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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 사람 만나면 절망을 느낀다…"대체 어떻게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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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 사람 만나면 절망을 느낀다…"대체 어떻게 살지?"

[마녀의 '도서관 편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게

지금 내 앞에는 당신의 사진이 있어요. 커다란 가면을 들고 은밀하게 미소 짓는 얼굴, 허공을 응시하는 반짝이는 눈, 담배꽁초를 든 매니큐어 칠한 손, 흑백사진 속 당신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그런데도, 이상하지요? 내 어머니보다 더 늙은 당신이 친한 선배처럼 느껴져요. 이제는 투정도 의지도 할 수 없게 된 늙은 어머니가 아니라 기대어 울면 가만히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큰 나무 같은 언니, 성님처럼. 그래서 여린 가지에조차 의지하고픈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눕고 싶어요. 쉼보르스카, 당신이라면 영문 모를 내 눈물로 무릎이 차가워지더라도 왜 우냐고 캐묻거나 울지 말고 즐겁게 살라고 충고하지는 않겠지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왜들과 반론을 허락지 않는 충고들에 외로워진 내 마음을 당신은 알 테니까요.

언제부터였을까요, 당신을 알 것 같은 이 마음은. 어쩌면 당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읽었을 때, 일흔셋의 당신이 "나는 모르겠어"라는 말을 높이 평가한다며, "시인이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부터였는지도 몰라요. 혹은 산길을 오르다 말라죽은 지렁이를 보고 죽은 딱정벌레에 대한 당신의 시구를 떠올렸을 때, "감각이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린 채" 죽어 있는 벌레를 조문하며,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모조리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위에서 내려다본 풍경')는 시구에 낯을 붉혔을 때부터였는지도.

그것이 언제였든 당신은 밀물처럼 내 마음으로 들어왔어요. 나는 젖는 줄도 모르고 당신에게 젖어들었지요. 시간이 흐르고,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 나날들이 길어질수록 더욱 당신에게 의지합니다. 읽을 만큼 읽고 살 만큼 살았는데도 아는 것은 적어지고 두려움만 커지는 나를 당신에게는 부끄러움 없이 보여줄 수 있어요. 당신은, 그럴 거면 책은 왜 읽고 고민은 왜 하냐고 비웃는 사람들과 달리 이렇게 말한 사람이니까요.

지금껏 운명은
내게 자애로웠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꾸만 뭔가와 견주고 싶어 하는
내 열망이 거세당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이것은 내가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리 속에서' 부분)


▲ <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여든이 되어서도 '뭔가와 견주고 싶은 열망'을, 그 열망에 따르기 마련인 불만 혹은 불안을 기꺼이 감당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보다 의구심을 택한 당신에게서 나는 희망을 봐요. 어쩌면 나도 당신처럼 늙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나로선 감히 꿈꾸기도 민망한 희망이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를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선 꼭 필요한 희망이지요.

물론 당신은 "선한 인간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인간은 선하지 않"은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희망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리고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보면 희망이 떠올라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쓰는 시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시를 썼고, "인간은 본래 천성적으로 슬픈 존재"라 믿으면서도 "나 그 존재를 기다리며 벌써부터 기쁨에 젖는다"('미소')며 기꺼이 슬픔을 긍정한 강한 영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당신은 슬픔을 긍정했어요. 그게 얼마나 나를 위로하는지. 당신이 '통계에 관한 기고문'에서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일흔일곱… 불빛도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여든셋(지금이건, 나중이건)"이라고 쓴 걸 보고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 시를 읽던 날, 상담사는 심리검사지를 훑어보며 내게 물었어요. 왜 슬픈가요? 나는 그녀의 젊고 건강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슬픔이 병적 증후가 되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또 물었어요. 피하고 싶은 것이 허무라고요? 무슨 뜻이지요? 왜 허무예요? 만약 그때 당신의 시집이 있었다면 책을 펼쳐 그녀에게 시를 읽어줬을 거예요.

