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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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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0>

이철(李哲) 아우

한 꼭두새벽에 정릉 처가로 어느날 웬 대학생이 한 사람 찾아왔다. 이철(李哲) 아우였다. 사연과 내력, 연고 등을 다 물어 확인한 뒤 안팎, 주객관적 정세분석을 간단히 하고 '삼민(三民)테제'에 관해 이야기했다.

유인태 아우와 접촉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새삼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좀 엉뚱한 데가 있고, 그리 만만치 않아 보였다.

'삼민테제'가 손문(孫文)을 생각나게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도리어 테제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고, 완결된 세포조직이 아니라 열려 있고 계속 변화발전하여 짜여지는 신축성 있고 그물망 같은 운동이 좋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미 유인태 아우로부터, 또 특히 조영래 아우로부터 이 철에 관한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모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으나 마지막에 가서 자금문제가 나왔을 때만은 나는 칼로 무를 자르듯 그렇게 나에겐 돈이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나서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 이윽고 일어서는 그에게 낮은 소리로 내 생각엔 아마도 '기독학생'(연맹)쪽에서 돈이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문에서 헤어질 때 이 철은 재일교포 학생 '조직휘' 얘기를 하고 그를 통해 일본인 기자 다찌가와·하야카와와의 접촉을 얘기했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으냐고? 내 답은 이랬다.

이번 싸움에서 중요한 전술은'슬라이딩 태클'이다. 만나 회견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행여라도 좌익 발언은 하지 말라. 다만 국제적인 그물망을 만든다고 생각하라.

이 철 아우는 돈 문제에서 냉정한 나를 떠나면서 그리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떠나보내고 나서 심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아침도 거르고 나는 집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연락을 먼저 한 뒤 제기동까지 거의 걸었다. 제기동은 리영희(李泳禧) 선생댁이 있는 동네다. 동구에서 고깃간에 들러 안심살 서너 근과 청주 한 병을 사들고 들어가 정중한 인사를 차렸다.

기인 긴, 그리고 박력있는, 극적인 내외 정세분석을 들었다. 리선생의 분석을 듣고 나면 항용 끓어오르는 용기와 함께 몇몇 구멍에 대한 조심스런 처방이 자연히 떠오르곤 해서 늘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분석가로서는 리선생만한 분이 없지 싶다. 원주의 장선생도 리선생의 분석만은 항상 존중해 왔으니까.

아침 겸 점심을 얻어먹고 제기동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속으로 윤배 형님과 또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학덕(學德)이 많은 사람이올시다. 내 말을 듣겠습니까?"

그 사람이란 다름아닌 '창작과 비평'사의 백낙청(白樂晴) 교수를 말하는 것이다. 윤배 형님은 내가 백교수와 소원한 것을 아시고 기인 설득과 때론 우격다짐으로라도 나와 백교수를 함께 묶으려 해왔다. 즉, 아직도 시민문학론과 중공업화의 비전을 주장하는 백교수에게 민중 주체의 민족문학과 협동적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 경공업 및 극히 선택적인 중공업 건설의 배합 방향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설득을 할 수 있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허허! 해봐! 된다고! 해보라고! 낙청이도 요즘 많이 회의하고 있으니까."

"하여튼 하긴 합니다만 끝난 뒤엔 잊어버립시다. 지금의 형편만으로도 그쪽이 양심적으로 잘하고 있으니…."

나는 '오적' 사건때 출옥(出獄) 직후 흥사단에서 행했던 민족학교 강연 '민족(民族)의 노래, 민중(民衆)의 노래'의 간단한 논리의 문맥을 기억해 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나이브한 얘기로는 되지 않을 만큼 깊은 학문이었고 어려운 자리였다.

회합은 청진동의 한 찻집 귀퉁이에서였다. 독대(獨對)였는데 백형의 표정이 퍽 우울해 보였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할 말만 했다. 약 세시간에 걸쳐 주로 나만 떠들었다. 떠들고 나서 일어나 나왔고 나와서는 걸었고 걷는 도중 또한 잊어버렸다. 참으로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와는 뭔가 다른 사람들이다. 양가집에서 곱게 큰 사람이다. 놔둬라, 놔둬! 더 이상 집착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으니 자기 나름으로 좋은 일 하겠지! 걸으면서 잊고, 잊고 나선 또 걸었다.

