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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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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8>

술꾼들

내겐 술친구가 많다.

그러나 '술친구'하면 꼭 생각나는 네 사람이 있다. 모두 나보다 10여살씩 위였으니 장 어른들이었다. 원주에서 놀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아침 후엔 반드시 '명'이란 다방에 나가 조간신문부터 찬찬히 샅샅이 틈틈이 갈피갈피까지 모조리 읽어치운다. 그러노라면 양조장 다니는 최선생 이외의 술꾼 세사람이 반드시 등청한다. 나는 세사람에게 별명을 붙였는데 '까치머리' '뒤주' '도롬베또'였다.

'까치머리'는 앞머리에 두줄기 새하얀 머리칼이 나 똑 요즘의 '브리지'같은데, 원주 근처 시골에 있는 상당량의 땅을 야금야금 술값으로 팔아치우고 있을 뿐이었다. 술값이라 하지만 많이 먹는 것도, 비싸게 마시는 것도 아니다. 소주에 빈대떡이 고작인데 가장 즐기는 안주는 빈대떡 굽는 데 쓰는 돼지비계가 다 타고 남은 새카만 숯덩어리였다.

또 한 분 '뒤주'는 함경도 출신의 '아바이'로 면허증 없는 의사인데 의료사고로 수입이 없던 한동안은 집을 나설 때마다 술값으로 뒤주에서 쌀 몇 되씩을 반드시 퍼가지고 술청에 이르는 분.

또 다른 한 분은 키가 팔대장성의 악사(樂士) 출신으로 '트럼펫'이 그의 생업이어서 일본 발음으로 '도롬베또'가 되었는데 근래에는 모두 집어치우고 버스 영업을 해볼까 하고 매일 다방과 술집에 앉아 버스 연구에 몰두하시는 분.

나머지 한분은 별명이 없이 그냥 '최선생', 자주는 아니고 가끔 한번씩 동참하는 분으로 양조장에 근무하며 우리에게 올 때마다 절룩거리면서 술 만드는 원료인 '진땡이'를 가져다 주는데, 김일성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노동당원으로 6·25때 다리를 부상당한 채 국군에 투항한 반공포로였다.

최선생이 걸작이었다.
내가 호기심에 가득찬 얼굴로 묻는다.
"한마디로 북한은 어떤 사회입니까?"

대답은 한마디다.
"사람 사는 사회지요."

"남한은 어떤 사회라고 보십니까?"

"사람 사는 사회지요."

"사람 사는 사회가 무슨 뜻입니까?"

"인정도 통하고 돈도 통하고 빽도 통하고 ……."

"북한도 그렇단 말입니까?"

"그럼요. 거기도 사람 사는 땅입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우리 조국은 어떤 사회가 될 것 같습니까?"

"사람 사는 사회지요."

이 모양이다.

한번은 최선생이 서울의 대학가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 술꾼 친구 중 극좌가 한 사람이 있어 술상머리에서 최선생을 자꾸만 괴롭혔다.
"반공포로라는데 노동당원이 그럴 수 있습니까?"

대답은 느리게 했다.
"노동당은 사람을 위한 정치조직입니다. 사람이 다쳤는데 당이 치료해 준다면 모를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원이라면 부상이나 죽음을 넘어서는 확고불변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계급의식, 적개심도 없이 반공포로라니요?"

"마르크스 철학은 형성과정중에 있는 사상입니다. '변화 속에서'라든가 '발전과정에서'라는 말이, 특히 정치경제학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 말은 확고불변한 건 없다는 뜻일 텐데요 …."

내 친구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만큼 술도 올랐다.
"그렇다고 그 말이 기회주의자들을 위한 말은 아닙니다."

"기회주의면 어떻습니까? 총탄·포탄이 비오듯 하고 비행기가 온 산하에 융단폭격을 하는 전장에서 살아났다는 건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큰 일이고, 기회주의보다 더 벅찬 사상입니다."

"그따위 태도 가지고서야 어디 역사가 진보발전했겠습니까?"

최선생은 그 도수 높은 안경을 한번 높여 내 친구를 빤히 쳐다보더니 역시 느릿느릿 한마디 묻는다.
"시간은 언제나 진보·발전하는 겁니까?"

"그럼 진보·발전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한강은 바다로만 흘러갑니까?"

"그러면 한강이 거꾸로 산으로도 갑니까?"

최선생은 그때 술집 밖의 우중충한 혜화동로타리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며 알쏭달쏭한, 그러나 그 후의 내 인생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는 한 발언을 내뱉고야 말았다.

