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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혁명가'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세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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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혁명가'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세우려면…

[살림의 경제학]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

# 1.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는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 펴냄, 1997년)의 역자로 독자들에게 이름 석 자를 각인했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나온 이 책은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한 사태의 구조적 원인이 바로 '세계화'라고도 부르고 '지구화'라고도 부르는 현상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화의 덫> 외에도 <경영과 노동>(한울 펴냄, 1997년), <노동의 희망>(이후 펴냄, 2001년), <일 중독 벗어나기>(메이데이 펴냄, 2007년), <살림의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 2009년),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홀거 하이데·강수돌 지음, 이후 펴냄, 2009년) 등에서 자신이 '살림의 경제학'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사유를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국가와 시장의 폐해를 동시에 극복하며 대안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한국의 지식 사회에 또렷한 흔적을 남겼다.

# 2.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 한때 대학 교수 강수돌의 또 다른 직함이었다. 동료 교수들이 장관, 국회의원 혹은 정부 산하 기관의 '장(長)' 자리를 기웃댈 때 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학교 옆의 자택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생산했다. 그리고 2005년 5월부터 2010년 6월까지 5년간 농촌 마을 이장을 지냈다.

이장은 그냥 명예직이 아니었다. 애초 그가 살던 신안1리 주변은 고려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조치원 캠퍼스 사이에 대학촌이 조성되기로 예정된 곳. 강수돌 자신도 1997년 고려대학교 조치원 캠퍼스 교수로 부임하면서 대학-자연-농촌이 어우러진 이곳에 살기로 결정하고 가족과 함께 귀촌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대형 건설 업체가 이곳의 논밭에 아파트 건설을 시도했다. 대학 교수 강수돌은 마을 주민과 함께 아파트 건설을 저지하는 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5년간의 이장을 맡았다. 비록 아파트 건설은 저지하지 못했지만(올해 초부터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장을 지내면서 완전히 농촌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 <한국경제의 배신>(강수돌·이정환 지음, 굿모닝미디어 펴냄). ⓒ굿모닝미디어
# 3. 지식과 행동의 일치를 소박하게 추구하는 그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진보적인 지식인도 자기 자녀만은 좋은 고등학교, 명문 대학에 보내 눈총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그의 아이 셋은 10리길을 걸어서 시골 학교를 다니며, 자연을 벗 삼아 자랐다. 그의 책 제목인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 혁명>(그린비 펴냄, 2003년) 그대로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시골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슬쩍 물었더니 참 잘 자랐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그의 아이 셋은 주관이 뚜렷한 성인이 되어서 자신의 꿈을 열심히 개척 중이다. 한 사람의 평범한 학부모로서 그가 실천한 교육 혁명이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 4. 이런 강수돌이 최근 <한국 경제의 배신>(굿모닝미디어 펴냄)을 펴냈다. 이정환 기자와의 인터뷰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간의 자신의 사유를 총정리하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모두가 행복한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방법을 궁리한다. 복지와 생태가 어우러진 미래를 꿈꾸는 그의 목소리를 '프레시안 books'가 직접 들었다.

다음은 지난 8일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석원경상관에서 진행한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인터뷰는 강양구 기자가, 정리는 이재호 기자가 맡았다.


▲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세금, 공동체를 위한 '회비'

프레시안 : 최근 박근혜 정부의 복지 정책 후퇴를 놓고서 실망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강수돌 : 대중이 박근혜 정부에 실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약속을 어겼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작년 대선의 열쇳말은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화'였어요.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시민의 삶의 질이나 노동 인권이 이명박 정부 때에 비해서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죠.

그런데 지난 8개월의 모습을 보면 실망뿐이에요. 복지 공약이 말 그대로 '空約'이 되었죠. 각종 인사 난맥, 시대착오적인 내란 음모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 등 구태 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기대했던 이들로서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일은 박근혜 정부의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이 한국 사회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지금 이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한국 사회는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과 비교했을 때도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경제적 비용에서 공적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낮아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약 20퍼센트)의 절반 수준이에요.

이런 점에서 꼭 대선 공약이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좀 더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도 이번 복지 공약은 어김없이 이행되어야 했어요. 박근혜 정부의 저런 모습이 한국 사회에서 진행 중인 긍정적인 변화의 기운을 아예 눌러버리는 결과를 낳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프레시안 :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놓았던 복지 공약은 후보 자신이나 새누리당이 기반을 두고 있는 가치나 평소의 모습과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지 재원을 마련하지 않는 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비판이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에게 매월 20만 원씩 준다는 기초 노령 연금이었죠.

