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개편 작업을 준비하며 예년보다 1주 일찍 송년호를 꾸렸습니다. 이번 송년호(170호)에서는 '프레시안 books'의 기자, 기획위원, 연재 필자 열두 명이 각자가 꼽은 '올해의 책'을 이야기합니다. 판매 순위나 화제성보다는 책과의 만남의 밀도, 이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중심으로 꼽은 '올해의 책'과 함께 2013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프레시안 books' 다음 호는 사이트의 전면적인 디자인 개편 작업이 끝난 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저녁에 발행됩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투병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바깥세상으로 나들이 하는 시간보다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당연히 내 정체성도 SNS를 통해서 재확인되고 다시 형성되어가기 시작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의 3분의 2 정도가 암흑에너지인데 그 정체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나머지 3분의 1 중 5분의 4 정도는 암흑물질인데 이것의 정체는 조금 밝혀졌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나머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보통물질이다. 우주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찾아야할 구멍이 많다는 이야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 생활의 절반 이상이(거의 3분의 2에 육박하고 있다.) 잠인데 이게 암흑에너지 같다는 그런 생각. 누구에게나 잠은 여전히 미지의 암흑에너지 같은 존재일 것이다. 보통물질에 해당하는 만큼이 오프라인의 내 생활이라면 이제 조금씩 그 정체를 파악해가고 있는 암흑물질의 양에 해당하는 만큼의 시간을 나는 온라인에서 보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온라인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2013년 나의 '올해의 책'은 온라인 공간 속에서 찾아봐야겠다는 기특한(나는 정말 이 생각을 하고는 내가 기특하다고 생각했었다.) 생각을 했다. 올 한 해 내 '페친'들 사이에서 이슈가 된 책들은 많았지만 마치 물질과 반물질처럼 쌍을 이루어서 내 마음속을 파고든 책 두 권이 있었다.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지음, 난다 펴냄)와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류근 지음, 곰 펴냄)였다. 그렇다고 이 책들을 당장 읽어볼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심심찮게 이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가 페친들로부터 오기 시작했다. 내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니 책을 사서 보내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할 수 없이 일단 책 두 권을 샀다. 그래도 당장 읽을 여력이 없었다. 나만의 '올해의 책'을 뽑아달라는 청탁을 받고서야 묻어두었던 이들 책 두 권을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두 권의 책을 읽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지음, 난다 펴냄). ⓒ난다 |
하지만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내가 쓰고 싶은 스타일의 글이 담긴 <밤이 선생이다>를 만난 것은 기쁜 일이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문 칼럼을 오려서 자신의 형식화된 단어와 글쓰기 틀에 맞게 고치라고 강요하는 사람에게조차(같은 사람이 내가 쓴 칼럼을 오려서 빨간 줄을 십여 개 치고 자신의 책 몇 쪽을 참고해서 고치라는 편지를 내게도 보내온 적도 있었다.) '내 글은 알게 모르게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라든지 '말에 관한 한 나는 현실주의자이지만, 선생의 순결주의 같은 든든한 의지처가 있어야 현실주의도 용을 쓴다'라고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의 글에서 변방의 고뇌가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의 글이 고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속상하다. 변방의 그늘이 드리웠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좀 더 몰아치고 세상 속에서 좀 더 빛이 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일 것이다.
"무협영화 한 편만을 보더라도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
비수 같은 구절이다. 어쩌란 말이냐? 황현산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 문장이야말로 내 현실적인 처지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잔인함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자의 슬픔과 번뇌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하수인 나는 아직도 이런저런 복수를 꿈꾸곤 한다. 그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밤이 선생이다>에서 나의 미래에 대한 파편적인 한 단면을 봤다. 꿈을 꿨고 뜨끔했고 좌절했다. 그래서일까? 황현산의 글을 존중하지만 존경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소설가 겸 시인 김도언은 그의 산문집에서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나는 고백컨대 '절대로 욕설을 입에 담지 않는 청소년'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 역시 소년 시절엔 고만고만한 욕설에 길들여져 있는 촌놈이었을 터이나 중학교 2학년 무렵 '장래희망-시인'이 되고부터는 절대로 욕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욕설을 거세했다."
▲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류근 지음, 곰 펴냄). ⓒ곰 |
개쉐이! 조낸 반갑네. 시바. 레알 조또 술이나 마시자. 시바.
문득 궁금해졌다. 연출되지 않은 그의 '욕'은 어떤 것일까?
개새끼! 좆나게 반갑네. 씨발. 니미 좆도 술이나 처먹자. 씨발.
이 정도일까? 아니면 여전히 공손하기 짝이 없는 말투를 지닌 문학청년의 모습일까.
