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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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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3>

민청학련(民靑學聯)

문리대 아우들은 나와의 약속을 지켰고, 조영래 아우는 자기 일을 착실히 진행했다. 전국 대도시 대학생들 사이에 민주청년학생연합(民主靑年學生聯合)이 탄생하여 어떤 대학은 시위에 돌입하고, 어떤 대학은 사전에 봉쇄돼 주동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년전 조영래·장기표 등이 전학련을 시도했고, 멀리는 민통(民統)과 민비(民比)가 있었지만 6·25 이후의 현대사에서 전학련이 성공한 것은 이번 민청학련이 처음이었다.

밖으로는 이 철이 지도자였으나 실제의 조직책은 유인태였고, 그 뒤엔 서중석이 서 있었으며 서중석은 조영래와 연결되었다. 활발했던 기독학생들의 시위조직 리더는 역시 나병식이었고, 그 뒤엔 또한 조영래가 있었다.

나는 나의 구상이 성공했음을 느꼈다.
나는 극비리에 유인태 아우를 만났다. 앞으로 계속 시위 등을 지속할 것인데 특히 지방대학으로 확산시킬 예정이므로 종교나 기타 학원의 세력이 움직여주기를 기대한다는 유인태 아우의 얘기였다.

내 부탁은 삼민(三民)테제는 불변(不變)이고, 일본 등 외국과의 관계는 도리어 적극적으로 나가야하며 구속체포될 때는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하라! 그리고 건강 조심!

그 길로 나는 원주의 장선생님께 사람을 보내 자세한 보고를 하고 지주교님과의 약속을 알렸으며 국내 국외 세력과의 광활한 전선의 그물 짜기, 지주교님의 '슬라이딩 태클', 가톨릭의 전면적 반격을 조직해 달라고 부탁했다.

윤배 형님을 통해 리선생과 이종찬 선배에게도 그와 비슷한 사정을 알렸다. 나는 이제 전혀 예상하지 못할 다른 일을 하면서 조영래 아우 등을 통해 조율해나가다 적절한 때 붙잡히면 붙잡히는 대로, 안 붙잡히면 안 붙잡히는 대로 응전하려 했다.

우선 나는 아내에게 "잘 참아달라!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만 말하고 헤어진 뒤 서울 안에서 주거이동을 단행했다. 순식간에 자취 없이!

모래내였다.
내가 옮겨간 거점은 그 무렵만 해도 훠언한 벌판이 많았던 미개발지역 모래내였다. 그 모래내 거리에서 어느 구멍가게 문짝에 나붙은 이 철·유인태·강구철(姜求哲) 등의 현상 포스터를 본 것은 그 직후였다. 틀림없이 나도 수배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잡혀갈 것이다. 일단은 됐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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