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국민참여재판을 비판할 때 제시하는 이유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거칠게 요약하면 "정치적 성향(性向)이나 감성(感性)적 호소"에 휘둘리는 국민(배심원)을 못 믿겠다는 것과 법리적으로 어려운 문제는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국민(배심원)을 못 믿겠다는 이유의 현실적 근거로, 한 사건의 배심원이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86.25%의 몰표를 받은 전북 지역에서 뽑혔다는 점,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은 재판이 피고인 지지자 150여 명이 야유, 환호, 박수를 보내는 재판정에서 열렸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이에 대한 반대 근거가 나타나 설득력이 없어졌고 후자의 경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허위 사실 공표나 명예훼손 등의 법리가 어려워 배심제가 부적절하다는 논리도 있다. 이에 대해 서울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명예훼손이나 공직선거법은 법리가 어렵거나 전문 식견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관이 일반인의 상식과 관점에 맞춰 판단해야 한다. 이런 사건이야말로 국민참여재판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국민참여재판을 비판하는 측의 이유와 근거는 설득력이 없고 심지어 '국민 모독'에 가깝게 느껴진다. 비판하는 측은 결국 배심원의 평결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공세를 퍼붓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주권을 가진 민(民)을 모독하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국민참여재판의 취지를 '재판의 질' 문제로 제한하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관(前官)예우, 무전유죄(無錢有罪)·유전무죄(有錢無罪)와 같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을 덜고, 공정한 재판을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국민참여재판은 더욱 근본적인 가치인 민주주의 문제이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처럼 "국민주권주의 실현을 위해 법정에서도 시민이 주인이 되는 시스템"이자, 한 법조인의 말처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관의 고유 영역이었던 재판에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른바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최근의 "비난은 참여재판의 이런 속성을 눈치챈 권력이 시민 권력을 견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쪽방 주민 건강권, 열쇳말은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
건강권에 관한 글을 쓰면서,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아주 길게 풀어 놓는 이유는 바로 "민주주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열쇳말이 건강권의 보장과 발전을 위해 중요하고, 그 열쇳말을 실천하는 데 배심제를 비롯한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동자동사랑방,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은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 동자동 쪽방 지역에서 쪽방 주민 건강권 실태 조사를 수행하였다. 그때의 문제의식은 모호한 건강권 개념을 명확하게 만들고 보건의료 담론에 국한된 건강권의 내용을 확장해 보는 것이었다. 연구 결과, 건강권은 '건강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누릴 권리'로서, 그 내용은 건강 그 자체, 사회 보장 제도, 사회적 관계와 삶터/일터 환경, 자력화와 정치적 힘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한 쪽방 주민 설문 조사 결과, 대부분의 범주에서 한국인 평균보다 열악하게 나타났다. (☞ 관련 기사 : 건강 나쁜 건 팔자 탓? 그건 당신의 착각, 쪽방 주민 62% "죽고 싶다"…한국인 평균 4배)
▲ 쪽방. ⓒ프레시안(최형락) |
2012년 실태 조사 이후 동자동 쪽방 지역에서는 주민이 참여하거나 주체가 되는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확장된 건강권 내용과 인권의 결정적 장점인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도록 자력화하는 잠재력"이 지역 사회 활동에서 구현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지역 사회 활동에 더해 뭔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건강 및 보건 의료에 '건강권'이라는 인권적 접근을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이었다. 건강권 실태 조사와 당사자의 자력화에 더해 동자동 지역을 넘어선 관점과 국가의 명확한 역할과 책임 부여 측면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결국 국민참여재판의 도입 취지인 "민주주의", "권력에 대한 도전"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인 법학박사 알리시아 엘리 야민은 1996년 자신의 논문에서 "질병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불완전한 지배의 산물일 뿐 아니라, 특정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지배 산물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임파워먼트 측면에서 건강권을 다시 규정하면 권리와 보건 의료에 관한 논쟁 대부분이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 내 권력 관계를 재규정할 책임과 재규정할 가능성을 가정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라고 하였다.