"강물은 바다로 향해 흐르는 표면 아래에 무수한 역류(逆流)를 포함한 채로 흐릅니다. 역류(逆流)도 물은 물이지요. 잘 보면 시간은 거꾸로도 갑니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자기의 목숨이며 생활이지요. 지금 이 시간, 이곳에서의 삶을 중심으로 모든 시간과 모든 역사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반동이군요!"

"크게 본다면 반동도 하나의 역사입니다. 그게 좋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일방적으로, 선(線)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살아 생동하는 복잡한 것으로 전부를 다시 보느냐는 차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나와 내 친구는 소위 '삶'이란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 또래에 가까운 전쟁시대의 어른에게 반동이니 운동이니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술취한 증거든가 나이 어린 탓이었다.

그뒤 최선생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울에 있는 쌀 공판장으로 직장을 옮겼다고도 하고 결혼을 했다고도 했다.

'까치머리' 기억이 난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 한 날 그의 시골집이 있는 호저면 옥천에 '뒤주' '도롬베또'와 함께 놀러간 적이 있다.

그때 황량한 논바닥 곁에서 토종닭을 잡아 진흙구이를 해먹은 적이 있다. 참 별미였는데 그 진흙구이 하나로 내가 갑자기 한꺼번에 어른이 되는 느낌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까치머리'가 중풍을 맞아 술을 끊을 수밖에 없이 된 때의 일이다. 그이가 김포세관에 취직해 다닐 때인데 명동에서 내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에 앉았다. 한 잔도 못하면서도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아 헤헤헤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나의 말년을 생생히 보았다.

"안 마시고도 견딜 만합니까?"
내가 물었다.

대답은 "수주(樹洲) 변영로라고 술꾼 있지! 그 양반이 술을 못 먹게 돼서도 술집에 맨날 앉아 있었다지!"

"왜요?"

"눈으로 마신 거지, 허허허!"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뒤주"는 대학을 중퇴한 인텔리, 가짜의사였다. 그가 오른손에 웬 보따리를 들고 나더러 시골에 바람쐬러 가자던 한 날이 생각난다.

이 산 저 산, 야산들을 기웃거리다 '봉살미' 뒤의 한 스산한 민둥산 언덕배기에 이르러 나를 아래쪽 마을의 우물 곁에 있게 하고 혼자서 그 보따리를 어느 산기슭엔가 묻고 온 일이 있었다. 땀이 밴 그의 얼굴에서 웬 눈물자국이 보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마을의 구멍가게에 앉아 김치를 안주로 막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이 무슨 날일까?
'뒤주'는 무엇을 땅에 묻고 온 것일까?

술에 취한 그의 눈가에 눈물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노을 무렵 시내로 돌아오던 때의 어둑한 기차터널 근처에서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나는 그 까닭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뒤 나는 내 생애에서 처음이자 끝인 단편소설 하나를 썼는데 거기에서 나는 '뒤주'의 그 보따리를 '영아', 즉 '핏덩이', '애기송장'으로 추정했던 적이 있다. 그 소설 제목이 잊히지 않는다.
'18족(十八足) 까치전(傳).'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뒷날 듣자니 소설가 김승옥(金承鈺)이 그 원고를 갖고 있다고 했다.

'뒤주'는 그밖에도 내게 일본에서 나온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선언'과 여러 논문들, '프로이트 연구'나 앙드레 브르통의 작품들을 번역해 주었다. 그리고 해설해 주었다. 그는 지금 한 사람의 목수(木手)가 되어 미국에 살고 있고 술은 여전하다고 한다.

그날의 그의 보따리.
그리고 노을에 비친 그의 눈물.
최선생이 '삶'이라고 부른 것이 그런 것이었을까?

'도롬베또'의 또 하나의 이름은 '상떼기'였다. 스스로 그렇게 불렀으니 무슨 말못할 연고가 있었을 게다. 그는 오래 전에 악단과 악사를 포기했지만 트럼펫 입꼭지 하나는 꼭 앞가슴 포켓에 넣고 다닌다. 그래 술에 취하면 그걸 꺼내 가지고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나 '서머타임' 등의 재즈를 루이 암스트롱처럼 알엔비(R&B)로 불어대곤 했다.

'명'다방의 얼굴마담은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도롬베또'를 사랑했다. 그이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 같았는데 그 마담이 단 한번 '뒤주'에게 '주책'이란 표현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다방에도 나가지 않고 그녀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는 내내 싱글이었다.