강수돌 :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복지 얘기를 하면 항상 실현 가능성부터 따지고 드는 이들이 있어요. 대부분 현재의 수입과 지출을 염두에 두고서 계산기를 두드려서 나오는 결론이죠. 이런 정태적인 접근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복지 정책을 시행할 때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고려하는 동태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박근혜 대통령도 이런 동태적인 접근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복지 재원이 부족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돈 없으니 아무 것도 못하겠다, 하고서 손을 놓으면 안 되죠. 예를 들어 30년 정도를 내다보는 '복지 국가 계획'을 마련한 다음, 임기 중에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면 어땠을까요?

프레시안 :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계획과 유사하게요?

강수돌 : 맞아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계획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많았죠. 하지만 1960년대에 우리가 경제 개발의 토대가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죠. 1년, 5년, 10년 복지 국가를 향한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다 보면, 30년이 지난 다음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겠죠.

프레시안 :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박근혜 대통령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복지 국가를 향한 로드맵을 시민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었군요. 임기 5년간 그 로드맵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실천을 할지를 내놓고 또 그런 실천을 위해서 시민도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설득하고요.

강수돌 :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복지 국가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쌓아 가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회적 신뢰가 쌓이면 박근혜 정부 이후에도 그 성과는 계속 이어질 수 있고요. 당장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이 됐다 한들 하루아침에 복지 국가가 가능했겠어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약속의 무게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요.

프레시안 : 방금 복지 국가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언급했습니다. 그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의 시민들은 복지 국가 혹은 복지 사회를 같이 만들어야 할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는 누군가가 베풀어주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누군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될 수도 있겠고, 정부 혹은 기업이 될 수도 있겠죠.

강수돌 : 그런 모습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도 동태적인 접근이 필요하죠. 경영학, 심리학의 많은 연구는 구조만큼이나
개인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즉,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신뢰가 쌓이고 공감하게 되면 더 열심히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큰 변화를 낳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5년간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신뢰하고 공감하는 작은 변화라도 낳을 수 있다면, 다음 정부는 더 적극적인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내가 낸 세금이 이런 식으로도 내게 돌아오는구나. 세금을 1만 원이라도 더 내서 복지의 파이를 키워야겠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복지 공약 불이행을 비판하면서 '거봐라, 애초부터 안 된다고 했잖아' 이런 식의 비판은 절반의 비판인 셈이죠. 지금이라도 박 대통령이 로드맵을 제시하고, 임기 안에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시민의 협조를 구한다면, 최소한 '딸이 아버지보다 낫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 텐데요.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세금 얘기를 더 해보죠.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민들은 세금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하죠. 복지 재원을 마련하려면 세금을 올려야 하고,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려면 국민건강보험료를 올려야 하고, 에너지 전환을 하려면 전기 요금을 올려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조세나 준조세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큽니다.

강수돌 : 우리나라 시민들이 세금을 '뺏기는 것'으로 인식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를 날강도로 본 데는 국가의 책임이 크죠.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국가가 세금을 걷기는 하는데 내 눈에 보이도록 돌아오는 게 없었어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정부가 세금을 엉뚱한 데 써왔습니다.

당장 8조3000억 원이 투입되는 미국산 전투기 도입으로 상징되는 국방비가 그렇죠. '4대강 살리기'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을 붙이고 22조 원이나 들여서 '녹조 라떼'를 만든 사업은 어떻고요. 세금을 내도 그것이 제대로 쓰이는 걸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거부감은 당연한 겁니다.

각종 탈세, 누세는 어떻고요.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은 고위 공무원의 인사 청문회 때마다 엄청난 상실감에 빠져요. 가진 자, 전문직, 재벌로 갈수록 탈세나 누세가 많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죠. 우여곡절 끝에 거둬들이고 있긴 합니다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벌금을 둘러싼 사정도 보통 사람 입장에선 기가 막힌 일이죠.

하지만 한국 사회가 변하려면 세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세금을 '회비'로 비유하고 싶어요. 하다못해 무슨 모임을 가더라도 회비를 내고 같이 쓰잖아요. 그런 게 곧 세금에 기반을 둔 복지죠. 즉, 한국 사회의 살림을 꾸리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를 위해서 회비처럼 내는 돈이 세금이라는 겁니다.

