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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가족 받아준 알제리, 역사의 교훈 따랐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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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가족 받아준 알제리, 역사의 교훈 따랐을 뿐"

중동 전문기자 피스크 "서방이 카다피 적대하면 모두 따라 해야 하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아내와 딸, 아들 2명이 알제리로 망한 것은 카다피 정권의 몰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왜 알제리는 몰락한 독재자 가족들의 망명을 허용했을까? 알제리는 리비아 내전 과정에서도 아랍연맹(AU)의 비행금지구역 설치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고 카다피군에 무기를 지원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물론 리비아의 정치적 급변 사태가 국경을 마주한 이웃나라 알제리에는 반가울 리 없다. 특히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정권 또한 12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고 올해 초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서둘러 진압했다는 점에서 카다피 정권의 위기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피스크는 31일자 칼럼을 통해 알제리의 '카다피 감싸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난 132년간 알제리를 식민지배한 프랑스가 앞장서서 리비아 공습에 나선 것이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의 반감을 자극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피스크는 서방 국가들이 리비아 반군을 적극 지원한 것은 리비아의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라면서 알제리 역시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카다피에게 동정심을 보인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알제리와 리비아는 모두 자원 부국인 동시에 독재국가지만 지난 2월 알제리에서 민주화 시위가 발생해 정권이 진압에 나섰을 때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피스크는 "리비아의 이웃 국가인 알제리는 서방의 리비아 혁명 지지에 대해 리비아가 석유 부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카다피 가족의 망명 허용은 알제리가 서방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다음은 그의 칼럼을 번역한 것이다. (☞
원문 보기) <편집자>

▲ 지난 1986년 촬영된 카다피 가족의 사진.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와 딸 아이샤, 아들 2명의 모습이 보인다. ⓒ로이터=뉴시스

알제리의 카다피 가족 망명 허용은 서방에 보낸 메시지

최근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타니 카타르 국왕이 알제리를 방문해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카타르 국왕은 알제리에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카다피 정권을 돕지 말라는 것이다. 나토군이 파괴한 카다피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보충해주지 말라는 뜻이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카타르 국왕에게 이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그 약속은 깨졌다. 카다피의 러시아제 장갑차는 5년 동안 사막에서 썩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새것처럼 보인다.

리비아 전쟁에서 카타르의 역할은 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 중 하나다. 지난주[반군이 장악한] 트리폴리의 '순교자 광장'[구 녹색광장]에는 카타르 국기가 내걸렸다. (알제리 국기도 같이 걸리긴 했지만)

오랫동안 알제리는 카다피의 독립적인 (하지만 광기어린) 정책을 지지해 왔다. 알제리 자신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 외세로부터의 어떤 주문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알제리를 132년 동안이나 식민지배하며 괴롭힌 프랑스가 리비아 공습에 나선 순간, 카다피 정권의 생존투쟁은 [알제리인들에게] 1954~62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대(對) 프랑스 독립투쟁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만약 리비아인들이 [카다피 집권] 40년 동안 역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겪었던 고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리비아의 페잔 지역은 2차대전 후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의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점령했다. 황량한 리비아-알제리 국경지대는 오랫동안 밀수 루트로 활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알제리 외무부가 카다피의 가족이 알제리 땅에 있음을 발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알제리는 자신들 국가의 자주성과 주권에 대한 '신성한 믿음'을 서방과의 우호적 관계와 교환할 생각이 없음을 서방에 (특히 프랑스에) 보여줬다.

알제리는 동료 아랍국가에 인도주의적이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일 권리가 있다. 물론 나토의 동맹자인 리비아 반군은 카다피 가족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알제리의 행위를 '공격적 행위'라고 비난하겠지만 말이다.

이슬람주의자인 적군에 대항한 카다피의 투쟁은 (알카에다와 같은 반대파들에 대한 알제리 정부의 전쟁의 축소판이기도 한데) 카다피 독재정권과 알제리의 군사 '민주주의' 정권을 동맹으로 만들었다.

왜 자부심에 찬 알제리인들이 단지 페르시아만의 아랍국가들[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미국가들을 지칭]과 유럽 강대국들(적어도 그들 중 몇몇 나라들)이 카다피를 적대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형제인 그를 배신해야 하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007년 카다피와 포옹을 나눴지만 4년도 채 안돼 그에게 폭탄을 퍼부었다. 알제리는 친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알제리 정권의 논리다. 하지만 알제리와 리비아 보안 당국 사이에는 더 어둡고 피냄새를 풍기는 접점이 있다. 국민들에게 정권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고문과 정치적 목적의 살인, 대량학살을 자행해 왔다는 점이다. 알제리는 그들의 '대테러 작전' 경험을 수 차례 카다피 정권에게 전수했다. 알제리 현대사는 대규모의 유혈 참사로 얼룩져 있다. 15만 명이 살해됐고 이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카다피 정권이 저지른 고문과 살해보다 결코 적지 않다. 두 나라 정부는 모두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가혹한 철권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제리는 결코 '제2의 리비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알제리는 무시무시했던 1990년대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고 약간 민주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알제리는 리비아 혁명이 서방의 지지를 얻은 것은 리비아가 석유 부국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근거 없는 생각인 것만도 아니다.

알제리도 세계 8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 부국이며 4위의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알제리의 사막 지대에는 1250억 배럴의 석유가 묻혀 있고 현재 석유 수출량의 27%는 미국으로 간다. 알제리는 리비아의 석유 수출에 문제가 없었다면 서방은 결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한 것처럼 리비아에 개입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독재정권은 '민주화의 봄'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알제리가 카다피 일족의 망명을 받아준 것은 리비아보다는 서방을 겨냥한 제스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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