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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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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2>

외국의 벗들

민족국가와 폐쇄적 민족주의의 시대가 이미 가고 있다. '글로벌리제이션'이 일반화하는 시대다. 그렇다고 민족이나 지역이나 개인의 중요성이 소멸하는건 또 아니다. 민족담론이나 개인주의, 지역의 특수성 속에서 세계화와 지구화, 전인류화라는 거대 체계가 개인 나름, 지역 나름, 민족 나름으로 제각각 독특하게 진행되는 복잡성의 시대다. '글로칼리제이션(Glocalization)'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기 긍정이 정당하고 강하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공명정대하고 열렬한 세계화, 지구화, 인류화를 지향하는 사람이 바로 신인간이요 신인류다.

나는 그런 점에서 볼 때 행운아다.

나는 외국의 벗들이 나의 민족의식과 인류의식 사이의 오류없는 통일성을 발견하고 나의 정당성과 그로 인한 나의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사심없이 줄기차게 나를 지원하고 구명운명을 펼친 결과 끝끝내 죽임당하지 않고 이리 살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외국의 벗들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오래전에 이땅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김대중 납치미수사건이나 장준하 테러 등은 남의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자신의 국제주의적 책무 또한 이제는 늘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사항들은 이미 여러 벗들 사이에 공유되어 있어 말하기가 아주 편하다.
특히 일본 내의 김지하구명위원회의 조직자인 미야다 마리에(宮田毬榮)씨의 정식 초청은 아직도 받지 못했다. 한 번은 가와사키 시의 초청으로 또 한번은 오사카 시민의회 초청으로, 그리고는 이즈(伊豆)의 시민모임으로부터 있었다. 그런데 아직 우리쪽도 일본쪽도 무엇인가 오붓하고 살풋한 벗들끼리의 툭 터놓고 함께 지낼 삼사일 정도의 일정을 잡기가 힘든 모양이다.

나는 우선 미야다 마리에 여사, 츠루미 스케 교수, 와다 하루키 교수, 하리우 이치로 선생, 오다 마코토 선생 등을 초청하고 싶다. 이 회고록이 완성되는 날 학고재(學古齋)를 통해서 초청 환대하고 싶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난날 어지간히도 그분들의 속을 태웠다. 그리고 소위 민주화가 되었다는 오늘 그것을 잊어버린 듯한 나의 태도는 그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 것같다.

<사진>

나는 출옥후에 독일의 괴테인스티튜트로부터 아주 좋은 조건의 초청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미국의 하와이대학과 코넬대학으로부터 역시 미국 전지역의 유명대학 순회강연을 부탁받았으나 고사했고 뉴욕의 사회과학대학원대학의 박사학위 수여식에도 결국은 못갔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여러번에 걸친 초청에도 불응했으니 까닭은 아직 갈 때가 못됐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랬다. 국내의 상황이 밖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고 내 자신이 무엇인가 새로이 시작하고 있어서 그 일에 좀더 뜸을 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2, 3년 안에 일본과 미국과 홍콩을 잠시 잠시 다녀왔으니 나의 구명(救命)에 관련된 분들에 대한 나의 예절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미야다 마리에 씨는 그 사이 나로 인해 가정파탄까지 겪어야 했고, 한국에서 방한금지인물로 등록되기조차 했다. 그러나 초청은 미흡했고, 예의를 다하지 못했으며 역시 이 회고록과 함께 내년 초쯤엔 좀더 성의있는 대접을 꼭 하리라 마음먹는다.

각 개인과 지역과 민족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먼저 전제한다면 세계는 하나요 인류는 서로 바다로 연결된 섬들이다. 아픔과 사랑은 바로 이 채널을 통해 상호 전달되는 것이니 이 영성적 교통과 사이버적인 '디지탈' 통신이야말로 생명이나 생태학, 즉 한마디로 '에코'와 함께 21세기 인류와 지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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