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8>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8>

졸업

악어 형이 어떤 정확한 통로로 해서 정보부와 경찰에 알아본 결과 내 사건은 이미 지난 초겨울에 종결되었고 더는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나는 대학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주에 다녀오고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 등록을 마쳤다.
나는 1966년 여름 졸업 예정으로 꼬박 7년반 동안 학적을 유지한 셈이다.

폐결핵 증세가 심해져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해골처럼 마른 몸에 쿨룩쿨룩 끊임없이 기침하며 끊임없이 피가래를 뱉어냈다. 어떤 때는 기흉(氣胸)을 의심할 정도의 호흡장애도 왔다. 그러나 술은 끊을 수 없었고 이젠 술도 이미 술이 아닌 아편이 돼버렸으니 독한 소주에 기껏해야 돌소금이나 사과 반쪽이 한 병 소주에 대한 안주의 전부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 때문에 서울로 직장과 집을 옮기려 하는 터에 마침 명륜동 명륜극장 영사주임 자리가 비어 있어 그리로 가시기로 하고 집을 이사했다. 가회동 입구에 방 두 개를 세들었다.

이미 답십리 시절에 결심은 서 있었다. 대학원 진학은 포기했고, 교수의 꿈도 접었다. 졸업 논문도 그저 건성으로 써서 내 던졌다.

끝났다.
이제 새로운 출발이, 어쩌면 무서운, 무서운 새출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졸업 전에 원주에서 비밀 모임이 있었다. 문화운동을 통해 투쟁의 길을 닦아가는 것, 잡지 구독자가 바로 조직원이 되는 새로운 이념잡지 출판의 길, 내면의 영적 평화와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한 자유와 평등 성취의 새롭고 빛나는 통합의 길.

우리는 경영난에 허덕인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던 '청맥'지(誌)를 단계적으로 접수한다는 청강 선생의 구상을 그 추진방향으로 결정했다. 처음엔 동업(同業)으로 시작해서 편집방향과 경영방식에서 점차 우위를 점해 나가는 과정에 저울의 균형을 뒤집는 대책을 치밀하게 강구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청맥이 평양의 지휘 밑에 있는 통혁당(統革黨)의 기관지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더니 졸업 전후한 시기부터 서서히 그러나 담대하게 초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교섭은 내가 맡아야 했고, 아마도 후일 우리쪽 편집책임도 내가 걸머져야 할 것이었다. 우선 '새세대' 시절에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심재주(沈在株)형을 만나 청맥 내부사정을 샅샅이 들었다. 곤란하기는 곤란한 모양이었다.

졸업후 초가을쯤에 김질락 선배와 공동발행인인 이문규 선배를 만났다. 내가 청맥에 관심 갖는 것을 좋게 생각하며 함께 일할 생각 없느냐고 제안해 왔다.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가을이 깊어질 무렵, 청맥 재정이 바닥을 헤매이고 있다는 정보가 나도는 상황에서 나는 김질락 선배를 독대(獨對)했다. 그때 내가 공동경영, 공동편집을 제안하자 이에 대응해서 김 선배는 갑자기 낮은 소리로 이상한 말을 했다.

"이 잡지 이거, 우리들 기관지입니다. 그것을 먼저 생각해 주오!"

기관지?
우리들?
나는 건성으로 생각하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믄요. 알지요. 우리가 청맥을 얼마나 아끼는데요. 아, 그래서 이렇게 돕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돈 얘기는 김형에게 안 맞습니다. 공동편집이 좋군요. 우선 팀에 들어와서 함께 일해 봅시다. 김형이 들어온다면 잡지가 크게 사기 올라갈 거요."

"내 얘기는 나 혼자의 얘기가 아닙니다. 강원도에서 사업하는 한 선배가 나를 생산적인 차원에서 돕고자 합니다. 잡지를 해보라고 하는데 마침 청맥이 운영난이라고 해서 내가 감히 선배님께 공동경영을 제안하는 겁니다. 어떤가요?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인데, 그 선배를 일차 만나 보시렵니까. 청맥 일꾼 모두와 함께 저녁이나 같이 들지요?"

조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그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느날 저녁 청진동 한 식당 안방에서 청맥 전원(全員)과 나와 원주의 김영주(金榮注) 형님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상견례를 치렀다.

영주 형님은 원주에서 청강 선생과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강원도지사 비서실장과 '강원일보' 기자 등을 역임하여 참으로 세상사에 능란한 형님이다. 훗날 천주교 원주교구청 기획실장을 거쳐 사회개발위원회 위원장으로 수십수백억원의 독일 자금으로 강원·충북·경기 3개도(道)의 농촌·어촌·광산·도시근로자 등에 대한 지원과 조직사업을 함에 있어 정말로 훌륭한 조직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독일의 지원단체 '미세레올'로부터도 높은 상찬을 받은 분이다.

나는 항용 형님을 또 하나의 저우언라이(周恩來)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건 헛소리가 아니었다. 청맥의 수고를 높이 치하하고 그 고난을 위로하며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다 하고 그 연락과 의논을 김지하에게 일임한다고 못박았다.

김질락 선배는 나 개인의 입사(入社)를 원했고 공동경영과 우리쪽의 투자에 대한 대답을 자꾸 연기했다. 분명 일방적인 거절은 아니었다. 내 감각으로도 그가 어떤 결정이나 결정적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다!
그렇다.
김선배는 평양에 보고하고 평양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번은 악어 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다 길 건너편에서 김질락 선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악어 형이 몸을 피해 위기를 넘긴 적도 있다. 두 사람은 문리대를 같이 다녔고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그 악어 형이 나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김선배에게는 의문점이요, 나의 제안을 거부할 사유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학교 다닐 때 악어 형은 김선배들이 중심이 된 '한사연'인지 '후사연'인지 하는 이름의 정치학서클과는 무관한,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자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듬해가 시작되는 '쌩고롬한' 날씨의 2월 어느날 요양원에 입원한 뒤 그해 초여름인가 통일혁명당과 임자도 그룹, 그리고 그 기관지로서의 청맥에 관한 기소장 발표와 함께 김질락·이문규 선배가 김선배의 삼촌인 백두일(白頭一)과 김종태(金鍾泰) 씨와 함께 백두이(白頭二)·백두삼(白頭三) 등의 암호명(暗號名)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왕래한 바 있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참으로 깜짝 놀라 오른손으로 몇번이고 몇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우―, 호랑이 꼬리를 살짝 밟았구나!'

폐결핵이 일을 그쯤에서 중단시킨 것이다. 건강했다면 아마 틀림없이 서로 손잡는 이야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청강 선생의 전력(前歷) 때문에라도 악어 형이나 영주형, 그리고 나는 큰 고초를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여름 조사를 다 끝내고 무사방면된 심재주(沈在株)형이 요양원으로 나를 면회 왔을 때 참으로 내 넋의 밑바닥에서 신(神)을 부르는 소리가 쟁쟁히 들리는 듯했었다.

'다른 일을 시키려 하시는구나!'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