 내 위에 서서 웁니다
당신 떠나간 백방포
그 새카만 뻘밭을 보며 웁니다
나를 웁니다
흰 옷 흰 옷에 싸여 살 수밖에 없는
내 운명을 웁니다
그래 이제 돌아가렵니다
아니오
우슬재쪽으로가 아닙니다
당신 가신 두머리 개웅
그 새카만 뻘밭으로.

***백방 5**

한 날도 아니요
열 날도 아닌
십년 이십년을 어찌 견딜 겁니까
나 이제 떠나가는데
두머리 가심끝
동백 피우리
새빨간 동백
동백 한잎
넘쳐끓는 바닷물에 펴흐른들 무엇하리
돌아가리 백방포구
당신 있는 곳
못 돌아가리 백방포구
그 정겨운 동백숲 마을.

***백방 6**

빛은 어디서 오나
참빛은 어디서 오나
내가 이렇게 몸부림치며
누워 있는 이 흰 방 흰 방으로부터
빛은.

***백방 7**

아십니까
뒷산 어덩밑을 함께 헤맬 때
내 이 사이에 들어온 바람
그 바람을 타고
내 가슴까지 들어오신
당신의 배
그 배의 이름을 오늘 아침에 정한 것을 아십니까
뒷산 어덩밑 작별할 때의 어둠에도
지치지 않는 힘으로
바다로 바다로
향했던 당신에 대한
그리움
아십니까
당신의 아이
누구도
이제
내 얼굴을 돌아보지 않는데요
친척 중에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요
아십니까
그애 이름을 아십니까
내 뱃속에 커가는

그 달은
바다라는 것을
바다의 꿈이라는 것을
꿈꾸는 바다라는 것을
그리고
꿈속의 바다라는 것을

흔들지 말라
낮은 바람철에는
무화과여
비파여
석류여
작은 나뭇가지들이여
내 속에 너희는 커가고 있다
흔들지 말라
낮은 바람철에는.

***백방 8**

가지 말라
바다가 너를 삼키리라
가지 말라
바다가 너를 밟으리라.
삼켜도 밟혀도
떠나가야 하는 바다
떠나가야 하는 바다
바다
네 이름
바다는 그대에게 내 그대에게
백방 뒤꼍 후미진 뻘밭 마지막 떠나던
목선전 잡고 넘어지던 그대
그대에게 마지막 줄 것
이름뿐
마지막 줄
비단주머니 속에 든 것은
바다뿐.

***백방 9**

바다로부터
내가 너를 보았던 날
그날은 초록빛 하늘이었지
내가 너를 껴안았던 날
그날 내가 질렀던 바다는
쪽빛 바다였지
햇빛은 하늘에서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와
너의 얼굴은 수만 가지 수십만 가지
수천만 가지의 빛깔로 번득이고
너의 이마는 푸른 솔빛으로 타고 있었지
나의 운명도
풀과 같은 것
짝지 가녘 시달리는
바람끝 시달리는 갯여뀌
파멸하였네라
그리고 초록빛 속에
미소지었네라.

***백방 10**

뒷숲에선 바람이 불어요
바람 속에선 뒷숲이 내게 와요
가까이 늘 밤마다
뒷숲 속에
홈 패인 자국
자국 있는 샘물
샘 곁에 남겨진 끊어진 두레박
아 오세요
두레박 속에서 오세요
그날의 창도 버리고
그날의 핏발선 눈도 버리고
오세요
뒤꼍 바람을 타고
웃음으로라도 오세요
머리끝 흩날리는
바람으로라도.

***백방 11**

하나
솔 하나 있었지
기억하는가
나가미 위 큰 까끔 파고드는
바위샌님
하나
그때
자네 얼굴에 감돌던
낮은 머리 휘날림.

***백방 12**

멀리서 보는 백방산 위
푸른 하늘은 슬프다
더 멀리서
더 멀리서 생각하는 백방산 위
푸른 하늘은 더 슬프다

멀리 멀리서
그 산을 보고
숱한 해일을 넘어왔던
아득한 산동반도의 짱괴들의 기억 때문일까
지금 바람은 서쪽에서부터 불어
나가미 열두시 겨울 산란 밑을 스치고
나는 바위에 고개를 기대
아무런 작정도
아무런 회환도 없이
긴 슬픔에 빠진다.

바로 해설 비슷한, 서문 비슷한 말들이 이어 따라나왔다. 역시 수정없이 받아쓴 기록이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내 마음의 뒤를 따르는 고통에 찬 무거운 쇠사슬 끄는 소리가 있다. 하나는 머나먼 북쪽끝 험준한 산골짜기에서, 다른 하나는 머나먼 남쪽끝 바닷가 옛 포구에서.

옛날은 그저 옛날인 것인가? 오늘은 그저 오늘인 것인가? 훗날은 그저 훗날인 것인가? 사람의 삶은 이런 것, 사람의 지금 여기 삶 속에는 북쪽도 남쪽도 옛날도 훗날도 함께 들어와 외치고 울고 가슴을 치며 눈물삼키고 고개 숙여 걷는 것을.

