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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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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2>

공부 2

그때 마침 내가 기억해낸 것이 함석헌 선생의 옛 권유였다. 영성(靈性)과 생명(生命), 삶의 안팎을 과학적·신학적으로 함께 이해하자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을 읽는 것이 첩경이라는 권유였다.

나는 떼이야르의 이효상(李孝祥) 번역본 전집을 들여다 모조리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세 권 외에는 참으로 엉터리 번역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主著)인 ‘인간현상’과 다른 책들의 영역본을 영한사전과 함께 들여다 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주저인 ‘인간현상’을 다 읽는 데 몇 달이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참으로 어려운 과학서적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떼이야르는 참으로 나에게 이제까지의 모색과 앞으로의 나의 사상의 진로에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간단히 요약해서 그것은 ‘우주 진화의 3대 법칙(法則)’이다.

첫째, 우주 진화의 내면에는 의식의 증대가 있고 둘째, 우주 진화의 외면에는 복잡화의 증가가 있으며 셋째, 군집(群集)은 개별화한다는 3대 법칙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교호작용을 하는 것이니 우주 진화의 외면에서 물질이나 생명의 복잡화가 진행될수록 우주 진화의 내면에서 감각(感覺)이나 의식(意識)이나 정신(精神), 영성(靈性)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이 진화의 실상이며 진화는 우선 종(種)적으로 군집화(群集化), 전체화(全體化)하지만 그것은 결국 개별화(個別化)하여 종내는 각각의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생태학과 선불교 사이의 관계, 외면적 변혁과 내면적 명상의 관계 그리고 집단과 개체, 필연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참다운 원리를 보았다.

그것을, 그것을 깨달은 날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아마도 발 셋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가 태양 속에서 날개를 푸드득 푸드득 활개치며 날아오르기 시작한다고나 할까. 눈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다고나 할까.

그 저명한 떼이야르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실현의 배후 촉매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톨릭의 공식 인정을 못 받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가톨릭의 우주관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계층구조적 우주론, 즉‘토미즘’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준국가주의 위계질서는 바로 이 토미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가 크게 놀란 것은 어느날 대낮, 점심을 막 받고 앉은 바로 그 정오(正午)의 시간에 문득 깨달은 것!

“아니, 이것 동학(東學) 아냐?”

그것이었다.

떼이야르 사상의 중핵(中核)은 바로 동학사상이었음을 크게 깨우친 것이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가.

떼이야르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치밀하며 구체적이다. 고생물학(古生物學)의 고전이며 최고, 최대의 과학적 진화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간단한 우주 진화의 3대 법칙 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귀결된다.

그런데 바로 그 3대 법칙이 동학사상의 핵심이었다는 말이다.

동학의 핵심은 21자 주문, 그 중에서도 13자의 본주문(本呪文)에 있다. 본주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万事知)’의 중핵은 또 맨 앞에 있는‘모실 시(侍)’ 한 자에 집중되어 있다.

최수운 자신이 해설해주고 있는 이‘시’ 한 글자의 뜻을 알아보자. 우선 한자로 쓰면, ‘시자(侍者)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이다.
뜻은 이렇다.

‘시’ 즉 ‘모심’이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옮겨 떨어질 수 없음을 각각 깨달아 자기 나름대로 실현한다(各知不移)이다. 첫째, 안으로 신령이 있으며(최수운), 우주 진화의 내면에 의식의 증대가 있다(떼이야르). 둘째,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최수운), 우주 진화의 외면에 복잡화의 증가가 있다(떼이야르). 셋째, 한 세상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옮겨 떨어질 수 없음을 각각 깨달아 자기 나름대로 실현하며(최수운), 군집(群集)은 반드시 개별화(個別化)한다(떼이야르).

도리어 세번째인 진화 법칙은 동학이 떼이야르보다 더 첨단적이고 최근의 진화론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종(種)이나 군집(群集)을 개체(個體)보다 먼저 세우는 떼이야르식 발생학을 비판하고 오히려 개체가 먼저 발생하되 그 개체마다의 내부에 있는 자율적인 전체성에 따라 개체들 나름대로 각각, 자기 나름의 전체, 자기 나름의 군집, 자기 나름의 종을 실현한다는 자유의 진화론, 자기 선택과 자기 조직화의 진화론이 훨씬 더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까닭이다.

내 안에서 내 생각의 파도가 내 생각의 주체에게로 한없이 하얗게 하얗게 밀려오고 있었다.
떼이야르는 지금으로부터 꼭 5만년 전에 직립 사유인(直立思惟人,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 즉 똑바로 서서 걷고 의식하고 감각하며 사유하는 인간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인간, 사유를 사유하는 반성적 인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출현하여 언어가 생기고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고생물학적·고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런데 최수운은 현생인류가 나타난 것, 즉 최초의 개벽이 5만년 전이라고 못박고, 다시 5만년이 된 지금에 와서 신인합일적(神人合一的) 신인간(新人間), 즉 ‘신인’(神人)이 개벽, 즉 후천개벽한다고 했다. 떼이야르와 최수운 둘 다 똑같이 현금과 같은 인류의 탄생이 5만년 전이라고 본 것이다.