쉽지 않다. 우선 인권도, 건강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를 민주주의 혹은 권력에 대한 도전과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현실에서는 보건 의료에 대한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의견도 있다.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건강권을 비롯한 전체 인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여러 수준과 여러 분야에서 여러 가지 실험과 활동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사업은 그 가운데 자그마한 하나의 실험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시민이 결정하면 정치적으로 휘둘린다? 오해
이를 위해 2012년 실태조사 연구진 4인은 '건강권 서울시민회의 기획단'을 만들고 2012년 실태조사 결과를 활용한 후속 사업으로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서울시민, 건강권을 선언하다! 쪽방 주민의 삶을 중심으로'를 수행하고 있다.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를 통해 건강권의 내용과 수준을 토론하고 숙의하는 과정을 수행하고자 한다. 서울시민회의의 결과물로 쪽방 주민의 건강권 현황에 대한 평가와 권고안이 도출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우려도 존재한다. 앞서 살펴본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비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인권과 같은 어려운 문제에 일반 시민의 참여가 적절한지, 시민 패널의 대표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치우치지 않은 정보 제공이 가능할지 등등.
앞서 국민참여재판에 일반인의 상식과 관점이 중요하다고 했듯, 인권에도 일반인의 삶과 경험, 의견이 중요한 토대가 된다. 과학기술과 같은 전문 분야에 시민 참여를 제도화한 덴마크에서는 숙의적 시민 참여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의 일상과 감정적 의견, 경험에 기초한 견해가 기술 평가에 핵심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는 시민 패널의 대표성과도 연결되는 지점인데, 덴마크에서 숙의적 시민 참여의 시민 패널 요건은 연령, 성별, 고용, 지역 측면의 대표성, 토론 쟁점에 대한 관심과 열린 마음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 시민 패널이 회의 주제와 관련해 광범위한 경험 기반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서울시민회의에서 이를 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치우치지 않은 정보 제공을 위해 서울시민회의 진행에 관한 의사결정기구인 조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서울시 공무원, 쪽방 상담센터 관계자,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민주주의 전문가, 인권 활동가, 빈곤단체 활동가, 쪽방 주민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들 조정위원은 정보 제공과 발표자 추천 관련해 의사 결정을 하고 연구진은 이를 따를 것이다.
앞서 정치적 사건에 국민참여재판을 반대하는 측의 이유로 배심원이 지역 여론(정치적 성향)과 재판 방청객들의 반응(감성적 호소)에 휘둘린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숙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숙의란 "참여자들이 학습과, 토론, 그리고 성찰을 통해 자신들의 판단, 선호, 관점을 변화시켜나가는 동태적인 과정이다. 특히 이러한 선호의 전환이 강제, 위협, 상징 조작, 기만이 아닌 토론과 논변에 기초한 설득과 상호 학습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지금까지 국민참여재판에 관한 정쟁을 검토하면서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를 소개하였다. 숙의적 시민 참여 제도를 수행하는 취지 측면에서 민주주의, 권력에 대한 도전은 양쪽의 공통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의 상식과 인생 경험, 의견, 이해하기 쉽고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는 숙의 환경 조성이다. 따라서 어려운 법리 문제를 들어, 혹은 "온정주의적 국민성"을 들어 국민참여재판을 흔드는 주장에 단호히 반대한다. 오히려 국민참여재판 확대를 통해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의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 이는 곧 건강권을 비롯한 인권의 보장과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번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는 민(民)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자그마한 실험이고 활동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번 서울시민회의에 관심 있는 일반 시민의 참여를 부탁한다.
참고 자료
1 한국일보 2013-10-31 기사, "국민참여재판 정쟁, 색안경 낀 당신이 틀렸소!"
2 조선일보 2013-10-30 사설, "'안도현 재판'에서 또 드러난 국민참여재판의 맹점"
3, 5 한겨레 2013-10-30 기사, "국민참여재판, 정치의 한복판에 서다"
4 조선일보 2013-10-30 기사, "政治에 휘둘리는 국민참여재판 - [국민참여 재판 이래선 안 된다] [上]"
6 조효제, <인권의 문법>, 후마니타스, 2007
7 Yamin, A. E. (1996). Defining questions: Situating issues of power in the formulation of a right to health under international law. Human Rights Quarterly, 18(2), 398-438.
8,9 The Danish Board of Technology, http://www.tekno.dk/subpage.php3?article=468&language=
10 조현석, <숙의적 시민참여 모델 연구-울산시 북구 음식물자원화시설 건립 사례>, 科學技術學硏究, 6(1), 2006
11 뉴시스 2013-11-01 기사, "與野, 국민참여재판 공방 지속…정치적 사건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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