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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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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

***표랑**

그 무렵 아버지는 파출소 습격사건이니 시위 등에 조직자로 연루되어 수배를 받고 중선(中鮮) 쪽으로 자주 피신했다.

백부가 계신 부평, 인천 쪽으로, 혹은 친구가 산다는 대전, 조치원 쪽으로 피신해서 그런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가 날 데리고 긴 여행을 하던 시절이다. 그때의 여행. 사십사오륙 년 전이니 지금도 보면 캄캄한 시절이다.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었고 통신도 말이 아니어서 이곳에 있다해서 가보면 저곳으로 갔다하고 그곳에 있다해서 찾아가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이 잦아 마치 우리 모자의 여행은 때론 캄캄한 미로였고 때론 집시같은 표랑이었다.

그 무렵의 기차여행. 한마디로 시커먼 석탄 덩어리. 그것도 객차가 아닌 화물차 여행.

느려터진 완행열차에 밤낮을 흔들리다보면 허름한 사람 말쑥한 사람 잘나고 못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똑 요즈음 연탄 배달부 몰골이 돼버리고 만다. 긴 터널을 지날 땐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는데 아 그 무서운 장성 갈재굴, 똑 지옥이요, 끔찍한 통과의례였다. 석탄재와 매연 때문에 도무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수건으로들 코를 잔뜩 틀어막고 겨우겨우 샛숨만 할딱할딱할딱, 온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꼬아대며 가까스로 버티는데, 웬 시간은 그리도 더디 끌던지, 설상가상 굴 속에서 한번 정차라도 하는 날이면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

굴을 빠져 나올 때의 그 벅찬 해방감은 지금 생각해도 사뭇 감동적이다. 민족해방이 아마 그런 것 아니었을까. 심호흡을 하며 빙그레 웃는 사람, 발장단까지 쳐가며 노래부르는 사람, 흥분해서 뭐라고 덮어놓고 왁왁 떠들어대는 사람, 그리고 여기저기서 아낙들.

“오메 오메 조은거! 인자 살것네 잉!”

싸가지고 온 김밥덩어리를 낯선 이들에게도 들라고 자꾸 권해쌌고 깜둥이가 된 서로의 몰골을 쳐다보고 서로들 우습다고 손가락질하며 배를 움켜잡고 박장대소한다.

참! 그때 사람들은 지금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다. 견디기도 잘 견디지만 단순하고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이 똑 큰 부뚜막이었으니!

표랑의 기억 몇 토막.

평택역이었던가. 화물칸 문짝 밖의 그 정거장 밤 풍경.
흐린 불빛 아래 느릿느릿 움직이는 역원들, 허둥대며 내리고 오르는 승객들, 대합실 의자에 포게포게 엎어져 잠이 든 남루한 사람들, 보퉁이 위에 얹혀진 벌거숭이 아이들,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하는 사람, 멀건히 기차를 보고 서있는 사람, 레일 위에 떠있는 둔탁하고 차가운 빛, 기관차의 흰 수증기, 빨간 신호등, 캄캄한 밤하늘, 길고 긴 기적소리, 서먹서먹한 낯선 세계의 첫 경험.

어두운 역구내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순간 나는 어머니를 꽉 붙잡고 나직이 외친다.
“엄마! 엄마! 테러! 테러!”

그것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조치원 이모네 과수원에서 맞은 그 서리 가득한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지친 밤 여로 끝에 갑자기 열린 그 풍성한 나무와 과일들의 눈부신 파노라마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아침햇살 반짝이는 금강!

이모부는 그때 나를 데리고 과수원 바로 옆 금강에 손투망질을 나갔는데 물이 발목까지밖에 안왔다. 온 강물이 다 그랬다. 숱한 은빛 고기떼, 가늘고 고운 금빛모래, 수정같이 맑은 물, 그 위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퍼지는 섬세하고도 장엄한 아침햇살을 잊을 수 없다. 떠나고 싶지 않았고 꼭 거기서 그냥 눌러살고 싶었는데 허나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애늙은이였거든.

