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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첫사랑을 '다시' 만날 타이밍, 지금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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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첫사랑을 '다시' 만날 타이밍, 지금은 아냐!

[마녀의 '도서관에서 쓰는 편지'·마지막] 내 첫사랑에게

꿈을 꾸었어요. 당신 꿈. 무언가를 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내게 미소 짓는 꿈. 그 다정함에 나도 모르게 벙싯거리다 깨고 말았어요. 다시 눈을 감았지만 한 번 깬 꿈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마음이 늦가을 숲길을 걸을 때처럼 아련해지더군요.

당신을 꿈에 보기는 퍽 오랜만이에요. 하나 왜 이런 꿈을 꿨을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어요. 꿈의 첫째 기능은 소망 충족이라고, 내 얼굴보다 스마트폰을 더 열심히 오래 들여다보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그렇게 해소한 것임을 알기에. 당신은 오래 전에 헤어진 여자의 꿈에서 대타 노릇을 하는 게 한심하겠지만, 나 역시 그토록 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첫사랑의 기억에 의지하는 자신이 한심합니다. 하기야 몇 해 전엔 한 달에 한두 번씩 꿈을 꾸는 것으로도 모자라 실제의 당신을 보겠다고 맘먹은 적도 있으니 그때에 비하면 그나마 철이 든 셈일까요.

그래요, 지나서 말이지만 한때는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당신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구체적인 작정은 없었지만, 내가 내 자신에게도 감춘 그 속내야 빤한 것. 이루지 못한 사랑을 늦게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지요. 한데 자칫 커다란 후회로 남았을지 모르는 남우세스러운 소망을 마음에만 남기고 실천하지 않은 것은 일 벌이기 싫어하는 게으른 성정과 더불어 한 생각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내가 왜 오래 전에 끝난 사랑에 새삼 연연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다가 떠오른 생각으로, 어쩌면 이 미련의 바탕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망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미련(未練)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찾는 것은 기실 잃어버린 젊은 날의 그 시간을 찾고 싶은 불가능한 원망의 반영일지 모른다는 것이었지요.

그 생각이 들자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하더군요. 이런 것이구나, 나이가 든다는 건,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사랑을 잃고 시간을 잃고 그리하여 다가올 시간에 대한 어떤 염원도 품지 못한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늙음을, 끝이 보이는 내 시간을 실감했지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김창석 옮김, 국일미디어 펴냄)를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것이 그때입니다. 무엇보다 제목 때문에, 그 소설을 읽으면 과거에 매인 내게 뭔가 도움이 되려니 싶었지요. 그러나 전체 분량이 열한 권에다, 문장 하나가 보통 다섯줄이 넘는 -때론 한 페이지가 넘기도 하는, 이 어마어마한 장편소설을 읽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째 권의 삼분의 이까지 읽다가 그만 책장을 덮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때만 해도 내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추억하며 자기연민의 달콤 씁쓸함에 취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마디로 아직 충분히 늙지는 않았던, 아직 충분히 시간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고나 할까요.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2>(전 11권,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국일미디어 펴냄). ⓒ국일미디어
그러나 이번엔 달랐어요. 당신 꿈을 꾸고 며칠 뒤 다시 그 긴 소설을 붙잡았는데, 몸이 아파서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했기 때문일까요. 이번엔 도무지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프루스트의 동생이, "사람들은 매우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그 소설을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고 개탄했다더니 과연 그 말 대로였어요. 도무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프루스트의 통찰력에 질리고, 냉정한 외과의보다 더 가차 없이 자신의 내면을 해부하는 작가의 메스 같은 펜을 지켜볼 수 없어 책장을 덮었다가도 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다시 펼칠 수밖에요.

