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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추노'와 링컨의 '이중 전쟁'…아메리카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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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추노'와 링컨의 '이중 전쟁'…아메리카 '폭발'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20> 링컨, 남북전쟁, 그리고 대륙횡단철도

1860년대 미국은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상징적 인물은 186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링컨이었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연방으로 이뤄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 이후부터 파생시켜 왔던 여러 갈등들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링컨의 당선으로 흑인 노예해방 문제가 첨예한 쟁점으로 떠오르자, 노예해방에 반대 입장을 보여 왔던 남부의 주들이 행동에 들어가게 된다. 남부의 주들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미국이 갈라질 것"이라고 경고했었는데, 선거가 끝나자 마자 자신들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회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1861년 새해부터는 미국의 분열이 더 가속화했다. 미시시피주를 시작으로 플로리다, 앨라배마 등 6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다. 탈퇴한 주들은 남부연합을 만들었고 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대통령도 선출했다. 링컨은 취임도 하기 전에 북남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노예제는 미국 사회의 분열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발화점이었다. 19세기 초부터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노예제 반대 운동은 1830년대에 시작된다. 1831년 보스턴에서 <해방자(Liberator)>라는 주간지를 발간한 월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개리슨은 "노예 제도가 백인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아니라 흑인에게 가하는 해약을 봐야 한다"는 명쾌한 논리로 노예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노예제에 따른 사회 갈등은 미국 사회가 급격한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더 고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의 세력 관계를 나타내는 지도. 하늘색은 북부연방에 포함된 자유주를 말하고 보라색은 노예제를 유지하는 주를 나타낸다. 핑크색 위의 보라색 주인 미주리,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노예제를 유지하지만
연방에서 탈퇴하지 않은 주를 가리킨다. 옅은 하늘색은 정식 연방 주에 가입되지 않은 준주를 가리킨다. ⓒhttp://bbcwr.us/civil-war-map.png

노예제 갈등의 진짜 원인은?

이미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든 북부와 남부의 경제 구조 차이는, 노예제를 대하는 다른 방식을 탄생시켰다. 인간의 도덕적 문제를 뛰어넘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대립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다. 1790년경 남부의 면화 생산량은 연간 1000톤가량이었으나 1860년대에는 100만 톤을 넘어섰다. 100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이렇게 면화 생산량이 증가한 주요 원인은 같은 기간 5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늘어난 노예의 노동력 덕분이었다. 남부의 면화는 유럽으로 향하는 주요 수출품으로서 노예주인 백인들의 부를 보장하는 생산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는 남부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남부의 흑인 노예들은 백인들의 재산에 불과했기 때문에 재산에 처해지는 다양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특별히 포악하지 않은 주인으로부터도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주인의 돈벌이를 위해 흑인 가족들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주인이 부부나 자식들을 갈라 일부를 팔아넘기거나 각각 다른 주인에게 양도할 경우 흑인 노예들은 찢어지는 이산의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백인들에 저항한 노예들의 반란도 있었지만 더 큰 보복을 당했다.

노예들은 자유를 찾아 탈주를 감행했다. 반란보다 더 손쉬운 방법이긴 했지만 잡히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은 차이가 없었다. 자유와 죽음이 같은 무게로 흑인들의 목에 걸려있었고 그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됐다. 노예들은 노예제가 인정되지 않는 멕시코나 북부, 캐나다 등으로 탈출을 했다. 당연히 탈출한 노예들을 잡기 위한 사냥꾼들이 생겨났다. 한때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추노>와 같이, 도망 노예들을 잡기 위한 남부의 추적꾼들은 노예들의 탈주 통로 곳곳에서 눈을 부라렸다.

남부의 '추노꾼'들은 개들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먹잇감을 발견한 개들은 사지를 물어 찢었다. 적당한 때에 개를 말리지 않아 노예들을 일부러 죽게 했다. 노예 추격이 점점 대담해진 데에는 1850년 연방의회에서 통과된 탈주노예법도 한몫했다. 탈주노예법은 멕시코 전쟁에서 얻은 캘리포니아 등의 영토가 자유주(노예가 허락되지 않는 주)로 연방에 가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북부가 남부의 요구를 들어주어 제정되었다. 탈주노예법으로 인해 탈주 노예로 지목된 흑인들을 잡아가는 일이 쉬워졌는데, 너무 가혹하게 시행되어 곳곳에서 심한 반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부에서 탈출한 흑인들을 돕기 위한 노력도 북부 곳곳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지하철(Underground Railroad)'이라는 비밀 조직이었다. 실제로 동북부의 캐나다 접경 도시에는 한밤중에 지하철 노선을 따라, 노예들이 추적자들을 피하도록 안내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뉴욕주의 시러큐스(Syracuse)는 캐나다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미국 각지와 사통팔달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도시이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시러큐스에는 도망 노예가 많이 찾아들었다. 이곳에서 비밀조직 지하철을 운영한 사람은 J.W.로건(Loguen)이었다.

