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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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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7>

병사에서 2

박정희를 시해(弑害)한 김재규의 오른팔이라고 일컬어지던 부하 박선호 씨를 만난 일이 기억난다. 몇 마디 인사 중 딱 한 마디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부장님이 그 며칠 전 미국 CIA를 만났습니다. 반드시 어떤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도 없이 김재규 등의 사형집행이라는 조치만 있었을 뿐이다.

아아 무정(無情)!

또 무정하기로 하면 우리 백기완 선생에 대한 기관의 무자비한 대우가 유명하다. 백선생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대 협객(狹客)이다. 중국과 일본에는 협객과 낭인(浪人)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천기(天機)를 잡을 수 없다는 뜻의 말들이 많이 있다.

어쩌자고 쇠파이프로 선생의 뇌수에 타격을 가하는가 말이다. 그 백선생 소식을 듣고, 밤만 되면 선생이 크게 울부짖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서 선생을 병사로 옮겨 드렸다. 병사의 1층 끝방이었다.

나는 운동 때마다 나가 선생과 통방했는데 선생 왈,

“문익환 목사가 다녀갔어. 곧 전격적인 사태 변화가 있을 거래. 지금 내각 명단까지 다 짜고 있다는데…. 우리는 곧 다 석방될 거라는군.”

“내 느낌에는 군부 반동(反動)이 올 것 같습니다.”

“그럴까. 그렇게 쉽게 올까.”

“옵니다.”

선생은 창백한 얼굴에 봉두난발로 가끔은 나도 안뵈는 듯 허공에 대고 민족통일을 울부짖고는 했다. 선생의 방 창살 밖은 마당이고 테니스 코트요, 그 마당 너머 언덕 위에는 철조망 안에 탱크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창살을 부여잡고 통곡하듯, 피를 토하듯 민족통일을 울부짖는 백선생과 그것을 내려다보며 포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캐터필러와 전투원들의 우중충한 국방색 사이의 대결! 어느날 밤이었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 때문에 잠에서 문득 깼다. 병사 뒤에 있던 탱크부대가 드디어 서울 시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이른바 ‘12·12’였다.

길고 긴 그리고 복잡다단한 내용을 가진 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부터야말로 근본적인 데 토대를 두고 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연코 전략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종찬 선배는 어찌 됐을까.

그이의 군부는 힘을 못 쓰는가.

아예 괴멸되었나.

왜인가.

언제 나갈지 알 수는 없으나 이번에 나가면 새로운 대응, 아마도 사상과 이념에서부터 전략까지 전체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미 사태가 바뀌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노출되었다. 스테레오 타입으로는 어림없다. 엇비슷한 해결책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근본에서의 새로운 지향이 먼저 있고 그 전개 과정에서 엇비슷한 것들이 다시 나타나야 한다. 신기루에 속아서는 안 된다. 아마도 새 길은 불교와 동학, 그리고 생명의 길일 것이다.

‘12·12’ 직후부터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책 읽기에만 몰두했다. ‘소요’의 표현으로는 ‘독선’(讀禪)에 들어갔으니 눈 앞에서 계속 책장을 넘기면 의미심장하거나 기억해둘 부분은 눈이 이미 알아서 멈춰서고 되풀이하여 읽는다. 이것이 이른바 독선이니 나머지는 다 흘러가는 여담일 뿐이고 정보일 뿐이다.

매와 눈을 맞추는 일은 없었으나 허공에 나는 매를 보기는 자주 보았다.

‘엘 콘돌 파샤’처럼 나는 매를 부러워했다. 먹이를 찾으며 서서히 비행하는 그 두 날개의 넓적한 곳에서 바람조차 숨을 멎는 듯, 아아, 나도 훨훨훨 날고 싶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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