'무(無)'의 의미는 다른 이들에게 그렇듯 내게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인식되어졌다.
철저하게 반대로 각인되었다.
저세상에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
머리부터 발끝 사이 어딘가에 나는 존재했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기억조차 못하는 채로.

오, 이곳에서 만난 사람이여, 이곳에서 내가 사랑한 사람이여,
그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나는 막연히 상상해본다.
이곳에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공허를 감내해야 했을지.
이곳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
저곳에서 얼마나 오랜 적막이 이어졌을지
이곳에서 괭이밥나무가 작은 잎사귀 하나를 피우기 위해
저곳에서 얼마나 황량한 황무지가 펼쳐졌을지.
한 줄기 햇살은 암흑에 대한 보상이고,
한 방울의 이슬은 기나긴 가뭄의 대가이거늘!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는 지금 네 옆에 서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 * * '무(無)의 의미는…'' 부분)


마지막 시구가 입을 떠나고 우리는 시의 여운 속에서 마주보고 웃었을지도 몰라요. 벌레 한 마리 한숨 한 번조차 예사롭지 않은 이 삶에 놀라서 우리는 마주보며 웃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래야 했을 거예요. 한 사람은 병증을 찾아내고 한 사람은 감추려 애쓰는 숨바꼭질을 하는 대신 함께 시를 읽으며, "마침표가 늘 따라붙는 인생"이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얘기하면 좋았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겐 시가 없었고, 그녀와 나는 서로에 대해 미심쩍어 하면서 헤어졌지요.

언젠가부터 그런 만남들이 거듭됩니다. 같은 언어로 말해도 내 말은 그의 귀에 닿지 않고 그의 말은 내 마음에 통하지 않아서 만날수록 외로워지는 시간들이 이어집니다. "어깨를 짓누르고" "심장을 무겁게 만들고" "발아래서 산산이 부서지기도"('현실') 하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사람을 찾지만 그 사람이 오히려 절망이 되어 결국은 사람에게 의지하려던 스스로를 탓하고 맙니다. 아, 그러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부분)


이 대목을 읽다가 나는 목이 멨습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 하나만이 아니며 그게 그렇게 한심한 짓도 아니란 것을 확인한 듯해 안심이 되었지요. 그리고 늙도록 그 물음을 놓치지 않은 당신을 보며 회의와 불안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생의 활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신이 아니라 의심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 당신을 지치지도 머물지도 않고 계속 나아가게 한 힘이란 것을 알았지요. 그러자 기운이 좀 났습니다. 회의와 불안, 질문이라면 나도 남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16인의 반란자들>(사비 아옌 외 지음, 정창 옮김, 스테이지팩토리 펴냄). ⓒ스테이지팩토리
그렇지만 에스파냐의 문학기자 사비 아옌이 당신을 인터뷰하고 썼듯이, 과연 내가 당신처럼 여든셋이 되었을 때도 "짓궂은 계집애"처럼 웃을 수 있을까요? 당신처럼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삶을 매력적인 어떤 것으로 변질시킨다"고, 그래서 "삶이란 정말 풍요롭고, 모든 것은 다양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때도 여전히 펜을 들고, "어제 난 우주에서 못되게 굴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고 지냈다./ 그저 일상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치 내가 했어야 했던 유일한 것처럼."('주의력 결핍')이라고, 시들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을 그릴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장담할 순 없어요. 내 앞날은 내게 달렸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달려 있으니 무엇을 약속할 수 있겠어요. 다만 나는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는 대신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선택의 가능성')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 뿐.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의 순간."이니 "모두가 그토록 염원했던"('순간') 지상의 이 시간을 나는 마음껏 누리겠어요. 당신도 내가 그러길 바라지요? 쉼보르스카, 든든한 언니. 당신 덕분에 또 하루를 살았어요. 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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