그렇게 2주일 내내 한 인간이 스스로를 표본 삼아 인간의 허영과 환상, 욕망과 이기심을 날카로운 칼날로 찢고 가르고 헤집는 것을 속수무책의 심경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먹었어요. 당신을 찾아나서는 대신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편지라 해도 그것은 당신을 오매불망하며 매일 밤 일기장에 편지를 썼던 그 시절에 그랬듯, 당신을 수신인으로 삼지만 당신에게 읽힐 마음보다 쓰는 내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이 되겠지요. 그게 무슨 편지냐고, 수신인을 배려하지 않는 편지는 편지가 아니라고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조차 그 사람보다도 죽을 것 같은 내 마음에 연연하는 것이 사람이고 보면 사랑에서 비롯된 편지가 자기중심적인 건 당연하지 않은지요.

한때는 내게도 "사랑이 실현 가능한 실체처럼 생각되던 시절"(4-400)*이 있었어요. 오직 그 사람이라서,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가치와 덕성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나는 "(사랑할 때) 중요한 것은 상대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깊이"라는 프루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요. 당신을 사랑하던 그 시절이라면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건 단지 그녀에게 우리 영혼의 상태를 투사하는 것뿐"(4-269)이라 했던 프루스트를 비웃거나 동정했겠지만, 이제 나는 헛된 믿음일망정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때의 내가 그립습니다.

당신에게 첫눈에 반한 순간부터 당신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그 날까지, 아니 그 뒤로도 오래, 당신과 함께 걷던 거리를 지나도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당신을, 남들은 모르는 당신의 아름답고 특별한 영혼을 이해하고 사랑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남다른 내 사랑을 알기에 언젠가는 나를 그리워하리라 믿었습니다. 아마도 그리 믿었기에 당신을 만나겠다는 당찬 포부도 가능했겠지요.

그러나 시간은 믿음을 흔듭니다. 섣달 그믐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새해 첫날을 기다렸던 어린 날과 달리 "더 이상 새해를 믿지 않기"에 1월 1일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늙은이처럼(4-89), 더 이상 특별한 날도 특별한 사람도 갖지 못한 나는 이제 당신에 대한 헌신적인 내 사랑이 실은 대상에 헌신하고 싶었던 내 욕망이 아니었는지 의심합니다. 그 헌신적인 사랑 때문에 당신이 떠났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대상이 된다는 게 즐거움만은 아니니까요.

기억하는지요? 연구소에서 세미나가 있던 날 당신은 시간이 되면 근처 정류장에서 기다리마고 했지요. 기대는 안 했지만 혹시나 싶어 끝나고 길 건너편에서 보니 당신은 없었고 나는 사람들과 뒤풀이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다음 날 당신은 거기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고 투덜거렸어요. 한 시간이나 길에서 떨며 기다리는 그런 애정을 당신에게서 받는다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던, 그래서 정류장에 있는 당신을 보고도 당신이 아니라 여겼던 나는 말문이 막혔지요.

▲ <스완네 쪽으로>(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인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사실 그것은 기쁜 일이었어요. 기다리는 건 늘 내 몫이라 여겼는데 처음으로 당신이 나를 기다렸으니까. 한데 나는 기쁘기보다 당혹스러웠어요. 나는 주고 당신은 받는 관계만 상상하다가 내가 대상이 되니 낯설었지요. 프루스트는 "기쁨은 사진과 같다"고 했지요. (<스완네 쪽으로>(김인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583쪽) 그 말대로 나중에 혼자 그 일을 돌이켜 보면서 그제야 기쁨을 느꼈습니다. 허나 프루스트가 첫사랑 질베르트가 안겨준 "그 많은 자질구레한 기쁨을 그 자체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을 계단으로, 즉 한 층 한 층 올라가면 머지않아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계단으로만"(2-316) 여겼던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상상하고 기대한 사랑에만 사로잡혀 홀로 나아가느라 당신이 준 기쁨에 만족하는 대신 그 다음을 상상하며 다시 애가 닳았지요.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진저리나게 보여주는 것처럼,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자신이 가진 이미지, 그 환상에 붙들려 그것을 완성하기에 급급하지요. 그리고 환상이 실현되지 않으면 깊은 좌절감과 함께 배반감을 느끼며 쓸쓸해해요. 하긴 쓸쓸한 것이 어디 사랑뿐인가요. 피로 맺어진 가족도 공들여 사귄 벗도 따지고 보면 모두 각자의 욕망과 한계에 따라 움직일 뿐,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보다 지독한 환상은 없는 것 같아요.