이런 인식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곳이 북유럽이죠. 노르웨이는 소득세가 60~70%나 되고 법인세도 일본처럼 40% 정도 된다고 해요. 많이 내고 많이 받으니 세금을 회비처럼 인식하죠. 한국 시민은 GDP의 10~20%를 국가에 내고 그 일부만 돌려받죠. 적게 내고 더 적게 받으니 세금을 회비로 인식하기는커녕 기피하게 되는 겁니다.

빨리 내가 낸 세금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체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금의 투명성, 합리성, 공정성, 민주성을 높여 나가는 게 필요하겠죠. 단, 이 과정에서도 세금이 먼저냐 복지가 먼저냐 같은 정태적인 접근보다는 작은 변화가 쌓여서 새로운 변화를 낳는 동태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복지 사회 스웨덴의 동력은 '풀뿌리'

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인 지식인치고 복지 국가를 얘기하지 않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강수돌 선생님은 '복지 국가'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강수돌 : 전통적으로 우리는 국가와 시장을 일차원의 대립선상에 놓습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죠. 한쪽에는 시장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고 반대쪽에는 국가를 강조하는 흐름이 있죠. 고전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이 전자였다면, 그걸 비판하면서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등장했죠.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다시 그에 대한 반발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등장했고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다시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기반을 둔 세계 경제가 흔들리자, 또 다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흐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폴 크루그먼처럼 케인스주의 경제학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고, 또 '국가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책이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은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죠.

프레시안 : 강수돌 선생님은 이런 흐름에서 약간 비켜나 있죠?

강수돌 : 그렇습니다. 저는 국가와 시장 양자를 모두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그 둘의 대립을 넘어서는 제3의 대안을 고민해 왔어요. 국가와 시장의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하되, 그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흐름이요. 이런 대안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고리가 바로 민중의 자율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국가와 시장 양자의 한계를 모두 인식하면서 민중의 자율성 또 공동체의 유대에 관심을 가져온 이들이 여럿 있었죠. 왜냐하면, 지금까지 국가나 시장이 작동해온 모습을 보면 민중의 자율성을 억압하거나 공동체의 해체를 야기한 측면이 컸거든요. 그 과정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고요.

프레시안 : 시장의 횡포를 견제하는 복지 국가를 마냥 긍정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인가요?

강수돌 : 물론 시장이 만들어 놓은 승자독식, 빈부격차 등 사회 경제적 문제를 고친다는 면에서 국가의 긍정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을 견제하면서 자원을 재분배하는 국가의 역할은 당연히 강화되어야죠. 앞으로 더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유기 농업을 중심으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과 같은 일은 국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국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국가의 역할은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율성과 그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죠. 이런 흐름이 자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복지 사회지 복지 국가가 아닙니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군사 독재를 경험한 한국에서는 국가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가 존재합니다. 의식적으로는 (특히 지식인을 중심으로) 국가에 강한 거부감이 있어요. 민주화 이후에 일군의 지식인들이 시장의 힘을 빌려서라도 국가를 견제하려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겠죠.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 자유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반면에, 무의식의 수준에서는 (특히 대중을 중심으로) 강한 국가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국에서 민중의 자율성 또 공동체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지방 자치가 완고한 국가 혹은 천박한 시장에 유린당하는 현실은 그 좋은 예죠.

강수돌 : 맞습니다. 1990년대부터 시작한 지방 자치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한국식 자본주의가 방방곡곡으로 침투하는 과정이었죠. 민중의 자율성 또 공동체의 역량이 강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토호 세력이 설치고, 시골에까지 중앙 정치의 논리가 촉수를 뻗는 식이었죠. 그 결과 중앙의 폐단이 지방에서 더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나타났죠.

그런데 여기서도 동태적인 관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장기적으로 보면, 지난 20년간의 지방 자치 실험 역시 불가피한 학습 과정입니다. 민중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그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몇 년 또 몇 십 년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 앞으로 10~20년간은 여전히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칼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시장이 사회의 품에서 떠나 사회를 오히려 유린하는 단계'를 좋은 국가를 통해서 끝내야죠. 시장을 다시 사회의 품속에 되돌려놓는 일이 중요합니다. 가망 없는 기대지만, 박근혜 정부가 '복지 국가 계획'이라도 세우길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죠.

