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7>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7>

조영래

천시(天時)가 순환하는 것인가?
마침 절실히 필요할 때 그가, 저 유명한 조영래(趙英來) 아우가 출옥했다. 전학련사건으로 복역한 뒤였다. 창백한 얼굴에 눈빛마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신촌로터리의 한 작은 찻집에서다. 나는 몇 개월만엔가 서울로 돌아와, 돌아오자마자 조영래 아우를 만난 것이다.

이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다. 한마디로 염치가 없는 것이다. 방금 감옥에서 나온 사람에게 또 다시 감옥 갈 일을 부탁했으니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무자비했던 것이다.

<사진>

내 딴엔 열심히 일한답시고 그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영래 아우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 주었는가? 7년여의 세월을 골방에 숨어 지내며 그중에도 첫 아들을 낳고 또 그중에도 '전태일평전'을 써냈으니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내가 빠지려는 게 아닐세. 나는 이 일 이후 몇 차례의 물결을 더 일으켜야 한다네. 물론 자네와 함께지. 절대 노출되지 말고 통제탑을 구축하시게. 한 두 사람으로 족하지 않을까? 내 생각엔 역사학과의 서중석(徐仲錫)이 신중하고 신의가 있으며 기독교쪽의 나병식(羅炳湜)이 기획력이 좋고 마당발일세. 그러나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 만약 내가 잡히면 자금의 출처를 불 걸세. 그래야 일이 되네. '슬라이딩 태클'이지. 자네가 잡혀도 그렇게 하게. 그러나 자네는 잘 숨어야 하네. 부탁일세. 더 이상의 옥살이는 안돼! 믿을 만한 통제탑이 필요해! 내가 가더라도 자네만 있으면 일은 굴러가네. 그러나 자네가 이 일을 안 할 수는 없어. 이 일은 무가내야. 안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누구를 접촉할 것인가는 모르십시오. 나만 접촉하십시오.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십시오. 내게만 주시면 됩니다. 만약 대거 구속될 때엔 '슬라이딩 태클'이 좋은 전술 같습니다. 통제기능 이외엔 대거 피해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응…."

우리는 장소를 옮겨가며 여러 차례 만났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람에 대한 얘기는 없었고 우리가 얘기한 것은 다만 유신철폐에 대한 대안과 주장의 내용, 이른바 '삼민'(三民), 즉 '민족·민중·민생'의 명제에 대한 검토 정도, 그리고 앞으로 엮어가야 할 전선은 당 기능을 가진 전선, 즉 '전선당'(戰線黨)이어야 한다는 것. 거기엔 여러 잡경향들과 여러 종교들도 참여할 텐데 그 모든 주장들을 아우를 수 있는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민족적인 민중사상의 창조를 위해 당 기능 내에서는 끊임없는 토론과 논쟁이 용납될 것, 기독교·가톨릭·불교를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 등이었다.

그 무렵 나는 지주교님이 마련하신 돈 1백20만원을 한꺼번에 건넸다. 누구로부터란 말은 없었고 주교님께도 누구에게 간다는 말은 없었다. 1백20만원이면 그 무렵으로서는 큰돈이었다. 뒷날 조사 과정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돈이 서중석과 나병식에게 정확하게 갔다는 것이고, 내가 중간연락망을 통해 나병식에게 다 불어버리라고 해서 그가 불어버린 결과 나병식 아우 주변은 엄청나게 확대되었으나 서중석 아우는 물론 조사진이 눈치는 챘지만 묵묵부답 내 연락에도 불구하고 입을 꽉 닫아 버려서 주변의 확대가 거의 없었다.

조영래 아우는 어느날 내게 꼭 두 마디를 거의 귓속말처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돈 가는 데에 마음 갑니다. 김대중 씨를 만나 돈을 조금 받아 내십시오. 그러나 큰돈은 안됩니다. 용돈 정도로, 좀 많은 정도의 용돈이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