류근은 '김요일 형의 입 돌아가지 않는 옥탑방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김요일 시인은 내 고등학교 문예부 후배이자 문학동인회 '활천'의 후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김요일을 형이라 부르는 류근은 나보다 몇 살 정도 어릴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대를 관통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김요일에게 수십 년 만에 연락을 해서 류근의 '욕'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잠시 일었다. 하지만 그런 행위의 덧없음을 바로 깨달을 정도의 변별력이 아직은 내게 있었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에서 나는 내 과거의 한 단면을 봤다. 대학교 1, 2학년 시절 흑석동에 있던 어느 시집 카페와 혜화동의 유정식당을 주 무대로 이 책 속의 류근의 행적과 엇비슷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1920년 문인을 그리워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대책 없는 삶을 낭만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세상을 향해서 낭만의 목소리도 높이고 냉소도 멋대로 던지던 시절이었다. 그립다. 이 책은 그런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고마운 책이다. 살아있는 화석처럼 우리들의 추억을 건드리는 것이 이 책의 진짜 주제일지도 모른다.
낭만의 지나친 경륜 같은 느낌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냉소의 경륜도 느껴져서 사실은 좀 씁쓸했다. 이 책은 어쩌면 내가 추억처럼 떠들고 다니면서 동경하지만 한편 이젠 그만 안녕이라고 하고 싶은 과거이기도 하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의 생명력은 류근의 사람들에 있는 것 같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가 왜 인기가 있는지 그가 왜 사랑받고 있는지 누구든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이 글보다 사람이 앞서는 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이 책의 생명력이지만 한편 글로서 아름다운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황현산에게서 글의 아름다움을 봤다면 류근에게서는 글의 아름다움을 찾기가 좀 힘들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장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글이 아름다워지기에는 낭만이 너무 넘친다.
도대체 내 페친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두 권의 책을 내게 강력하게 권했을까? 물론 두 책을 권한 페친 층이 정확하게 겹치는 것은 아니다. 류근을 강력하게 추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페친은 최근에 나온 김소연 시인의 시집 <수학자의 아침>(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언급하면서 시는 너무 좋은데 해설을 쓴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열이 받는다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여기서 그 놈은 물론 황현산이다.
<밤이 선생이다>와 <사랑이 내게 말을 거네>를 하나로 엮는, 즉 내 페친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는 예상 밖에도 '홍상수' 하나였다.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혹시 한 권은 '홍상수'고 한 권은 '김기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부끄럽게 느껴지는 영화다. 김기덕의 영화는 내가 미처 접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나의 현실일 수 있는 절박한 영화다. 그래서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성찰의 길로 이끈다. 그런데 읽어보니 두 권 모두 '홍상수'였다.
"여자와 우연히라도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삼가야 한다. 연애에 해롭다.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온갖 찌질한 작업 멘트들이 다 완비돼 있다. 어떠한 창의력을 발휘해도 그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조낸 자괴스럽고 열등감 돋는다. 이미 그 영화를 본 여자에게 자칫 어설픈 멘트를 날렸다간 그 당장에 아류 찌질이로 인이 쳐져 휴거되기 십상이다."
류근은 요렇게 썼고 또 황현산은 이렇게 썼다.
"홍상수 감독은 교수들을 욕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교수들 또는 교수 지망생들에게 뿌리 깊이 스며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속물근성은 그가 찍는 영화의 특별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시각에서 그의 모든 발상법과 추진력이 얻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황현산이 '<강원도의 힘>에는 교수들이 입술을 깨물지 않고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 있다'고 쓴 대목에선 정말 뜨끔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나의 자화상이고 내 페친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들은 '홍상수'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밤이 선생이다>와 <사랑이 내게 말을 거네>도 결국 '홍상수'에서 만났다. 두 사람도 역시 '홍상수'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런 귀결은 내 페친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 <옥희의 영화> 중. ⓒ전원사 |
이제 나의 '올해의 책'을 선택할 시간이다. 후보 소개는 충분했다. 물론 이왕이면 두 권의 공동 수상을 원한다. 하지만 두 권 중 그래도 꼭 한 권만 올해의 책으로 꼽으라면 <밤이 선생이다>를 선택하겠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순간의 느낌의 문제다. 마음이란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니까. 사실 원래 올해의 책 후보로 생각해 둔 과학책이 한 권 있었다. <밤이 선생이다>와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가 문득 내 마음을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마땅히 이 글의 주인공이 되었을 책이다. 하지만 이 글은 이미 끝나가고 있는데 그런 마당에 여기서 차마 그 책의 제목을 밝힐 수는 없으니 짝사랑의 추억으로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한다. 이런 것이 또 인생이 아니던가. 나중에 '응답하라 2013' 같은 글을 쓴다면 그 책을 꼭 밝히고 그 이유를 당당하게 이야기하고야 말 테다. 빛바랜 짝사랑의 고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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