▲1851년 흑인 노예의 탈주를 도와준 사건을 기념하는 시러큐스시의 조형물 ⓒhttp://www.freethought-trail.org/site.php?By=SiteType&Page=3&Site=59

로건은 노예 어머니와 백인 주인 사이에 태어났다가 자유를 찾아 도망쳐 시러큐스에 정착한 후 목사가 되었다. 로건은 지하철역의 기착지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몰려드는 도망 노예들을 캐나다로 도주시켰는데, 그 인원이 1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노예가 두리번거리다가 지하철 터널 입구의 어둠 속에서 "지하철 탑승을 환영합니다!"라는 로건의 낮은 음성을 듣는 것은,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는 판관의 심판을 듣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횡단철도를 둘러싼 남과 북의 대립

대륙횡단철도의 필요성은 미국 사회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더 강력하게 제시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은, 사실상 현재 미국 동부, 그곳을 가르는 남과 북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 대륙을 세로로 나누는 미시시피강의 동쪽과 서쪽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오래전부터 이민자들의 손에 개발되고 근대 산업자본주의가 만든 새로운 도시들의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 동부였다면, 서부는 아직 길도 제대로 놓이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미국이 서부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황금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황금광이 발견됐다는 소문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졌다. 중국조차 황금을 캐기 위해 이민선을 띄웠다. 이어서 서부의 대평원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황무지가 아니라 농사짓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땅이란 것이 밝혀졌다. 정착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부는 쇄도하는 이민자들로 많은 골치를 앓고 있었고, 또 이들 이민자들의 다수가 원래 고향에서 농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부 정착'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기도 했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떨어져 나와 론스타 공화국(Lone Star Republic)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텍사스가 1845년 미국에 합병됐다. 이어서 1848년에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거대한 캘리포니아 영토가 멕시코로부터 미국으로 넘어갔다. 확대된 영토와 황금과 대평원 정착은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단, 무엇보다 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물리적 장치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미국인의 꿈을 실현시킬 물리적 장치로 대륙횡단철도를 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동부의 북부와 남부 지역에서 일반화된 철도는 그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륙횡단철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부딪히게 된 가장 큰 이슈는 결국 노선의 문제였다. 미시시피강 서부를 향해 내달릴 철도가 과연 동부의 어느 지역과 연결되어야 하느냐 문제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매달린 핵심 의제였다. 북부인들은 동북부의 철도망과 연결된 시카고가 대륙횡단철도의 동부 기점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남부인들은 세인트루이스, 멤피스, 뉴올리언스 등을 선호했다. 남과 북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이미 대륙철도노선을 두고 첨예하게 갈라졌다.

