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박경석 지음, 책으로여는세상 펴냄). ⓒ책으로여는세상 |
사실 이런 생각이 우리로서는 훨씬 이해하기 쉽다. 바르트처럼 실제로 죽을 용기까지는 없어도, 큰 사고를 당한 경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경험이고, 나로서도 충분히 미루어 체험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책으로여는세상 펴냄)의 저자 박경석 또한 그랬다고 한다. "사고 후 나는 5년 동안 내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나 자신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 스스로 갇혀 사는 것을 택했다."(23쪽) 그런 삶이 싫어서 바르트처럼 죽고자 했고, 그래서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수면제와 소주를 먹고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이 없었고, 그 돈을 모으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 그를 죽음을 향한 기분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 5년을,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장애인 동료들과의 삶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 삶으로 말려들어가게 되면서 '더 행복한 삶'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장애인의 삶이 행복한 삶과 반대방향에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에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은 적어도 내게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다. 예전에 그가 '교장'으로 있는 노들야학에서 강연을 할 때, 강연을 듣던 한 분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장애로 인해 불편한 이 신체로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묻는 간절한 질문이었다. 이런 간절함에, "자유란 구속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능력"이라는 대답이 얼마나 공허한 것일까 싶어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얼른 눈을 돌려, 그 옆에 앉아있던 박경석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께선 장애인이 아니던 때와 장애인이 되어 활동하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자유롭다고 느끼시나요?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우스워질까 싶었던지, 옆으로 돌려 익살 섞인 대답을 했지만, 요지는 분명했다. 장애인인 "지금이 더 자유롭다"고.
이런 점에서 박경석은 <오체불만족>(전경빈 옮김, 창해 펴냄)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와 어떤 대칭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오토다케는 손과 발이 모두 미발달인 채 '몸에 달라붙어 있는' 장애인인데, 그의 책을 읽어보면 어려서부터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서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나는 그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의 '행복'을 믿는 게 쉽지 않았다. 단지 그럴 수도 있나 하는 놀라움만 갖고 읽었을 뿐이다.
태생적인 중증장애인과 멀쩡하던 신체를 잃고 중증장애인이 된 이, 어쩌면 정반대라고 해야 할 두 사람 모두 통상의 '정상인'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에겐 삶의 행복이란 무언지에 대해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장애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정상인'일 때보다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앞서 인용한 문구는 그 비밀을 엿보게 해준다. 장애인이 된 그를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행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장애인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자신이 장애인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정말일까?
이 말을 이해하려면, 장애인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한다. 단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단지 부정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닐 게다. 그거야 다친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장애인임을 받아들인다 함은, 장애인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결함이나 불행의 원천이 아니라 자기 삶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출발점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날개가 없어 하늘을 날지 못한다는 것을 신체적 결함으로 한탄하지 않는다. 그걸 한탄하기 시작하면, 포유류인 우리는 누구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그걸 받아들이고, 그런 신체로 사는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경우 날개가 없다는 사실로 인해 불행해질 이유는 없다. 날개 없는 신체의 긍정, 그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은 아닐지언정, 행복한 삶의 출발점임은 분명하다.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는 자신이 장애인임을 받아들일 수 없던 저자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스스로를 집에 가둔 생활에서 간신히 벗어나 직업훈련원에 나갔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을 통해 새로운 걸 얻었으며, 대학을 다시 들어가고 번듯한 직업도 얻게 되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중증장애인 야학 교사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결국은 교장을 자처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리고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투쟁이나 장애인 수용'시설'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등등이 간결하고 익살스런 어투로 아쉬울 정도로 빠르게 펼쳐진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가 자신이 장애인임을 긍정하게 되었을 때, 박경석이 겪었던 불행한 '사고'는 그의 인생을 이전과 다른 것으로 만들어놓은 결정적 '사건'이 된다. '사고'를 '사건'으로 바꾸어놓는 이런 긍정의 몸짓이, 끊임없이 투쟁의 현장에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웃음이 넘치게 하고 그의 삶에 활기를 부여하는 것일 게다. 바로 그것이 그로 하여금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고 말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가 '장애인이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장애인만이 아니라 삶을 행복하고 살고자 하는 모든 이에 대한 책이라고 확신한다. 하체를 쓸 수 없게 된 이마저 이토록 행복하게 살고 있음에 비해, '멀쩡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그렇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있음을 안다면, 이런 사례의 특이성이 갖는 '편차'는 오히려 그것이 갖는 일반성의 폭을, 설득력의 강도를 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말 또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은 '장애인이 쓴 책이기 때문에' 비장애인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이유는, 무엇보다 장애인의 삶은 우리의 삶에 아주 가까이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려하는 이의 눈에조차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이든 한국이든 대부분의 나라에서 장애인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3~17% 정도 된다. 열 명 중 한두 명이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탄 지하철을 둘러보거나 여러분이 걷고 있는 도로를 둘러보라. 한 명의 장애인을 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통계적 비율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 보이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시설에 갇혀 살아서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에 있어도 한 달에 외출하는 날이 다섯 번도 되지 않아서다.
