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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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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8>

윤배 형님

전학련 사건은 천천히 그 조사 범위를 확대해가고 있었다.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의 지원자이기도 한 흥국탄광(興國炭鑛)의 채현국(蔡鉉國) 선배(채선배는 문리대 철학과를 나왔다)는 자기와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정치인 이종찬(李種贊) 선배와 내 문제를 의논한 모양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역 장교로서 당시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보좌관으로 있던 이선배가 채선배에게 김아무개가 위험하니 피하게 하라고 귀띔한 모양이었다. 내게 기별이 왔고, 나는 그 고마운 기별대로 몸을 피했다. 강원도 태백산맥 중의 도계(道溪)에 있는 흥국탄광에 가 숨어 있으라는 거였다. 나는 바로 중앙선 기차를 탔다. 도계를 향한 여행이었다.

역사란 것은 항용 드러난 것보다 감추어진 채 잊히는 것이 더 크고 많은 법이다. 우리의 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여서 너무도 많은 부분이 잊히고 묻혔다. 그 묻혀버린 민중의 큰 삶 속에 채현국 선배, 이종찬 선배와 함께 바로 윤배 형님의 생애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창작과 비평'지를 말하면 모두 대단하게 여기고 백낙청 씨나 리영희 씨를 들먹이며 대번에 존경의 몸짓을 취한다. 하긴 그 잡지와 그 두 분이 모두 민주화운동의 수훈갑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뒤에 감추어진 채 긴 세월을 줄기차게 활동한 윤배 형님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모른다한들 돌아가신 형님의 영(靈)이 서운해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억이란 산 자의 윤리요, 뒤에 오는 자들의 책임일 게다.

나는 본디 '창비'(創批)를 통해 문단에 나온 사람도 아니고 창비 동인은 더욱 아니다. 사실 나와 창비 사이에는 애당초 노선상의 큰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창비는 애초에 서구적 근대화론이나 공업화의 비전에 입각한 시민문학론을 제기하고 있었고 반짝반짝 빛나는 김수영(金洙映)의 모더니즘을 기치로 내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그분들에게 데려가 손을 잡게 한 것도 윤배 형님이요, 그분들을 민족문학, 민중문학의 길로 밀어붙인 것도 결국은 다른 이 아닌 바로 윤배 형님이었던 것이다.

기억한다.
"먼 길 가다 보면 길에서 목사도 만나고 중도 만날텐데…혼자 잘난 체만 하면 내내 외로울 텐데…."
형님의 말이다.

그러나 처음 나를 형님에게 보낸 것은 도리어 다름 아닌 창비 그룹이었다. 내가 수배돼 있는 것을 채현국 선배와 이종찬 선배가 걱정하며 피신 방도를 주선한 것이다.

험준한 태백산맥 도계 역에서 형님과 나는 처음 상면했다. 꼭 흰눈 덮인 태백산맥 같았다. 다부지고 우람한 거구(巨軀)에 날카롭고 꿰뚫는 듯한 흰 눈빛, 가히 큰 두목감이었다. 거기 흥국탄광에 두세 달 가량 머무르면서 탄광의 끝자리인 시커먼 막장에도 들어가 보고 광부들의 고달프고 위태로운 삶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형님이 소장으로 있던 흥국탄광 광업소에 먼저 자그마한 개량주의적 노조(勞組)를 하나 만들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흥국의 자금과 형님의 보호 아래 강원도 태백산맥 일대의 탄광지대 노동자들을 서서히 조직화하기로 결정을 보았고, 내가 돌아가는 즉시 그 일을 맡아 할 적임자를 찾아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사단이 난 것은 떠나기 바로 전날 밤의 송별연에서였다. 거친 광부들과 어울려 독한 막소주와 허연 돼지비계를 마구 퍼먹고 잔뜩 취한 중에 어찌 된 사연인지는 모르나 형님이 광부 몇 사람을 주먹으로 냅다 두들겨 패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범장달 같은 광부 서너 사람을 혼자 마구 거꾸러뜨리는 것을 보며 말린답시고 뛰어든 내 입에서 형님에게 내뱉은 외마디가 이것이었다.

"에잇, 부르주아의 앞잡이!"

아마도 밤 10시경부터 이튿날 새벽 2시경까지였을까. 웃통을 벗어붙인 채 나는 형님에게 내내 두들겨 맞아야 했다. 거꾸러지면 일으켜 세우고 거꾸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또 패고 또 패고….

"한낱 지식인 나부랭이가 이 지옥 한복판에서 뭘 안다고 주둥이를 나불거려!"
"불쌍한 노동자를 왜 팹니까?"

