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밀양 할매들이 '무덤' 파야 하는 세상, 이게 새마을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밀양 할매들이 '무덤' 파야 하는 세상, 이게 새마을인가

[기고] 백기완 선생의 민중 비나리에 부쳐

근래 백기완 선생님을 자주 뵐 일이 있었다. 하루는 서울대병원 담장 길을 걷다가 멈춰서더니 내가 이젠 저 낙엽들 같다고, 저 잎들이 다 지고 나면 나도 갈 때가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기도 했다. 누구나 다 가는 거라고 알고 있지만, 팔십 성상을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해 온 한 특별한 생애의 말이기에 뭉클한 게 목젖을 뜨겁게 했다.

등나무 줄기가 말라붙어 있는 통일문제연구소 담벼락에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 연대하는 시 한 편이 쓸쓸하게 적혀 있었다. 승리하기 전까지는 지우지 않으시겠다고, 작년에 손수 적어두신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 대한문 분향소를 평택 공장 앞으로 옮기던 날은,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어 망연히 서 있다가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 왔다고 하셨다. 지난 1년간 그곳은 쌍용차 정리해고자들만의 복직 요구를 넘어선 모든 민중의 연대의 자리였고, 저항의 근거지였고, 새로운 꿈을 꾸는 희망의 장소였다고 하신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쳐대는 이 세계의 불의에 맞서는 국제적 전선이었다고 한다. 그 전선을 지키다 끌려간 김정우 전 지부장은 아직도 저 감옥에 있는데 우리 손으로 우리의 분노를 걷어야 하는 이 피눈물과 참혹을 어떻게 견뎌야 하냐며 아파하시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든 곳에서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과 권리가 밀리고 있다. 속속 밝혀지듯 국가 기관의 개입에 의한 부정 선거 이후 당선된 근거 불명의 이상한 정부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우롱당하고, 짓밟히고 있다. 이런 정부가 법 안에 있겠다는 전교조와 전국공무원노조를 법원에서조차 손들어 줄 수 없는 작은 꼬투리를 잡아 법외로 내몰겠다고 한다. 원내 정당 등록을 취소하고 특정 정당을 법외로 내몰겠다는 발상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최소 민주주의에 대한 반사회적 도발이다. 법과 사회적 합의 절차를 요구하고 호소하는 강정과 밀양 주민들은 군사기지와 '핵 마피아'들에게 밀리고, 짓밟히고 있다. 철도 민영화를 위한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 의정서를 지난 15일 정부가 몰래 통과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에 그 공평무사하다는 법이 있는가. 그 법 안에서는 오늘 누구만이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가. 용산 민간인 참사의 하부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정권이 바뀌어서도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되는 세상. 현대차 아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박정식의 죽음과, '전태일 열사처럼은 못 되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한 달여 전 2013년의 전태일이 되어 간 삼성전자서비스센터지회 최종범 열사의 죽음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 세상. 이것이 도대체 '새마을'인지, '헌 마을'인지, 무슨 좀비들의 마을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때 백기완 선생님께서 무슨 소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노동자 민중의 비나리가, 민주주의의 쇳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주셨다. 그 말씀 받아 300여 분의 투쟁하는 당사자들과 사회 각계가 모여 시대의 비나리를 준비해 왔다. 29일 밤 조계사 내에 있는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열린다. 80여 명의 후배 시인들은 2013년 저항시선집 <우리 시대의 민중 비나리>를 만들어 이날 출판 기념 마당을 갖는다. 그간 용산, 기륭, 희망버스, 콜트콜텍, 쌍용차,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등에 함께해왔던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은 '빛에 빚지다'는 저항 사진전을 열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선생님은 다시 노구를 이끌고 밀양 반핵 희망버스를 타시겠다고 한다. 기차 예매를 해드리겠다고 했지만, 희망버스는 모두 함께 타는 버스라고, 밀양의 할매, 할배들은 무덤 구덩이를 파놓고 싸우는데, 그리 편히는 못 가신다며 버스를 타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니 선생이고, 동지이다. 29일 밤이 밀양 탈핵 희망버스의 전야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최종범 열사의 넋을 위로하고 무노조 삼성에 맞서는 사회적 투쟁을 결의하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유성기업 노동자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는, 용산 참사 유가족은, 모든 저항하는 민중은 결코 물러서거나 지지 않는다는 결의를 채우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그간 참고 참았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원 없이 시원하게 한번 내뱉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땅의 모든 새로운 법과 그 집행력은 노동자 민중, 우리 모두에 의해서만 나온다는 것, 그 집행력을 이제 행사해 나가자는 출정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 또 저항해야 한다는 즉자적 대응을 넘어, 다른 세상을 꿈꿔보는 아름다운 하룻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생 곁에 얼마간 있으며, 소중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중 하나, '저항'은 그 자체가 완성이 아니라 '싹'이라는 것. 흔들리지 않게 싹들이 싹들을 서로 부르는 소리며 몸짓이라는 것. 간혹 탄압이나 자신의 못남으로 흔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뿌리와 줄기를 더 굳게, 넓게 내리기 위한 소중한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 더 낮게, 겸손하게, 꾸준히 역사의 그 길을 가라는 참 좋은 말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