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흔히 동네 병원(의원) 살리기라고 하는 '1차 의료' 강화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했다. 이유는 여럿이지만, 워낙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히 당사자 모두가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해 오던 것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했다(경로 의존성).
물론 사정이 이렇다고 더 좋게 고치기를 멈출 수도 없다. 동네 의원이 문을 닫거나 중소병원의 경영이 어려워지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결국 손해가 일반 시민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1차 의료의 위축과 후퇴는 사회 전체적으로 더 많은 비용과 더 낮은 질의 의료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법은 근본적이고 추상적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탁상공론이란 비판을 무릅쓴다고도 했다. 핵심은 시민과 환자의 관점을 회복하자는 것. 평범한 시민과 환자의 시각으로, 그리고 시민이 참여하는 가운데에, 1차 의료의 가치와 방법을 다시 찾아야 한다.
약속한 대로 구체적 방법의 실마리라도 내놓아야 할 차례이다. 우선 대중이 동네 의원(1차 의료)을 믿을 수 있게, 신뢰를 쌓고 또 회복하는 것이 출발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주장은 거의 전적으로 동네 의원과 의사를 향한 것이다.
물론, 정부와 환자는 가만히 두고 우리만 압박한다고 불만이 많을 것이다. 국민건강보험 수가 문제를 비롯한 '숙원'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아예 판을 다시 짜지 않는 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수가 없다.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란 뜻이 아니라, 변화를 불러 올 수 있는 출발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위기의 당사자가 나서는 것이 가장 빠르다. 대중과 환자에게 기대하기 위해서는 더 기다려야 한다. 정부와 국가도 아직은 덜 급하다. 물론, 1차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이 흔히 갖는 어려움과 좌절을 이해한다. 많은 환자들이 잘못된 근거와 정보로 동네 의원을 믿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네 의원에서 얼굴을 맞대는 의사들은 믿으면서도 사회 전체로는 불신의 수준이 높은 것도 한 가지 특징이랄 수 있다. 1차 의료가 정책과 제도, 경제의 문제이면서 또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임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지만, 환자를 비난할 수 없다. 한국만의 현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환자들의 기대와 만족,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전체 사회가 만들어내는 종합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 장비, 그리고 최고, 첨단, 최신에 노출되어 있는 한, 그런 의료와 의학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은 어렵고 지루한 싸움을 통해 '믿음'과 '권위'의 토대를 만들어가야 한다(물론 긍정적 의미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폴 스타가 쓴 유명한 책 <미국 의료의 사회사>(이종찬 옮김, 의료정책연구소 펴냄, 2012년)에는 '문화적 권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미국의 의사들이 지금과 같은 권력과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19~20세기를 통해 문화적 권위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사들은 대중의 신뢰와 여론을 얻기 위해 과학으로서의 의학과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내세웠다. 또, 20세기 초까지도 돌팔이와 저질 의료를 몰아내기 위해 조금 전까지의 내부와 싸웠다.
일단 문화적 권위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의사들이 권력과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의료의 시장이 만들어지고 의사들은 독점적 지위를 얻는다.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과 경제적 지배를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극단적인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미국 의사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들이 어떻게 독점을 강화하게 되었는지는 일단 접어 두자. 사실상 '무정부적' 의료 공급 구조에다 강력한 경로 의존성을 가진 한국의 1차 의료가 그 무엇이라도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다른 나라 역사인들 어떠랴.
▲ 왜 동네 병원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가? 지난 2007년 3월 21일 의료법 개정 반대 집회를 이유로 휴진한 동네 의원. ⓒ연합뉴스 |
이제 우리 사회에서 문화적 권위가 조금이라도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1차 의료가 대중과 환자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 한에서다. 대중이 겪는 고통을 기초로,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틀과 내용의 의료가 출발점이다. 여기에는 1차 의료의 사실과 가치 이외에도 신뢰를 얻기 위한 정치적, 사회적 과정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좀 더 구체적 방안으로 다시(!) 주치의 제도를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문화적 권위(그리고 그에 따르는 사회적 신뢰)는 떠다니는 말만 가지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국의 의사들은 의사 면허와 의과 대학의 대대적 정비를 통해 양질의 의료에 상징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중이 인정하는 권위를 쌓았다.
지금 한국 땅에서 주치의 제도는 '괜찮은' 1차 의료를 상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화적 기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이 제도는 제도가 아니라 '담론'이라 해야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고 싫음이 갈릴 수 있다. 정책으로도 현실성과 가능성을 더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1차 의료가 가질 수 있는 문화적 권위의 가능성으로는 다른 대안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 말조차 생소한 것이 현실이라면, 그 무엇으로 대중의 관심과 열의, 그리고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주치의 제도가 가진 사회적, 문화적 자본은 엄청나다. 여기서 상세한 정책까지 새로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것이 있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어떤 방안과 방법도 미리 정해진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다만, 폭과 깊이는 훨씬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약간의 인센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부분적 정책이 아니라, 의료 이용과 공급의 전체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수준까지 나갈 필요가 있다.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말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한창 진행 중인 '종합 1차 의료 주치 기관(메디컬 홈)' 제도 같은 것을 참고로 삼으면 좋겠다.
(☞관련 기사 : 미국의 Patient-Centered Medical Home(노현승, <정책동향> 2013년 7-8월호, 63~72쪽,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펴냄))
아울러, 1차 의료의 관점에서는 폴 스타의 문화적 권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한 가지를 되새기는 것이 어떨까 싶다. 대중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길고 어려운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를 스스로 도려내는 것은 물론 '외부'와의 싸움도 피할 수 없다.
초점은, 적어도 내용으로는 1차 의료의 '질'에 집중된다. 물론 그것을 보는 눈은 다양하고 때로는 모호하다. 과학적, 의학적으로는 인식의 격차와 오해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의 시각을 받아들이든 그것을 바꾸든, 질을 중심에 놓고 접근해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정부의 책임, 제도와 정책은 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1차 의료의 신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다. 주치의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와 정책의 설계가 보완 이상의 역할을 한다.
정부 정책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환자들이 1차 의료와 동네 의원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1차는 1차대로 3차는 또 그대로 민원과 불만을 해결하는 차원으로는 곤란하다.
질과 효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미룰 수 없는 사회적 과제다. 그 중심에 1차 의료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더 '깊은' 주치의 제도는 병원과 3차 병원의 기능과 구조 개편도 동시에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1차 의료를 개혁한다는 것은 곧 의료 전체를 바꾸는 출발이다.
1차 의료를 바꾸지 않는다고 모든 의료가 허물어진다는 예측은 분명 지나치다. 금방 의료 재정이 파탄 나고 가계가 빚더미에 올라설 리도 없다. 그러나 비용과 질 측면에서, 특히 보통 사람들과 서민들이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동네 의원과 환자, 심지어는 대학병원조차 같이 힘들어 하는 지금, 혹시 1차 의료 개혁의 적기는 아닐까? 힘들다고는 하지만, 대학병원은 그래도 살아남을 것이다. 환자들은 덜 급하고, 게다가 여전히 미심쩍어 한다. 그렇다면, 동네 의원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을까.
역사에 없었다고 지레 가능성조차 막을 수 없다. 새로운 움직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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