저는 이렇게 시장의 폐해를 교정하는 좋은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민중의 자율성이 강화되고 그 결과 공동체가 회복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의 폐해를 교정하는 일을 국가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거든요. 당장 그런 모습의 단초가 곳곳에서 보이죠. 협동조합은 그 좋은 예고요.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협동조합 운동을 해온 이들조차도 놀랄 정도로 국가가 협동조합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죠. 그 이유는 뭘까요? 사실상 고백한 거예요. "우리는 더 이상 못하겠네. 당신들이 알아서 한 번 해봐!" 미국발 금융 위기로 상징되는 시장 실패를 시장은 물론이고 국가도 감당할 수 없어서, 민중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넘겨준 것이 바로 협동조합일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기회를 활용하면서 시장과 국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안을 창조해 나간다면 앞으로 50년, 100년 뒤에는 민중의 자율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꽃 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복지 국가든 복지 사회든 생태 사회든 한국 사회의 변화를 말하는 이들은 바로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지금 세계를 둘러보면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가 있나요?

강수돌 : 스웨덴이 그 예죠.

프레시안 : 스웨덴은 흔히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좌지우지하는 답답한 복지 국가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강수돌 : 그런 면이 있죠. 하지만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 높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스웨덴 모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오해입니다. 스웨덴 모델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일본의 경제학자 진노 나오히코가 있어요. 국내에도 <인간 회복의 경제학>(김욱 옮김, 북포스 펴냄)이 나왔었죠.

진노는 스웨덴에서 복지 사회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기초를 전국 곳곳에 뿌리내린 시민들의 자발적인 공부 동아리, 지역 개발 조직, NGO 등을 들고 있어요. NGO만 15만 개가 됩니다. 그런 풀뿌리의 힘이야말로 스웨덴의 복지 사회를 만들고, 거의 한 세기 가까이 유지, 강화해온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거예요.

프레시안 : 스웨덴 복지 사회의 비밀을 듣고 보니, 한국 사회를 더 비관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체제 하의 군사 독재를 겪으면서 한국 풀뿌리의 역량은 굉장히 훼손되었죠. 아까 지적한 대로, 시장이 그나마 남아 있던 역량까지 갉아먹는 상황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설사 좋은 국가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복지 사회가 가능할까요?

물론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의 모습을 보면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일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고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이런 우문 같습니다만, 가능성이 있을까요?

강수돌 : 그런 현실 인식 자체는 동의해요.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서, 2010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무상 교육, 무상 급식 이야기가 쟁점이 되었을 때만 해도 색깔론이 횡행했어요.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보수 정당 배경을 가진 이들조차도 무상 교육, 무상 급식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애들 교육, 먹을거리만은 책임지자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죠.

촛불 집회, 희망 버스 등 몇 년에 한 번씩 국가 또 시장 권력에 저항하는 자발적인 민중의 흐름이 나타났죠. 이런 흐름에 전 국민의 몇 %가 공감했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이런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변화를 열망하는 기운이 꿈틀대고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죠.

지금 필요한 일은 이런 희망의 근거를 현실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일이죠. 그것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서 한국에서도 복지 사회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기본 소득, 시장으로부터 벗어날 무기

프레시안 : 복지 국가가 아니라 복지 사회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복지 국가의 한계를 보완할 대안으로 기본 소득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강수돌 : 기본 소득을 지지합니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감수해야 할 비용을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발상만 놓고 보면, 기본 소득은 기존의 사회 복지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기본 소득은 국가 기구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는 것이죠. 다른 사회 복지 프로그램과 달리 사회 보장 제도가 구축되지 않은 나라에서도 즉각 시행할 수 있죠.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알래스카 주처럼 지하자원과 같은 수입원이 있는 곳이죠. 알래스카 주는 석유를 팔아서 1년에 2000달러씩 주민에게 나눠주죠. 다른 하나는 화폐 발행권을 국가가 가져오는 겁니다. 지금도 한국은행 같은 중앙은행에서 화폐를 발행하지만, 다수 민중의 이익이 아니라 은행의 이익을 최우선에 놓죠.