먼 북쪽 삼척 두타산 무릉계는 임진란 때는 수천 수만의 화살이 강물에 떠흘러 '화살내'를 이루고 숱한 사람의 피는 못에 고여 '피쏘'라는 이름을 만든 곳이다. 그 뒤에도 지난 전쟁 때는 한날 한시에 수천 명이 참혹하게 죽어간 땅이다. 그래서 이곳은 제삿날이 모두 다 한날 한시다. 특히 어린이와 여인들의 죽음은 참혹했었다 한다.

5 년 전 내가 무릉계에 갔을 때 삼화사 너럭바위 입구에서부터 내 귀를 때리며 심장을 조이며 내 뇌수 전체를 뒤흔드는 총소리, 포탄소리, 비행기 폭음 소리, 아우성 아우성 소리, 그중에도 견딜 수 없었던 그 어버이를 부르는 아이들 울음소리, 그리고 이상하게 떨리던 여인들의 귀곡성, 귀곡성, 귀곡성의 끝없는 환청. 머리 뒤를 잡아끄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다리를 잡아당기는 물과 바위와 잡초들의 기괴한 엉킴, 숯처럼 마치 썩어가는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절벽에서 빛나는 음산한 햇빛, 검은 갈가마귀들의 불길한 울부짖음,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는 불에 타죽은 시커먼 고목들, 나는 질려버렸다. 마지막으로 금강경을 읽어, 내 따위가 뭐라고 금강경 한줄이라도 읽어 깊은 한을 품고 구만 리 장천을 떠도는 중음신(中陰身)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보자고 읽던 바로 그 구절이 내가 읽으며 등을 기댔던 바로 그 바위 위에 깊이깊이 새겨져 붉은 노을에 타는 불꽃처럼, 화광처럼 번득이고 있음에 그만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골짜기를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들의 그 참혹한 고통과 죽음은 역사에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내게 명백히 잘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분명한 것은 원한(怨恨)이다. 그 뒤 나에게는 단 한줄이나마 그들을 위한 진혼곡을 써야겠다는 강박과념이 무거운 쇠사슬 끄는 소리가 되어 따라다니고 있다.

먼 남쪽 땅끝 백방포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 말까지 제주도로, 흑산도로, 추자도와 다도해의 저 숱한 섬들로 귀양가는 사람, 지목을 피해 이름없는 섬으로 몸을 숨기는 사람, 중국으로 사신가는 사람, 장사가는 사람들이 아득한 뱃길을 떠나던 포구, 그리고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몇 년이고 몇십년이고 그 아낙들이 백방포에 백 개의 방을 짓고 매일 포구 뒷산 백방산 깎아지른 나가미(落岩) 위에 올라 흰옷에 눈물 지으며 끊임없이 합장기원했던 곳이다. 그리고 때로는 설움에 겨워 바다로 몸을 던지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일백 개의 방이라고 보고싶지 않다. 빈 방의 외로움, 한 맺힌 흰 방, 그 스산한 흰 방의 낯설음, 그 눈부신 낯설음의 한없는 지속. 나는 백방을 갈 적마다 그 무서운 바다, 그 아득한 뱃길, 그 기나긴 세월,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 쓰라린 이별도, 정든 땅을 버리는 아픔도 다 뒤로 한 채 바다가 끄는 이상한 매혹, 바다가 손짓하는 신기루처럼 찬란한 새로운 낙토에의 열광의 의미가 지금에까지도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똑같이 바로 그 스산한 흰 방의 외로움을 가슴에 사무치게 느껴왔다. 정한(情恨)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백 개의 방이라는 백방(百房)보다 흰 방이라는 뜻의 백방(白房)이라 부르고 싶다.

북쪽과 남쪽의 이 두 개의 무거운 쇠사슬 끄는 소리는 지금 여기 내 살아 있는 의식 속에서 계속 들려온다. 이 사무친 원한과 뼈저린 정한이 무거운 쇠사슬 끄는 소리로 내 마음을 따르고 있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느낀다. 단 한줄이나마 그들의 진혼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하나의 강박관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줄도 그것을 써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밤 우연히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 접혀들며 속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소리, 잇달아 떠오르는 느낌, 생각, 울부짖음, 마치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내 속에서 불러주는 듯한 소리가 있어 그대로, 취한 듯 정신잃은 듯 떠오르는 그대로 구술하기 시작했고 아내가 그걸 받아썼다. 그리고 일체 수정, 가필, 추고하지 않았다. 형식문제, 곧 가락이나 장단, 말의 생동성 따위 나의 평소의 관심사는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그 소리 속에서 움직이는 종잡을 수 없는 어둡고 검고 비통한 흔들림과 눈부신 흰빛의 섬세한 떨림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이것이 〈검은 산〉과 〈하얀 방〉이다.

……

그러나 이 소리들, 이 모든 말, 말, 말들은 과연 초혼인가, 진혼인가? 불림인가, 살풀이인가?

과연 이것들이 이 땅에 가득찬 저주와 살(煞)을 풀어줄 힘이 있는 것인가?

그 소리, 속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그 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그 무엇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인가? 이런 일들은 왜, 어째서, 무슨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

1986 년 4월 19일

해남에서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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