북부와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 조건에 따른 이질적 문화, 그리고 이런 차이를 더 극대화하는 정치인들의 노력에 의해 더욱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북부가 보기에 남부는 철지난 중세 봉건 사회였다. 귀족처럼 노예를 부리고 폐쇄적 자기 문화를 고집하는 남부는 진보라는 시대적 가치를 외면하는 뒤떨어진 집단이었다. 남부가 미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 자유로운 토지와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고 노예 제도가 전 미국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북부의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에 밀려 일자리를 잃고 부랑자가 될 것이고, 소수의 백인들만 잘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부 백인들은 흑인들을 위해 노예해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노예 제도가 백인들에게 위협을 준다고 생각했기에 반대했다. 남부 사람들은 노예제가 유지시켜주는 우월한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부랑자와 술주정꾼이 넘쳐나고 도박과 부패가 일상화된 북부의 탐욕스런 삶이 미국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여겼다. 공장 안의 수많은 사람들, 무질서로 가득 찬 도시와 거리들, 이민자들 틈바구니에서 서로 의심하고, 어딜 가나 불결함을 떨칠 수 없는 북부의 풍경을 남부는 지옥의 묵시록처럼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횡단철도의 기점을 선점하기 위한 남과 북의 대립은 강도를 더해갔다. 남부가 대륙횡단철도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었다. 미국의 지형상 남쪽으로 횡단하는 게 거리를 최대한 단축시켜 빠른 시일 안에 공사를 완공시킬 수 있었기 대무이다. 또한 남쪽에 건설하게 되면 거대한 산맥들을 피할 수 있어 공사의 수월성에서도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남부에서 제안한 대륙횡단철도 노선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멕시코 영토를 만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결국 미국 영토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온 멕시코 영토 때문에 이 구간에서는 멕시코 국경을 따라 우회노선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뼛속까지 남부인이었던 미시시피 주 출신 제퍼슨 데이비스 육군부 장관은 1953년 철도 건설업자 제임스 개즈던(James Gadsden)을 멕시코로 파견한다. 개즈던은 멕시코 정부를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1000만 달러를 주고 철도 건설 부지용 땅을 사들였다. 지금의 뉴멕시코주와 애리조나 주의 일부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미국 속으로 뚫고 들어온 눈엣가시와 같았던 멕시코 땅을 면도날로 잘라내듯 잘랐다. 사실상 국경을 다시 그어버린 것이다. 국경을 변경하면서까지 대륙철도노선을 놓으려 할 정도로 남부인들의 대륙횡단철도 유치 노력은 끈질겼다.

반면 북부인들은 대륙횡단철도가 남부로 연결되면 노예제가 전 미국으로 확산될 것을 염려했다. 특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북부의 산업에 대륙횡단철도는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부 노선은 시에라네바다와 로키라는 거대한 두 개의 산맥을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선이 인디언 거주지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도 있었다. 철도 노선이 인디언 거주지를 통과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이면서 북서부의 민주당 지도자인 스티븐 더글라스(Stephen A. Douglas)는 자신의 지역으로 철도가 관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법안을 제출했다. 아이오와주의 서쪽, 네브라스카 지역을 미국의 '준주'로 편입하고 여기에 백인 정착지를 만드는 법안이 그것이다. 이 법안은 당연히 남부의 반대를 불러왔다. 새로 생기는 '준주'가 노예가 없는 주가 됨으로써 노예제를 둔 주를 점점 소수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북과 남은 미주리 타협선(Missouri Compromise, 위도 36도 30분 위쪽의 새 영토에서는 노예제를 허용치 않음)이라는 것에 합의한 상태였다. 더글라스가 철도 부설을 위해 백인 정착지를 만들자고 한 지역은 이 미주리 타협선의 위쪽이어서 남부의 화약고에 불을 지른 셈이었다.

한 발 물러선 더글러스는 미주리 타협선에도 불구하고 백인 정착지의 노예제 허용 여부는 지역 의회가 결정하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그러나 남부의 민주당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미주리 타협안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더글라스가 남부 의원들의 주장에 합의하자 이번에는 북부의 정치인들이 들고일어났다. 1854년 남부의 만장일치, 북부 일부의 민주당의 가세로 '더글라스 법안'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으로 가결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 내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된다. 더글라스 법안에 대한 입장에 따라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노예제를 반대하는 반네브래스카 휘그당원과 반네브래스카 민주당원들의 새로운 당, 바로 공화당이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북부의 대변자가 되었다. 반면 노예제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되어 있던 민주당은 링컨을 앞세운 공화당에 패배한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남부인들에게 절망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남부의 주들은 노골적으로 북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연방 탈퇴 결정을 내렸다. 수십 년 동안 쌓여온 인화성 높은 문제들이 링컨의 당선을 계기로 폭발되었다.