무엇이 외출하지 못하게 하는가?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문턱들? 물론이다. 그런데 이 책에 실려 있듯이, 활동보조인이 되어서 장애인과 함께 지하철을 함께 타보기라도 하면 장애인과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시선이 지극히 곤혹스럽고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지만, 불행히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때론 기이한 존재를 보듯 때론 불쌍한 존재를 보듯 별스러운 시선을 던진다. 그 시선이 장애인을 집안에, 구석에 숨게 만든다. 보이지 않게 만든다.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더욱더 그들을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의 이동을, 그들의 삶을 가로막는 문턱 또한 보이지 않게 된다. 문턱은 점점 높아져 간다. 이렇듯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에, 모두들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 영화 <도가니>(2011). ⓒ삼거리픽쳐스 |
이것만은 아니다. 장애인이 '장애인보호시설'에 산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노동과 착취, 폭력과 성폭행마저 횡행하는 끔찍한 시설들이 있음은 이제 조금 알려졌다. <도가니> 같은 영화도 있지만, 무엇보다 '에바다'와 같은 끔찍한 시설의 '시설자본가'들과 싸워야 했던 장애인 자신의 투쟁이 그나마 그런 사실들을 보이게 했다.
그러나 더욱더 난감한 것은 그렇게 끔찍한 시설만이 아니라, 별 문제 없이 돌아가는 시설에서의 삶 또한 살기 힘들다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저자 박경석은 뒤에 다른 이들의 글을 약간 실어놓았다. 그 중 하나, '내 삶의 터닝 포인트, 노들야학'이라는 '사건적인' 제목이 붙은 글의 저자는 몇 번이나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 이유는 가족이나 좋아하는 이들을 만날 수 없어서, 또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먹고 자는 일만 반복"하는 삶, "매일 똑같고 지겨운" 그 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261~62쪽).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이런 사실은, 끔찍한 시설을 개선하고 좋은 시설을 제공하면 될 거라는 비장애인의 믿음이 얼마나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그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이처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할 때에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타자성'이라고 명명한다. 데리다는 '정의'란 이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하고 예측이나 계산이 안 되는 것을 예측하고 계산하려는 태도라고 말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알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자, 다시 한 번'하며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을 빌어 말하는 동정의 윤리학이 되어선 안 된다고, 이 책은 강한다. 장애인의 처지에서 무엇보다 불편한 게 바로 그 동정과 연민의 시선이라고. 자신들은 특별한 동정과 연민을 달라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이동하고 동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고, 그걸 가로막는 문턱들을 제거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활동보조인'처럼 그걸 가능하게 해줄 조건들을 제공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동정과 연민의 윤리학이 아닌, 상이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이들의 우정의 연대를 제안하고 있다 할 것이다. 노들야학처럼 장애인이 있는 공간에서는 비장애인 활동가가 밥을 먹는 것도, 밥 먹었냐고 묻는 것도 매우 힘들다는 '고백'은, 그런 연대가 필경 봉착하게 될 난점에까지 눈을 돌리게 한다. 그 연대의 제안은 받는 것만큼이나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음을 짐작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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