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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이롭게 적응했다!" 그 '종교'를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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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만물은 이롭게 적응했다!" 그 '종교'를 반박한다

"내가 쓴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은 조지 윌리엄스의 <적응과 자연 선택>에 나오는 두어 단락 안에 다 들어 있다. 윌리엄스의 이 책은 진화 이론이 발전하는데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를 깊이 존경한다." (리처드 도킨스, <제3의 문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말이다. 도킨스의 맞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조차 여기에 동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지 윌리엄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특히 <적응과 자연 선택>을 통하여 진화 이론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큰 울림을 지닌 책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제3의 문화>)

사실, 저명한 진화학자들의 저서를 읽다 보면 이들이 자기 책에서 뜬금없이 남이 쓴 책을 격찬하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다윈의 저작 이래 가장 중요한 진화 이론서 중의 하나." (스티븐 핀커, <언어 본능>)

"조지 윌리엄스는 진화 생물학계에 다윈에 비견할 만큼 위대한 혁명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적응과 자연 선택>은 지금도 히말라야 산맥처럼 생물학에 우뚝 솟아올라 있다." (매트 리들리, <붉은 여왕>)


"윌리엄스의 <적응과 자연 선택>은 이제 광범위하게, 그리고 정당하게 하나의 고전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사회생물학자들'과 사회생물학의 비판자들 모두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2판)

워낙 여러 과학책에서 이 책이 언급되기에 국내 독자에게도 그 묵직한 존재감은 상당히 알려져 있었던 책, 조지 윌리엄스의 <적응과 자연 선택>이 번역되었다. 왜 이 책이 그토록 중요한가? 이 책은 '유전자의 눈' 관점, 즉 복잡한 적응은 오직 유전자의 이득을 위해 진화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함으로써, 현대 생물학에 우뚝 솟은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스가 펼친 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적응은 우연히 발생한 이로운 효과가 아니라 과거의 환경에서 적합도를 높이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증거를 통해서만 판별됨을 강조하였다. 둘째, 저자는 적응이 집단이나 군집, 생태계가 아니라 오직 유전자의 이득을 위해 진화함을 입증함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집단 선택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래에서 좀 더 살펴보자.

적응은 설계의 증거로만 판별된다

▲ <적응과 자연 선택>(조지 C. 윌리엄스 지음, 전중환 옮김, 나남출판 펴냄). ⓒ나남출판
이 책의 표지는 물을 막 벗어나서 공중을 나는 날치다. 날치는 얼마 못 가 바닷물로 귀환한다. 그러면 날치가 물로 떨어지는 이 현상은 공기 중에 오래 못 사는 날치를 염려하여 날치가 결국 물에 복귀하게끔 하는 생물학적 적응이 작용한 결과일까? 물론 아니다. 중력이라는 물리학적 원리만으로 왜 공기 중에 떠오른 날치가 결국엔 물속으로 떨어지는지 잘 설명할 수 있다.

생물학자에게 주어진 진짜 문제는, 날치가 결국엔 물로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날치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공중을 날 수 있는가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하늘을 날 수 있게끔 항공 역학적으로 우수하게 설계된 날치의 활강 기제야말로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생물학적 적응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지렁이는 토양에 담긴 식물성 찌꺼기를 섭취하는 행동을 통해 토양의 표층을 잘 섞어주고 공기도 잘 통하게 하고 오염 물질도 제거해준다. 따라서 지렁이의 섭식 행동은 토양을 개선하여 생태계의 균형에 이바지하게끔 설계된 적응일까?

지렁이의 소화계와 섭식 행동을 꼼꼼히 검토해 보면, 이들은 단지 각 개체가 영양을 잘 섭취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능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렁이들이 먹이를 섭취한 결과 토양이 개선되는 것은 지렁이의 섭식 행동이 낳은 우발적인 효과일 뿐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게끔 지렁이의 섭식 행동이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책이 출간된 1960년대 당시에는 모든 형질은 어쨌든 이로우니까 자연 선택되었다는 식의 막연한 설명이 만연했다. 자연 선택이 복잡한 적응을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응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특별하고 번거로운 개념"(27쪽)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이 책은 "적응이라는 개념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논의들에 대한 반론"(34쪽)들로 채워진다. 적응은 물리화학적 불가피함, 발달상의 제약, 또는 역사적 유산과 같은 부산물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언급되어야 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어떤 형질이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득은 우연한 효과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그 형질의 기능(function)임을, 즉 그 형질이 진화적 조상의 적합도를 높여주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되었음을 입증해야만 우리는 그 형질이 적응이라 판정할 수 있다.

적응은 최후의 방편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우연한 부산물로 온전하게 설명을 할 수 있는 데도 불필요하게 적응을 끌어 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수없이 강조하는 윌리엄스의 모습은 사회생물학 논쟁에 관심 있는 우리 사회의 많은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을 따르면, 사회생물학자들은 어떤 형질이 부산물일 가능성은 아예 처음부터 젖혀둔 채 생명체의 모든 형질은 자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적응이라고 맹신하는 적응 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생물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국내의 많은 학자들도 굴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철학자 최종덕은 그의 저서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사회생물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의) 입장은 모든 건 다 적응된 결과라는 거죠. 우리의 형질이나 성격도 적응된 결과이고, 우리의 코가 이렇게 높은 것도, 머리카락 색깔이 검은 것도,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도 생명진화의 적응 결과라는 거예요. 이렇게 전부 적응주의로 진화론을 설명하는 태도죠."