파도는 또 왔다.

떼이야르는 바로 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의 한복판에서 태어나는 사건, 즉 가시적인 외모는 전부 호모 사피언스 에렉투스인데 비가시적인 내면의 뇌세포 속에서 자의식이 그 극히 일부의 뇌세포 속에서 반자의식(反自意識)이 마치 별 뜨듯, 꽃봉오리 열리듯 반짝하고 열리는 그 순간을 내면과 외면의 양측에서 동시파악하는 논리가 바로 ‘아니다, 그렇다’ ‘NO, YES’의 생명논리임을 주장하고 또 그렇게 적용하여 그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생명철학의 절정인 베르그송과 현대 생물학의 고전인 그레고리 베이트슨, 그리고 가시적 차원과 비가시적 차원 사이의 인식에 사용되는 ‘그렇다’와‘아니다’의 동시어법에 귀결되는 데이비드 보옴의 물리학에 두루 공통되는 생명논리인 바, 최수운의 글‘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다, 그렇다)의 진화론법 안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미셸 세르에까지 이어질 듯하다.

파도는 또 다시 밀려온다.

13자 주문의 제2단계인 ‘조화에 일치하여 마음을 정한다(造化定)’는 노장학(老莊學)과 선불교(禪佛敎)를 통합한 논리이며 마지막 단계의‘만 가지 사실을 안다(万事知)’의 만사(万事)는 ‘수의 많음(多)’을 뜻하는 것으로 복희(伏羲)와 문왕(文王)의 역리(易理)의 비밀을 깨닫는 주역(周易)의 간역(簡易)을 말하고 정역(正易)을 예언한다. 나아가 20년 뒤에 나오는 연산(連山) 김일부(金一夫)의 마지막의‘앎’(知)은 ‘스스로 노력해 앎’(知其道)과 동시에 ‘그 앎을 계시받음’(受其知)이라 하여 동양(東洋)의 풍류선도(風流仙道)나 그리스도교적 깨달음의 핵심인 신비주의에 그대로 적합한 것이었다.

본디 우리의 풍류선도는 유·불·선(儒彿禪) 3교(三敎)를 아울러 가지면서(包含三敎) 동시에 뭇 생명을 사랑하여 진화시키는(接化群生) 생명의 철학이요, 생명의 사상이다. 이것이 다만 고색창연한 최치원의 주장인 줄로만 알았던 내게 그 가장 구체적이고 현대적인 과학적 논법과 증명을 통해 나타났으니, 오호라! 나는 이미 그 파도에 풍덩실 뛰어들고 하늘의 헤엄을 치고 논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며칠 동안 반은 정신이 나가 살았다. 밥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머리 속은 온통 ‘시’ 한 자로 꽉 차버렸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시는 사랑이다. 그러나 시는 그 말 자체로 이미 사랑보다 훨씬 더 풍요하고 올바른 범주이니 높이는 사랑이요, 섬기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경건한 사랑 ‘모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심이야말로 삶, 사람, 살림, 생존, 동양식 생생화화(生生化化)와 서양식 진화의 핵심인 것이다.

나는 머지않아 가톨릭 교회가 떼이야르를 공식 인정하고 동양사상과의 역동적인 통합을 통해 ‘동학화’(東學化)하리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우선 내 민족의 지혜의 보석인 동학부터 내 자신의 모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빛 밝은 아침, 뻘겋게 녹슨 창살 사이로 흰 햇빛이 오묘한 느낌으로 비끼는 것을 바라보며 내 넋은 이미 서학(西學)과 동학(東學)을 탁월한 과학적 새 차원에서 통전하되 동학쪽에 시중적(時中的·균형을 잡되 때에 따라 좌우로 중심을 둔다)인 중심이 더 가 있는 ‘기우뚱한 균형’을 실현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그날 이후 나는 천도교(天道敎)가 아닌 원동학(原東學), 내 증조부가 조부의 그 동학에 돌아가 있음을, 아니 떼이야르의 고생물학(古生物學)과 최신 진화론의 과학 그리고 사회생태학과 선불교를 아우른 신동학(新東學)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놀라서, 놀라서 바라보면서 몇 날 몇 밤이 흥분 속에 지나갔는지 모른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이미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심의 철학’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톨릭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그대로 가톨릭에 머물렀으면 아마도 지금쯤 유명짜한 원로가 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백면(白面)이 그대로 더 좋다. 나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나그네인 까닭이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는 거북한 호칭보다 ‘형님’이라는 정겨운 호칭이 훨씬 마음에 든다.

어느날 나는 지주교님에게 솔직히 말씀드렸다.

“저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어디? 목포 말이야?”

“아니오. 동학입니다.”

“천도교 말이야?”

“아니오. 내 마음의 원동학(原東學)입니다.”

“좋아서?”

“네.”

“그럼 그러지 뭐! 자네가 헛소리할 사람이 아니지. 오죽 생각했겠나!”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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