국가가 화폐 발행권을 가져오면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서 국민 한 명당 일정 수준의 기본 소득을 줄 수 있죠. 물론 인플레이션 또 세계 경제 체제에서 적정 수준의 환율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 등의 문제가 뒤따르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뾰족한 해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온전한 화폐 발행권을 갖는 문제를 아예 불가능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프레시안 : <녹색평론>, 녹색전환연구소 또 일군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기본 소득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인 건 굉장히 반가운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 중앙은행, 화폐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도 깊어지리라 생각해요. 그런데 기본 소득을 놓고서 이런 의문도 있습니다.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은 한 사회가 복지 사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로 '탈상품화'를 제시합니다. 사회가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시장에 덜 의존할수록 복지 사회라는 겁니다. 복지 사회가 이렇게 탈상품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시장을 견제할 수 있고요. 사회 서비스의 대부분을 기업이 고용한 저임금 비정규직에 의존하는 미국과 그것을 국가가 고용한 공무원이 제공하는 스웨덴은 또렷이 대비되죠.

그런데 기본 소득을 둘러싼 논의에서 이 부분이 모호합니다. 시민에게 기본 소득을 제공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은 시장의 재화나 용역을 구입하는데 사용되겠죠. 그렇다면, 그건 오히려 시장의 힘만 더 세게 하는 결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독일의 대형 유통 업체를 경영하는 괴츠 베르너가 기본 소득에 열광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웃음)

강수돌 : 단기적으로 보면 분명히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장기적인 효과를 같이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기본 소득은 개인이 급박한 생계에 매달릴 필요가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 개인은 생계를 해결하는데 급급하지 않고 그러니까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 대신에 뭔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에 눈을 돌리겠죠.

예를 들어, 소설을 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예술 활동에 매진할 수도 있겠죠. 또 목공을 배워서 의자나 책상을 만들어볼 궁리도 할 테고, 어떤 이들은 텃밭 농사를 지어볼 생각도 하겠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에서 저마다의 재능을 주고받는 품앗이도 가능해질 거예요. 이런 일이 활성화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에 대한 개인의 의존도가 줄어들겠죠.

그러니 기본 소득을 단순히 개인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는 것으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기본 소득이 낳을 심리적, 사회적 효과까지 고려한다면 그것이 가져올 변화는 훨씬 더 클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기본 소득은 어떤 복지 제도보다도 탈상품화를 가속화할 잠재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본 소득도 그 논의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50만 원, 100만 원을 주는 식으로는 그 효과가 제한적일 거예요. 왜 기본 소득이 중요한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고, 더 많은 시민들이 그 의미를 성찰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논의가 쌓이고 나서 기본 소득이 도입된다면 그 잠재력은 엄청나겠죠.

ⓒ프레시안(손문상)

개인과 공동체의 변증법

프레시안 : 다음 화제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짚고 가죠.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의 힘을 견제해야 한다며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시장의 힘을 어떻게 통제할지를 놓고는 여전히 괄호를 치고 있는 것 같아서 불만스럽긴 합니다만, 여기선 다른 점을 얘기해 봤으면 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이들은 공동체보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죠. 특히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한쪽에는 극단적인 국가주의자가 다른 한쪽에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가 있어요. (웃음) 아까 선생님께서는 국가와 시장을 견제하는 민중의 자율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했죠. 이상적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면서 공동체의 역량이 강화되는 게 맞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공동체와 개인이 대립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무한히 긍정하면서 공동체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람들과 <녹색평론>과 같은 곳에서 설파하는 공동체를 놓고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반론이 의외로 많아요. 예를 들어, 김규항 씨도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농촌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말은 그 방향에 당연히 동의합니다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사회는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말과 '계집애가 공부는 해서 뭐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당께'라는 말이 공존하는 사회였습니다."

강수돌 : 전 근대 사회에서는 지역을 단위로 땅을 매개로 한 공동체가 존재했죠. 그런데 자본주의 근대 사회로 발달하면서 그 땅에 기반을 둔 공동체 사회로부터 비로소 '개인'이 분리되었습니다. 여기서 개인은 능력에 따라서 대가를 받는 시장의 주체죠. 그러니 개인은 근대에 탄생한 특정한 관념입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근대 사회의 개인도 결코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어요. 개인의 자유를 무한 긍정하는 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견해조차도 이런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죠. 이건 개인(individual)의 어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in+dividual)라는 뜻 자체가, 무언가로부터 쪼개져 나온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아요. 그렇다고 전 근대 사회의 공동체에서 볼 수 있었던 공동체의 가치를 최우선에 놓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습을 그대로 둬서도 안 되죠. 예를 들어, 지금도 가족 안에 있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요소는 반드시 극복해야죠.