그런데 정작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토대가 된 이 책에서 윌리엄스는 적응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써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굴드와 르원틴이 이 책 같은 1차 문헌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서 섣부른 비판을 감행했다는 것, 그리고 국내에서 사회생물학 비판자를 자처하는 학자들도 그 잘못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적응은 유전자의 이득을 위해 진화했다

모든 형질은 어쨌든 이로우니까 자연 선택되었다는 설명은 쉽고 편하다. 개체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을 듯한 형질이라도 그 형질이 집단, 종, 군집, 생태계 등에서 어느 한 단위에는 이득을 주는 이야기를 쉽게 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1960년대 당시에는 "복잡한 적응은 무엇의 이득을 위해 진화했는가?", 달리 말하면, 유전자, 개체, 개체군, 종, 군집, 생태계 등의 여러 조직화 단위들 가운데 자연 선택이 일어나는 단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논의가 없었다.

어떤 적응은 개체의 이득을 위해서, 또 다른 적응은 종의 이득을 위해서 만들어진다는 중구난방 입론이 무성했다. 예를 들어,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개들이 서로 싸울 때 상대방을 굳이 죽이지 않는 까닭은 종의 보존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물론 로렌츠는 개의 다른 행동들, 이를테면 배고프면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행동은 개체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적응이 집단의 이득을 위해 진화한다는 집단 선택설이 왜 잘못되었는지 예를 들어 보자. 한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상당수의 레밍들이 물에 뛰어들어 죽는 모습이 미국에서 방영되었다. 이는 개체수가 급증하여 먹이가 부족해졌을 때 다른 레밍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한 이타적인 자살이라고 풀이되었다. 정말 그럴까?

여기 두 레밍을 생각해 보자. 한 레밍은 이타적이어서 먹이가 부족해지면 주저 없이 물에 몸을 던진다. 다른 레밍은 얌체여서 남들이 자살해준 덕분에 풍부해진 먹이를 양껏 먹고서 많은 자식을 남긴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행동을 만드는 유전자의 운명은 어찌 될까? 아무리 이 유전자가 종 전체로 보면 이득일지라도, 얼마 못 가서 이 유전자는 제거되고 말 것이다.

이 책은 복잡한 적응은 집단의 이득을 위해 진화했다는 집단 선택설을 논파하고 자연 선택의 합당한 단위는 유전자임을 논증한다. 최후의 방편으로 적응을 들먹여야 할 때조차, 그 적응은 개체군 내에서 서로 경쟁하는 대립 유전자 간의 선택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는 것이다. 선택의 단위가 유전자라는 인식은 이 책에서 암묵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나중에 도킨스에 의해 체계화되어 '이기적인 유전자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초판(1976년) 서문에서 윌리엄스를 포함한 네 과학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아이디어에 자신의 책이 크게 빚지고 있다고 명시했다. 유전자의 눈 관점에서 진화를 해석하는 신다윈주의는 오늘날 생물학계의 지배적인 이론 틀로 자리 잡아 수많은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생산하고 있다.

인간 본성, 집단 선택론 그리고 [적응과 자연 선택]

▲ 조지 윌리엄스. ⓒen.wikipedia.org
원저가 1966년에 나왔으니 너무 늦게 한국어로 번역된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을 번역한 나로서는 이 번역서의 출간이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시의적절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이 가장 중요하게 이바지한 논제인, 자연 선택의 단위와 집단 선택의 효용을 놓고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2010년,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에드워드 윌슨, 이론 생물학자 마틴 노왁과 코리나 타르니타는 개미와 꿀벌에서 발견되는 진사회성이 집단 선택에 의해 진화했으며 유전자의 눈 관점에 입각한 포괄 적합도 이론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는 논문을 <네이처>에 실었다. 이에 대해 전 세계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무려 154명이 반박 논문을 같은 잡지에 실었다.

윌슨은 굴하지 않고서 2010년 논문의 내용을 담은 저서 <지구의 정복자>를 지난해 출간했다. 이번 주에 우리나라에도 번역서가 나온 <지구의 정복자>(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윌슨은 자신이 공저한 논문에 대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전문가들이 합심하여 반박 논문을 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적응과 자연 선택>의 옮긴이 해제에 선택의 단위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에 대한 해설을 담았음을 밝혀 둔다.)

윌슨을 필두로 '새로운' 집단 선택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도덕, 사회, 역사, 종교 등 인간사에 대해서도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인간의 도덕, 특히 이타성은 집단과 집단이 맞붙는 경쟁에서 유래한 적응이라는 것이다. 윌슨이 이렇게 말한다.

"한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이타적인 개인들을 이긴다. 그러나 이타적인 개인들의 집단들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들을 이긴다."

심지어 종교도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공유된 믿음이 집단의 결속을 공고히 한 덕분에 만들어진 적응으로 설명된다. 이들의 주장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선택의 단위 논쟁의 시초가 된 명저 <적응과 자연 선택>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맥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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