오장동 제일교회에서 그날 밤 '진오귀' 아닌 '청산별곡'이 상연되는 것이다.
지금은 목사님이 된 김경남 아우 등을 비롯해 젊은이들이 가득 찬 교회 실내의 매우 비좁은 공간에서 극이 진행되어 마치 '앉은뱅이 연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정도인데도 관객의 호응은 치열했으니 아, 참으로 좋은 연극, 좋은 예술과 문학, 좋은 문화운동이 그 갈증을 채워 주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로운 지향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 가는 일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소위 '문화패' 아우들과는 거의 다 호흡과 얘기를 맞춘 것들이다. 기획의 예감은 소리굿 '아구'로, 또 그 다음 춤굿 '땅끝'으로, 탈춤 공연과 풍물놀이 등으로, 등으로! 다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간부들 사이에 다찌카와·하야카와·조직휘 등의 이름들이 왔다갔다 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다찌카와는 내가 이미 며칠전 원주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 주간지 기자로서 신좌익(新左翼)이었으니 이미 아는 바이나 하야카와의 정체는 무엇인가?

만약 그건 일공(日共)일 경우 우리쪽에서 분명하게 '포섭'하려고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좋으나 어벙하게 수동적인 태도로 있다가 '피포섭'(被包攝) 상대로 하부선(下部線)으로 낙인찍히면 아주 난처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일공과 북한의 사이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특히 중간의 연결고리인 통역의 능력이 그리 마음놓을 만하지 못했다.

'청산별곡'의 연출이자 유인태 아우의 고등학교 동창인 임진택 아우에게 그 얘기를 곧 전하라고 하고 나는 곧 자리를 떴다. 피곤했다. 피로감과 함께 한없는 절망감과 환멸이 밀려오고 또 밀려갔다.

아내가 있는 정릉 처가에 돌아와 아내의 공부방 구석에 작은 술상을 하나 청해 놓고 그 앞에 오똑하니 앉았다. 이번 일, 즉 이른바 '민청학련'(民靑學聯)이라는 반유신운동의 전말과 그 실질적 전망, 그리고 전략적 방향 등에 대해 산(算)을 놓기 시작했다.

밤이 깊었다. 곁에서 아내는 깊은 잠에 들었다. 누운 아내의 붕긋한 아랫배가 보인다. 산(算)을 쓸어버렸다. 그리고는 술을 마셨다. 조금후 다시금 산을 놓기 시작했다. 쓸어버리고 다시 놓고, 쓸어버리고 다시 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며 퍼어런 새벽 먼동을 맞았다.

이번 일은 틀림없이 현대 한국사의 한 분수령(分水嶺)이 될 것이었다. 투쟁은 대중화될 것이고, 전열(戰列)은 전선당(戰線黨)으로 발전할 것이다. 가톨리시즘과 동학(東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사상, 신좌익과 자유민주주의가 얽히고 설키며 갈등도 하고 조화 일치도 되면서 전혀 새로운 이념, 철학의 신기원이 탄력있는 새 전략과 함께 태어날 것이다.

그것들의 각 부문이 제 머리 앞에 '민중' 자를 붙이든 안 붙이든 그건 상관없다. 또 그 시간도 빠르거나 늦거나 상관없다. 그 물결은 반드시 온다. 반드시 온다. 그것이 올 때는 나는 그 안에 없어도 좋다. 잎새 하나로 떨어진다 해도 그 청청한 수풀의 밑바닥에서 거름으로 썩는다면 나의 시(詩)는 완성되는 것이다. 나의 시, 내 몸과 행동으로 이 한반도 전체의 일대(一大) 서사시(敍事詩)를 쓰겠다던 학생 시절의 맹세 말이다.

연두빛이다.
아니 뺨을 쓸어가는 그 손길은 연두빛이다. 신라의 빛, 서라벌의 빛, 연두빛 아내의 손길이다. 나는 잠시 벽에 기댄 채 잠들고, 아내는 잠든 내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던 것이다.

연두빛이었다. 금빛 섞인 연두빛!
그리고 밖은 분홍빛이었다. 푸른 빛 섞인 주황 계통의 분홍빛!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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