결국에는 이 양자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하는 새로운 모습을 지향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걸 '공동체적 개인'의 복원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 역시 하루아침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학습과 실천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그런 단초가 없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 갔더니 부모와 결혼한 자녀가 한집에 살아요. 그런데 생활은 따로 합니다. 심지어 밥상도 따로 차려요. 한 지붕 밑에서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 두 집 살림을 하는 겁니다. 1세 노부모와 3세 손자손녀가 교류하는 등 전통적인 가족의 긍정적인 모습은 유지하면서도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가족 공동체죠.

도시 속 주거 공동체 '빈집'의 예도 흥미롭죠. 각자 삶의 스타일은 인정하면서도 거실, 부엌, 화장실 등은 공유하죠. 성미산 마을의 '소행주(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와 같은 공동 주택 실험도 한 예죠.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전통적인 이웃의 개념을 복원하려는 시도잖아요.

이런 실험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대에 기반을 둔 자율적인 공동체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흐름은 불가피하죠.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가 불행한 것은 자유의 결핍 때문입니까? 유대의 결핍 때문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농촌이 망하면, 도시도 죽는다

프레시안 : 이제 화제를 바꿔보죠.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면 농업을 홀대해온 것이죠. 박근혜 정부도 과거 정부처럼 식량 자급률을 어떻게 올릴 것인지 또 어떻게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릴지를 놓고는 관심이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농촌 공동체의 역량은 갈수록 훼손되고 있고요.

강수돌 : 통상적으로 가정의 밥상은 어머니가 차린다면, 온 사회의 밥상은 농민이 차립니다. 한국 사회가 이 사실만은 꼭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점에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국정 운영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나서 쿠바가 직면했던 심각한 식량 위기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요.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5% 정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22% 수준일 거예요. 그나마 쌀을 100% 가까이 자급하고 있으니 이 정도죠. 우리가 많이 소비하는 밀, 콩, 옥수수 같은 경우에는 수입 비중이 압도적이에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데 석유를 펑펑 쓰고 있으니, 그만큼의 비용을 제외하면 실제로 식량 자급률이 5%도 채 안 된다는 지적도 있어요.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얘기할까요? 북한은 식량 자급률이 65% 정도 됩니다. 다만 북한은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를 팔아서 벌어들인 외화로 부족한 35%의 식량을 사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죠. 그래서 주민이 굶주리는 것이지 식량 자급률만 놓고 보면 남쪽보다 훨씬 더 나아요.

이런 상황에서 만약에 1990년대 초반의 쿠바처럼 심각한 외부 충격이 우리나라를 덮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쿠바는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하자 무상으로 또는 저렴하게 원조 받던 먹을거리 또 석유 등이 끊기면서 총체적 기아 사태에 직면했죠. 외국으로부터 먹을거리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 우리나라는 다를까요?

프레시안 : 쿠바는 도시 농업으로 멋지게 위기를 극복했죠.

강수돌 : 농촌은 물론이고 도시에서도 조금만 터가 있으면 심지어 자동차 주차장에도 콘크리트 위에다 흙을 놓고 곡물, 채소, 과일을 생산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쿠바의 식량 자급률은 95%를 넘습니다. 결코 부자 나라라고 할 수 없는 쿠바는, 역설적으로 세계 먹을거리 시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국민이 굶을 염려는 없는 나라 중 하나예요.

우리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이런 쿠바의 경험 등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초국적 자본의 먹을거리 독점, 기상 이변으로 인한 식량 생산 급감, 일부 국가의 식량 무기화, 테러 전쟁 전염병 등으로 인한 세계 먹을거리 시장의 교란에 대비할 수 있어요. 다시 강조하지만, 당장 식량 자급률부터 끌어올려야 합니다.

프레시안 : 아까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농촌 공동체 역량의 훼손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강수돌 : 농촌의 고령화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30년 이후에 농사짓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농업이 자본주의 기업의 독무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또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젊은이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새로운 농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사실 우리 헌법에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형식적으로 살아 있죠(헌법 제121조 1항 :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 제도는 금지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원칙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개발의 기미만 보이면 부자, 공무원 할 것 없이 도시 사람이 시세 차익을 노리고 농지로 달려들죠.