반복, 또 반복되는 대화 아닌 대화였다. 아침이 훤해졌을 때 곯아떨어졌다 눈을 뜬 나는 내 얼굴과 몸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느꼈다. 얼굴도 몸도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나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떠나야 한다면 우리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고 사람 보낼 날에 준비해주도록 확약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절뚝거리며 겨우겨우 소장실이 있는 높은 언덕까지 거의 기듯이 올라갔다. 형님 앞에 앉자,
"약속은 약속입니다. 아무날 아무시 사람 보낼 터이니 준비해 주십시오. 저는 이만 갑니다. 또 뵙겠습니다."

형님 왈,
"야야! 못 봐주겠다. 네 얼굴이 사람 얼굴이 아니야. 오늘 하루만 더 묵어 가라. 오늘 그냥 가면 내가 못 산다. 제발 하루만 더 있다 가!"

그날 밤 우리는 다시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셨고 의형제를 맺었다. 형님 웃어 가로되,
"야, 이 독종아! 네 엄마 아부지를 꼭 좀 뵈어야겠다. 두 양반이 뭘 좋아하시냐?"
"아버지는 꽃, 어머니는 돈."

그래서 형님은 그 뒤 어느날 밤 오른손에는 꽃을 들고 왼손에는 돈봉투를 들고 종암동 살던 우리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치른 것이다. 형님은 그 뒤부터 내게 있어 바로 친형님이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나와 동료들의 적지 않은 활동 자금이 형님에게서 계속 나왔고, 돈보다 더 중요한 정보부나 청와대 쪽의 동정들이 이종찬 선배로부터 형님을 거쳐 나와 동료와 후배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귀한 일꾼들을 내게 소개하거나 내쪽의 좋은 아우들을 수도 없이 숨겨주거나, 일을 통해 단단한 투사로 단련시켰다.

약속한 날 박재일 형이 도계에 갔다 독한 소주공세에 취해 그야말로 떡이 되었고, 그 뒤 노조를 담당하기 위해 손정박 형이 신속히 도계로 갔다. 형님은 청강 선생과 지주교님께도 관심을 가져 돈암동에 있는 아일랜드 신부님들의 수도회 건물 접견실에서 지주교를 직접 독대(獨對)한 적도 있다.

바깥에서 엿들으니, 형님 왈,
"가톨릭이 앞으로 반동적(反動的)이고 반노동자적인 행동을 안 한다는 보장을 할 수 있습니까."
형님의 언성이 높았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본 정신은 불변입니다."
지주교님의 낮은 언성이다.

"주교님을 보니 신부들이 얼마나 노동과는 거리가 먼지 알겠습니다. 편하게 사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도원 같은 데서는 온종일 노동하기도 합니다."

"신부들은 죽음을 두려워 안 한다죠? 우리 지하를 돕다 죽더라도 변심 안 할 수 있습니까."
"지하와 나는 이미 동지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안심했습니다. 진심 같군요. 자 그럼!"

그후 김민기 씨가 형님을 만나 대천 쪽에 있는 광산에서 몇 달인가 노동한 적이 있다. 인텔리겐챠나 예술가를 별로 평가하지 않는 형님 왈,
"아, 그 민기란 녀석 제법이더라. 입을 꽉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한단 말이야. 노동자들도 다 좋아하고… 허허허 별꼴이야, 별꼴!"

그 형님이 10여년 전 간암으로 돌아갔다. 해남 남동집 귀퉁이방 어둠 속에 누워, 그 무렵 중병을 앓고 있던 나는 어느 날인가 비몽사몽중에 문득 허공에 대고 물었다.
"형님 잘 계신가요?"

대답이 왔다. 빙긋 웃는 얼굴과 함께.
"나 잘있어! 자네 이제부터 새 일을 시작해야 할텐데 내가 미력하나마 도울게! 다만 이번에는 매사에 독 가지고는 안돼!"

"독 가지고는 안돼!"
그렇다. 이제는 독 가지고는 안된다. 아마도 독 대신 덕일 게다. 많은 이들의 고통과 헌신을 잊고 묻어버린 채 저희만 잘했고 또 잘한다고 거들먹거리는 세태는 그대로 낄낄 웃으며 넘길 수 있다. 예부터 세상이란 그렇고 그런 거니까.

그러나 아직도 덕이 아니라 독으로 세상을 어찌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그 때마다 형님이 떠오른다.

윤배 형님!
흰 눈 덮인 태백산맥처럼 크고 우람한 윤배 형님!
나의 진정한 형님!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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