그 이튿날 오후던가. 남주 누나를 따라 연못에 잠자리를 잡으러 갔는데 말이 이상해서 속으로 내내 웃었다. 목포에서는 ‘불어라 불어라’ 하는데 ‘부우라 부우라’ 한다. 지금도 입속으로 한번
“부우라”
하면 웃음이 슬몃 나오고 이어 쪽빛 옷의 남주 누나, 푸른 연못, 초록빛 왕잠자리, 바람에 쫓기는 흰 구름들, 금빛 나락의 물결이 빙빙 돌며 잊어버린 그 시절이 심연으로부터 확충되어 나오듯 하나하나 연이어 떠오르곤 한다.

조치원을 떠날 때 시끌시끌한 버스정류장 큰 수양버들 밑에 오도마니 서 있던 흰 옷의 이모 모습이 선하다. 마치 그 시절의 인상화처럼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나는 성난 것처럼 얼굴을 있는대로 잔뜩 찌푸렸었다.

그게 어디쯤이었을까?
버스가 잠시 멈춘 어느 이름모를 시골 정류장.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 쓴 풀언덕이 차창 밖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는데 풀섶에 한 송이 할미가 피어 고개 숙이고 있었다. 아 할미! 심한 멀미에 어지럼증에 흔들리며

“여기 그냥 내려버렸으면!”
“여기서 그냥 살아버렸으면!”

작고 익숙한 삶 속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 그때 나는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

부평일 것이다. 밤. 연이어진 기와집 휘굽은 처마와 처마. 검푸른 하늘을 찌르는 날카로운 처마끝들. 굳게 닫힌 대문. 시커먼 문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선 인기척 하나 없고 사위는 괴괴했다. 캄캄한 골목 저 먼 끝에 푸른 불이 하나 명멸한다. 꼭 귀신의 눈. 나는 그때 정말 귀신을 본 것일까?

부평일 것이다. 길고 긴 철길에서 노을 무렵에 아버지와 헤어지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철길 따라 천천히 멀어져가는, 그래! 천천히 멀어져가는 푸른 스즈키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의 한쪽 어깨가 기우뚱한 뒷모습이 힘이 없어 보였고 내 손엔 한 움큼 미군과자가 쥐어져 있었다.

역시 부평일 것이다. 유기전, 번쩍 번쩍 빛나는 산더미같은 황금빛 놋그릇들이 발하는 눈부신 광망에 마치 눈이 멀어버린 듯, 심한 감기에 걸린 듯, 술 취한 듯 비틀거렸다. 황홀, 그 곁엔 울긋불긋한 극채색의 찬란한 비단전 비단전이 연이어 겹쳐지고 여기가 어딘지,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 내가 누구인지 까맣게 사라져 버리고 그 휘황찬란한 눈부심에 묻혀 나는 두께없는 황금의 꿈을 꾸고 있었다.

태양을 똑바로 봐 버린 듯, 혹은 옛 신선 세상의 화안한 금빛 평화 속에 자지러지듯 녹아 있는 듯, 그것은 분명 낙원이었다.

훗날 나는 이 황금의 이미지를 좇으며 불경이나 희랍의 황금시대의 전설과 신화, 예이츠의 일련의 희랍기행시, 타지마할 사원, 카잔차키스의 어떤 부분, 아라베스크 미술이나 페르시아의 풍속화, 인도 중국 한국의 금빛 탱화 민화 민담 그리고 무가나 사설시조 판소리 흥보가 중에서까지 탐욕스럽게 이 황금빛 이미지를 찾으려고 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말짱 허망한 짓!

그것은 다만 어두운 유년의 지친 마음이 스스로를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슬픈 환상에 지나지 않고 그때 본 것은 오직 싸구려 놋그릇들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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