그를 수유리 버스정류장에서 본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상떼기'의 그 '떼기' '얼굴상'에도 잔주름과 흰머리가 생겼을 때 버스 종점에서 출발과 도착을 체크하고 있는 그의 그 껑충한 키다리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 안에 적막한, 그러나 첫 봄물같이 따스한 우정의 싹이, 아, 그것이 최선생의 이른바 '삶'이었을까? 그래 그 싹이 돋는 것을 그의 삐뚜름한 미소 속에서도 볼 수 있었으니, 아 그것이 진정 우리들의 '삶'이었을까?

그들이 내 곁을 떠난 뒤 원주에서 술집에서의 방랑중에 혼자 앉아 말없이 술을 마실 때 그때마다 그들은 내 곁에 산 사람들처럼 오똑 앉아 있고 그리고 '삶'에 대해서 그 영상들이 속삭여 주는 소리를 나는 여러 차례 들었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외로운 술꾼의 삶을 그린 시 한편이 옛 시집에 남아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물시장'이란 산문 형태의 시다.

비닐창에 얼어드는 새파한 겨울하늘에, 질척한 검은 흙길 살얼음 위에 반짝이는 은빛 햇살에 한 잔 걸어 '떠나갈까.'

소주잔 속을 구름 그늘이 언뜻언뜻 지나가고 인적 끊긴 신작로 아래 '우물사랑' 가장귀, 사발집 술청 귀퉁이, 침침한 화덕 모퉁이, 삐걱대는 술상 언저리 오똑 앉은 소주잔 속을 이미 떠나간 낯익은 얼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가고

'아예 떠나 버릴까.'

뭉치·딸기코·까치머리·땡비·상떼기, 더러는 소식 없고 더러는 죽어 이 세상에는 이미 없는 술꾼들 소주잔 속을 맴돌고 맴돌다가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훌쩍 떠나버릴까.'

움푹 파인 도마 옆 때 절은 신약성서 집어다 안주 삼아 뒤적이며 생각한다. 한바탕 개똥철학적으로 생각한다. 땅 위에 산다는 것을, 소주잔 속을 구름그늘이 지나듯 땅 위에 산다는 것, 다름아니라 밤주막에 잠시 묵었다 이마 시린 빛 밝은 겨울 아침 다시금 터덜터덜 먼 길을 떠나는 것.

또 생각한다.
흙도 바람도 티끌까지도 모두 다 목숨 있어 태어나 살다 한번은 죽어가고 죽은 뒤에도 살아 떠돌아 세상은 온통 귀신으로 가득찬 것.

또 생각한다.
살다 살다 못살면 죽어 귀신으로나 떠돌며 살지 뭘! 재미나게 사는 놈들, 아우성 아우성치며 사는 놈들, 등치고 간 내먹으며 뚱땅거리며 사는 놈들 똥묻은 뒷구멍이나 슬슬 엿보고 다니며, 낄낄 웃어대며 도깨비로나 떠돌며 살지 뭘!

소주 세병 혀로 핥듯 싹싹 비우고 일어서 우물시장 떠나 봉천냇가 참수터 돌기둥 앞에 와 선다, 웃는다, 괜히 웃는다, 미친 듯이 웃어댄다.

새파란 겨울하늘에 질척한 것은 흙길 살얼음 위에 반짝이는 은빛 햇살, 은빛 냇물 위에, 내 눈시울 은빛 물방울 방울 속에 구름 그늘이 빠르게 지나가고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고, 웃는다. 괜히 웃는다, 미친 듯이 웃어댄다.
'지금 이대로 떠나버리고 말까.'

계엄 속의 거리, 캄캄한 뒷골목, 침침한 술집 뒷방, 수세미 같은 머리칼에 술로 찌들고 화장독으로 썩어 검누런 얼굴에 화투짝 두드리며 낮게 중얼거리던 애린의 그 한마디.

'죽을 용기 있거든
그 용기로 아예 살지 뭘!'

쌍다리를 건넌다. 나무다리가 흔들거린다. 희한하다. 쌍다리를 건넌다. 돌다리가 흔들거린다. 희한하다. 쌍다리를 건넌다. 하늘이 흔들거린다. 희한하다.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며 지나가고, 웃다웃다 끝내는 토해 버린다. 똥물까지 창자까지 눈물 줄줄 흘리며 침 질질 흘리며 억억 소리소리 내지르며 몽땅 토해 버린다. 텅 빈 뱃속 겨우 편안하고 텅 빈 머릿속 가까스로 조용한데 주책없는 시장기가 사르르 기어들어 사르르르르 들어

'이런 육실헐 중생!
어디 가 가락국수라도 좀 먹을까.'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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