이번 <녹색평론> 2013년 9-10월호(제132호)에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마리날레다의 마누엘 산체스 고르디요 시장의 실험이 실렸죠. 고르디요 시장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2%의 대지주가 경작 가능한 토지의 50%를 소유하는 현실을 바꾸고자 10년 이상 싸웠습니다. 그 결과 1992년에 마리날레다는 마침내 1200헥타르의 토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합니다. (☞관련 기사 : "낡은 정치의 인질이 된 한국, 일본처럼 망합니다!")

지금 경자유전의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걸 보면 한국에서도 가까운 미래에 이렇게 소수가 토지를 독점하는 상황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헌법에 근거해서, 농지를 투기꾼이 아니라 온 사회를 먹여 살리는 농민에게 되돌려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농촌이 파괴되면 한국 사회 전체가 뿌리째 흔들릴 거예요.

프레시안 : 최근 중국의 지식인 원톄쥔의 경고를 보면서 간담이 싸늘했습니다. 원톄쥔은 농업을 무역이 가능한 다른 산업과 똑같이 보려는 경향에 일침을 가하면서 경자유전의 원칙이 깨질 때 어떤 재앙이 닥칠지 아래와 같이 경고하더군요. 한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도시화, 공업화가 진행될 수 있었던 데는 소농의 역할이 컸음도 새삼 깨달았고요.

"중국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농민공으로 일하더라도 자신들의 농토에 대한 권리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농민이 도시로 나가 공업 부분에서 일자리를 찾는 동안에도 고향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물에 의지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땅에서 난 곡물 혹은 도시 노동자로 번 임금, 둘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하지만 그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고 그 한 가지, 임금 혹은 곡물 산출 하나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비교하면, 중국 농민들의 형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있겠죠.

이 때문에 중국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었음에도 지금까지 도시의 대규모 슬럼화가 발생하지 않았던 겁니다.

(…) 농지의 사유화와 자유로운 매매가 허용되면, 그 순간 소농들은 지방 권력과 결탁한 자본에 의해 대규모로 토지를 빼앗길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소농들은 농촌의 생활 기반을 잃게 될 것이고, 그런 농민들은 안정적으로 도시에 정착하기도 힘들어질 게 분명합니다. 그 결과 도시의 슬럼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갈등이 폭발하겠죠." (<중국을 인터뷰하다>(창비 펴냄), 79~80쪽)


강수돌 : 정확한 분석입니다. 지금도 영등포역에서는 경상도, 전라도에서 농사짓는 늙은 부모들이 봇짐을 지고 자식의 집을 찾아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어요. 1970~80년대에는 이런 풍경이 훨씬 더 흔했죠.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른들의 피땀이 최저 임금 수준을 받던 도시 노동자를 먹여 살리는 바탕이 되었고, 그만큼의 잉여를 자본이 가져갔죠.

우리나라도 농촌은 지금까지 도시의 빈곤화, 슬럼화를 막는 완충 역할을 해왔어요. 지금 신빈곤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데는 소농 중심의 농촌이 붕괴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농업, 농촌, 농민을 지키는 일은 한국 사회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죠.

ⓒ프레시안(손문상)

살림의 경제학을 향해서

프레시안 : 개인적으로 강수돌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한 게 1996년입니다. <팀 신화와 노동의 선택>(강 펴냄, 1996년)이라는 책이었죠. 1980년대부터 각광을 받았던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린 생산 방식(Lean Production)이 '혁신'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노동자를 쥐어짜는 새로운 방식일 뿐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미국 책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아, 경영학자 중에도 이런 분이 있구나' 하면서 신기해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경영학이야말로 대표적인 자본의 학문이니까요. <살림의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이후 펴냄), 최근의 <한국 경제의 배신>까지 일관되게 자본을 비판하는 입장인데요, 그런 사유의 형성 과정이 궁금합니다.

강수돌 : 10대 때부터 저를 사로잡았던 관심사는 이런 질문이었어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경제학과를 가려다가 한 번 낙방하고 나서, 경제학과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에 경영학과를 선택했죠. 실제로 두 학과의 문제의식, 커리큘럼이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경영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니, 결국 자본의 학문이더군요.

고민이 많았죠. 그런데 경영학이 관심을 갖는 두 가지 요소가 '돈'과 '사람'입니다. 사람에 해당하는 분야가 '인사 조직', '노사 관계'죠. 사람의 입장에서 경영을 바라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했고, 결국 노사 관계를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나중에는 견문을 넓히고자 독일로 유학도 갔고요.

