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동자동 쪽방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쪽방 주민들은 건강에 영향을 준 요인을 다양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설문 조사를 통해 쪽방 주민에게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현재 선생님의 건강상태와 질병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생각나는 대로 모두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질문했다. 그 결과는 아래 그림과 같다.
* 기타: 가정불화, 결혼, 인간관계, 조실부모, 외로움, 고문후유증, 베트남전 참전, 불공평한 현실, 실직, 삶의 포기, 삶의 애환, 환경, 스트레스, 신앙, 고령 등 |
이를 다시 분류한 결과 아래 그림과 같다. 쪽방 주민은 건강 영향 요인으로 자기 관리, 유전, 고령 등 개인적 요인도 꼽았지만 사회경제적 요인을 더 많이 지목하였다.
설문조사와 더불어 쪽방 주민과 한 심층 면담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심층 면담 결과 쪽방 주민은 생계, 직업, 주거, 보건의료, 복지, 정치 등이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언급하였다. 쪽방 주민의 사연을 일부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생계
"인자 그게… 너무 일도 많이 하고, 그게 인자 이렇게 병이 막 오는 것 같아. 너무 천덕꾸러기로 몸을 막 돌려가지고… (중략) 그 당시에 치료도 받고 이랬으면은 괜찮았는데… 치료도 안 받고, 돈 아까워가지고 아끼다가… 병이 더 크게 되고, 크게 되고, 이렇게 된 거야."
직업
"내가 좀 다르게 살았으면, 건강이 요지경까지 안 왔어. (중략) 사무직원으로 직장생활을 했으면, 몸이 이 지경으로 안 왔지."
사업 실패와 노숙
"실패하면서 모든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병마도 인자 그때 다 온 거에요. (2000년경 일 년 정도 밖에서 주무신 게 건강에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요?) 건강에 많이 끼쳤죠. 안 끼친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아니 이런 길바닥에서 박스 하나 깔고 자는데 정상적으로 몸이 되겠어요? 그리고 뭐 밥을 제대로 먹어요, 뭐를 해요? 그냥 국밥 후루룩 먹는 거지."
주거 불안정
"못사는 데는 신경을 많이 쓰잖아. 그러면 혈압도 높고, 있는 동네하고는 천지 차이지… (중략) 없는 동네는… 왜 그냐면 당장 방세 안 내면 쫓겨~ 쫓겨 나가잖아, 세 사는 데는. 그런께네 빨리 사람들이 죽고 그러지. (중략) 이거는 밤에 자고 나면은, 한 달 되면은, 또 집세 (내라고) 그러잖아. 안 주면 '나가라' 하는데… 그러니 신경 쓴께 빨리 죽지."
의료와 복지의 통합 부재
"그때도 서북병원 결핵병동에서 나와서 한 달 동안 거리에 있었어요. 집이 없어서. 그런데 이동현 홈리스행동 대표가 찾아와서 수급 맨들러 가자… 그래서 만들러 갔죠."
의료급여 1종 수급 탈락
"(약을 이렇게, 당뇨 발견 이후에 못 드신 적이 있어요?) 예. 수급이 끊겨가지고, 예. (약을 그러면 한 며칠간 못 드셨어요?) 며칠간이 아니라 몇 개월간이죠. 그러다 보니까 지금까지 몸이 붓고, 혈당이 500 이상 넘어가고 그러죠. 몇 개월을 못 먹었으니까…."
쪽방 주민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 부재
"국회의원들이나 구의원들이나 시의원들이 표나 받으러 이런 데 와서 조금 동정심 갖다가, 당선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 식으로 코빼기도 하나도 안 비치고… (중략) 이런 데에 대한 제도가 하나도 개선되는 게 없고 이런 데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속상해요."