문득 한 친구가 떠오릅니다.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데도 주위 사람들까지 동원해 만나자고 끈덕지게 연락하는 친구가 있어요. 오래 전 자신의 고민을 하염없이 들어주던 착한 친구로만 나를 기억하는 그를 보며 심란해 했는데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싶어요. 당신을 보고 싶다는 마음속에는 당신도 나를 보고 싶어 하리란 환상이 있었으니. 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 내 기억, 내 바람, 내 원망에만 매달려 상대도 그러려니 믿을 때 관계는 폭력이 되고 말지요. 그러므로 지나간 인연은 지난 대로 두어야 하고 인생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새길 밖에요.

그래요, 나를 속이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환상을 걷고 실상을 봐야 해요. 그러나 "멀리서 아름답고도 신비롭게 보이는 사물과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이 아름다움도 신비도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실존의 문제를 푸는 한 가지 방법"(4-423)이라 해도, 그것은 프루스트도 인정했듯 우리를 "죽음에 인종(忍從)시키기"는 해도 삶을 누리게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쓸쓸한 진실을 마음에 새기고도 경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에 감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지요. 아니, 내게는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할 지경입니다. 사랑이란 환상을 잃어버린 지금, 아무 환상도 없이 남은 생을 어찌 견뎌야 할까요?

당신도 알 거예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들렌 이야기. 어느 날 프루스트는 마들렌을 녹인 차 한 모금을 마시고 깊은 희열을 느끼지요. 그 맛이 불러일으킨 추억을 통해 그는 "초시간적인 존재"로서 "미래의 무상(無常)을 걱정하기 않게"(11-256) 되었기에, "삶의 부침이란 나와 무관한 것이 되었고, 삶이란 재앙은 무해한 것이 되었으며, 삶의 덧없음은 허구의 것이 되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고 우발적이고 소멸할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1-89)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하는 힘을 가진" 이 '기적'은 지식도 사랑도 아닌 예술로만 가능함을 깨닫지요. 그리하여 그는 사랑과 우정에 실망하고도 환멸에 사로잡히는 대신, 평생을 바쳐 문학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추적하고 마침내 그 시간을 되찾기에 이릅니다.

과연 내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까요? 지금의 이 절망과 환멸을 떨치고 온 생애를 걸 나만의 '예술'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간절히 원한다면,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에 절망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프루스트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면, 언젠가 기적이 일어날 지도 모르지요. 설사 기적이 안 일어나도, 적어도 내가 몰랐던 내 자신의 또 다른 심층을, 내 안에 숨은 또 하나의 나를 만날 수는 있겠지요. 간절히 사랑함으로써 내 환상만이 아니라 내 영혼의 심층에 가닿을 수 있었던 언젠가처럼.

그날이 오면, 그때야말로 당신을 보고 싶네요. 환상 없이 투명한 시선으로 당신이란 사람을 보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날까지 부디 생의 활력이 늘 당신에게 함께 하기를!

*인용문은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어 완역본인 김창석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되, 김인환이 옮긴 <스완네 쪽으로>(문예출판사, 2011)와 이성복 지음,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문학과지성사, 2004), 지주형이 옮긴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생각의나무, 2005)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필자>

2012년 10월부터 2013년11월까지 매달 한 번씩 총 열다섯 번, 독자 여러분에게 '특별한 편지'를 보내왔던 김이경의 '마녀의 도서관에서 보내는 편지(도서관 편지)'는 이번 글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소설가와 독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다양한 글쓰기와 독특한 연재를 시도하는 필자 김이경을 앞으로도 응원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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