제 관점에서 노사 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은 크게 두 가지죠. 우선 체제 안에서의 해답은 유럽식 노사 관계입니다. 민주적이고 대등한 노사 관계에 기초해서 경영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공동 결정하는 거죠. 그런 노사 관계 속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죠.

두 번째는 체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죠. 그것은 더 이상 노사 관계가 아니라 동료 관계로 재편되는 것입니다. 전 사회가 자본주의를 지양하면 비교적 쉽게 되겠지만, 그 이전이라도 이미 여러 가지 협동조합이나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동료 관계라는 새로운 싹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노사 관계가 원만해지더라도 (한국은 이조차도 요원한 일입니다만) 노동자에게는 주거 문제, 교육 문제, 노후 문제 등 삶을 좌지우지하는 여러 문제가 남습니다. 결국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삶의 경영으로 관심의 폭을 넓힐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삶의 경영이라는 관점을 갖다 보니 사람과 자연의 관계까지 고민이 확장되더군요. 우리가 좋은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땅, 물, 공기 등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생물과 공존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사유의 지평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녹색평론>도 만나게 됐고, 이렇게 강양구 기자와 <프레시안>도 만나게 됐죠. (웃음)

그래서 기업의 경영이 아니라 삶의 경영에 관심을 갖는 조금은 독특한 경영학자/경제학자가 되었습니다. 애초 '이코노미(economy)'는 집안의 살림을 말합니다. 그러니 먹고사는 문제, 살림살이 전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경제학자로서 제대로 방향을 잘 잡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살림의 경제학>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었어요. 경제학을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아니라 생명과 자본의 대립으로 재구성하자는 제안이었죠.

강수돌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는 모순이 생겨요.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주류 경제학 모두 '노동'을 가변 자본 혹은 인적 자본으로 취급하거든요. 노동이 결국 자본이면 자본과 노동의 대립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현실이 그렇죠.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노동이 자본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리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이 자본을 옹호하거나, 자본이 만들어놓은 사다리를 올라타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나타났죠.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그 전형적인 예고요.

그래서 저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의 아니라 자본 세계와 생명 세계가 대립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 교집합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임노동자라는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습니다. 임노동자는 삶을 살아가는 생명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가변) 자본의 일부로 자본 세계로 포섭되는 이중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인 셈이죠.

그렇다면, 자본 세계를 압도하는 생명 세계의 힘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요? 바로 자본 세계로 포섭되는 임노동자의 삶을 다시 생명 세계로 되돌릴 수 있을 때 새로운 전망이 열릴 수 있습니다. 아까도 잠시 얘기가 나왔던 탈상품화, 탈자본화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고, 제가 기업(공장) 안의 임노동 관계를 넘어서 사회 전체로 눈을 돌린 것도 이런 문제의식과 무관치 않죠.

프레시안 : 말씀을 듣고 보니, 협동조합 역시 자본 세계에 빼앗긴 삶의 활력을 생명 세계로 되돌리려는 실천의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수돌 : 맞습니다. 협동조합의 겉모습, 출자금을 걷고 이익을 내기 위한 활동은 자본 세계의 활동에 속하죠. 하지만 협동조합은 그 과정에서 이윤 추구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민주적으로 협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자본 세계로 빼앗긴 민중의 역량을 생명 세계로 되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거예요.

프레시안 : 강수돌 선생님도 프레시안 협동조합 조합원이시죠? 마지막으로 프레시안 협동조합에 대한 바람을 이 기회에 얘기해 주시죠.

강수돌 :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다수 언론은 생명 세계에 속한 개인의 존재를 완전히 말살시키는데 앞장서고 있어요.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말고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라는 메시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포장해서 전달하죠. 이런 상황에서 <프레시안>과 같은 언론의 역할은 아주 중요합니다.

<프레시안>이 생명 세계의 일원으로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북돋아 주면서, 또 그들의 잃어버린 공동체의 관계망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점에서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프레시안>을 매개로 서로 연대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좀 더 많은 이들이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근거지는 국가 권력, 시장 권력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프레시안>도 조합원들이 내가 만들어가는 언론이라고 동기 부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좀 더 신경을 써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프레시안>이 이젠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스웨덴 얘기 했었죠? <프레시안>을 매개로 전국 곳곳에서 토론, 학습하는 풀뿌리 조직들이 만들어지고 또 그런 풀뿌리 조직들이 서로 소통하고 연재하는 그런 모습을 꿈꿔 봅니다. 저도 조합원으로서 이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습니다.

프레시안 :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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