▲ 쪽방 ⓒ프레시안(최형락) |
불건강은 정치·사회·경제 요인의 복합적 산물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쪽방 주민의 건강 상태는 유전, 고령뿐 아니라 실제 삶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실제 삶의 요인이란 소득, 직업, 주거, 보건의료, 복지, 사회관계, 정치 등이라 할 수 있다. 보건 분야에서 이를 전문 용어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측면에서 쪽방 주민의 평균 건강이 한국인의 평균 건강에 비해 나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생물학적 요인인 유전과 고령을 논외로 두면 건강 상태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동자동 쪽방 주민은 소득, 직업, 주거, 보건의료, 복지, 사회관계, 정치 등 모든 요소에서 불리함을 확인하였다. 결국 쪽방 주민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서 한국인 평균보다 불리하므로 건강 결과가 더욱 나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쪽방 주민은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건강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며 건강 문제는 체념하고 말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벌어먹고 살기 힘든 것 그 자체가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고, 벌어먹고 살기 힘든 것은 팔자 탓이 아니라 한 사회의 사회정책, 경제 구조, 정치 등의 복합적 산물이기 때문이다(세계보건기구 <건강의사회적결정요인위원회> 2008).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쪽방 주민의 건강을 한국인 평균과 비슷하게 향상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우선 2008년 세계보건기구 <건강의사회적결정요인위원회>가 발표한 '같은 세대에서 건강 격차 줄이기' 보고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3가지 사항을 권고한다. 첫째 출생, 성장, 생활, 노동, 노화를 둘러싼 일상생활 조건을 개선하라. 둘째 일상생활 조건의 구조적 원인인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개선하라. 셋째 문제를 측정, 이해하고 집합 행동의 영향을 평가하라. 이 보고서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쪽방 주민의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음으로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의 가능성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접근법이 건강 측면에서 유용한 이유는 제도 구축, 자원 투입 등의 사회적 개입이 실제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건강 보장을 위한 사회적 개입이 실제 개인의 삶에서 '그림의 떡'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부단히 성찰함으로써 개인 삶의 복합적 산출물이라는 건강 특성을 효과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아마티아 센의 가능성 접근법을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에 적용한 것이 제니퍼 루거(J.P. Ruger)의 건강 가능성 패러다임(health capability paradigm)이다. 이는 건강권 개념과 연결할 수 있다. 이때 건강권이란 '건강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누릴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할 수 있는 삶의 기회'란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가? 이는 우선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과 매우 밀접해야 한다. 동시에 제도 구축과 자원 투입뿐 아니라 실제 개인의 삶에서 구현된 건강할 수 있는 기회 집합을 반영해야 한다.
서울시 동자동 쪽방 주민의 삶, 제니퍼 루거의 건강 가능성 패러다임, 2008년 세계보건기구 <건강의사회적결정요인위원회> 보고서를 참고하면 '건강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구체화할 수 있다. ① 건강 그 자체 ② 의료와 복지를 포함한 사회 보장 ③ 삶터/일터 환경과 사회관계 ④ 자력화와 정치적 힘으로 구성할 수 있다. 여기에 건강 그 자체를 포함하는 이유는 건강 그 자체가 삶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 및 현재의 산출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위한 기회 성격도 갖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 보장을 넘어 '삶의 질'을 개선해야
사실 기존의 건강권 담론에서 주된 관심은 의료서비스였다. 사적 의료기관이 대부분인 한국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파도 치료를 못 받는다. 따라서 최소한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경제적 처지와 상관없이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제도가 구축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즉 의료서비스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건강이 개인 삶의 복합적 산출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쪽방 주민의 삶에서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빈곤층의 삶은 의료가 해결된다고 건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생활수준, 단절된 사회관계 회복, 강제 철거 없는 동네 환경, 사회 제도를 개선하는 정치사회적 힘도 그만큼 절실하다. 또 다른 이유는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개개인이 생애 기간 동안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개개인의 삶의 질도 올라가고 우리 사회도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자동 쪽방 주민의 실태조사 결과, '건강할 수 있는 삶의 기회'란 측면에서 쪽방 주민의 건강권 실태는 열악하다. 첫째 건강 그 자체는 한국인 평균에 비해 나쁜 상황이다. 이마저도 제대로 모니터링 되지 않는다. 둘째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경우가 많고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주거 복지의 사각지대로 사회보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셋째 사회관계는 대부분 단절되어 있고 열악한 동네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넷째 의사와 맺는 관계, 정치 참여의 어려움 등 현실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쪽방 주민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건강을 위해 새로운 건강권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중앙 정부와 지자체는 쪽방 주민을 비롯한 모든 시민이 '건강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건강 그 자체, 사회보장제도, 삶터/일터 환경, 정치적 힘을 개선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중앙 정부와 지자체가 쪽방 주민을 비롯한 열악한 환경의 주민을 위해 건강 수준을 모니터링하고 보편적 보건의료와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건강한 삶터/일터 환경을 만들고 건강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요구하는 정치사회적 힘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구조적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 좀더 상세한 내용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시민건강이슈-11/12] 쪽방주민의 건강과 삶으로부터 배운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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