▲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 포트 섬터 요새
ⓒhttp://wac.450f.edgecastcdn.net/80450F/comicsalliance.com/files/2012/06/fort-sumter.jpg

남부가 장악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구에 인접한 섬에는 연방군의 요새가 하나 있었다. 섬터 요새(Fort Sumter)로 불리는 연방군 기지에는 소규모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최고 책임자는 소령이었다. 남부는 연방군을 향해 기지를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링컨은 남부의 요구를 일축하고 연방 재산인 섬터 요새를 "보유하고 점유하고 소유할것"이라고 밝혔다. 링컨은 이어서 식량 등의 보급품을 실은 선단을 찰스턴 항구로 보냈다. 링컨은 남부가 연방 재산을 인정하면 군사적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섬터 요새로 보낸 보급선에도 병력이나 군수품을 제외한 보급품만을 선적했다. 포위되고 고립되어 있는 병사들에게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은 보장하라는 연방정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링컨의 전쟁 유도 전략이라고 보는 시각 역시 만만치 않다. 인화물질이 쌓인 공간에서는 아주 사소한 문제도 거대한 폭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남부 한복판에 들어선 연방군 기지를 인정할 수 없는 남부와 달리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마저 거부하고 압도적 물리력으로 요새를 공격해 전쟁을 일으킨 세력에 대한 항전은, 그 자체로 양측 모두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1861년 4월 12일 남과 북은 전쟁의 포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의 출범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와는 무관하게 1861년 6월 28일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Central Pacific Railroad, 이하 CP)가 출범한다. 흔히 CP의 빅포(Big4)라 불리는 르랜드 스텐포드(Leland Stanford) 사장, 콜리스 헌팅턴(Collis Huntington) 부사장, 마크 홉킨스(Mark Hopkins) 재정 담당, 찰스 크로커(Charles Crocker) 이사를 중심으로 한 법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개발 특수 과정에서 부자가 된 사람들로 전형적인 상인들이었다. 구름을 뚫고 서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 동부로 향하는 철도를 놓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허황된 망상처럼 보였다. 이 때문에 CP설립 당시 의회나 캘리포니아 주 당국, 자본가 연합은 한 푼도 출자하지 않았다.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의 노선도. 새크라멘토에서 프로몬트리까지 대륙횡단철도 노선의 서부 쪽을 맡았다. ⓒhttp://www.cr.nps.gov/history/online_books/hh/40/images/hh40k1.jpg

CP의 출범을 사기극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돈만 아는 상인들이 그럴듯한 청사진으로 투자자들을 속여 한탕 해먹으려는 속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역사학자인 휴버트 밴크로프트는 "방대하면서도 위험으로 가득한 이 사업에 투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속은 것이다. 이 사업에 재산을 내건 상인들은 그들의 재산을 시에라네바다 협곡에 던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비아냥댔다.

CP에 돈을 낸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었고, 미국 서부 개발 시대의 정신인 '무모한 도전'을 감수할 정도의 배포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철도 건설에 영혼을 바친 테오드로 디 유다(Theodore D. Judah)라는 탁월한 기관장이 있었다.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필요한 진실되고 헌신적이면서 투철한 모험심과 힘, 두뇌를 모두 소유한 비범한 인물이었던 유다는 광할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과 수많은 강의 지류들을 답사하며 횡단철도의 노선에 적합한 지형을 찾았다.

유다는 철도회사를 창설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유다의 아이디어를 비웃는 투자자들 앞에서 좌절감만 느껴야 했다. 여러 차례 투자자를 구하기 위한 설명회 끝에 새크라멘토의 부자들이 모인 회합에서 유다의 계획은 새로운 희망을 만나게 된다. 직물점을 운영해 돈을 번 크로커를 비롯한 CP의 '빅포' 자산가들이 모인 회의에서 유다는 자신의 계획으로 네바다 광산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를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있음을 설명했고 네바다 광부들과 거래해 돈을 벌고 있는 상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23차례나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답사한 유다의 뚝심을 상인들이 인정한 것이다.

1861년 9월 4일 CP의 '빅포' 중의 하나인 스텐포드가 선거를 통해 주지사가 되었다. 센트럴 퍼시픽 회사의 사장이 주지사가 되었다는 것은 서부 철도 건설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주변 지역의 철도에 대한 완벽한 보고서를 완성한 유다는 CP의 '빅포'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연방정부의 국채와 주정부가 인정한 토지를 확보하여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고 새로운 '퍼시픽 철도법'이 제정되도록 힘을 쏟기 위해서였다. 철도와 관련한 입법은 한결 수월해졌다. 북부 노선을 반대해온 남부 의원들이 모두 의회를 떠나 남부연합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철도 부설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은 전쟁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계속되는 패배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월 좋게 철도 부설 논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62년 1월 21일 국회에서 캘리포니아 출신 하원의원인 아론 에이 사전트(Aron A. Sargent)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토론 주제와는 전혀 다른 퍼시픽 철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전트 의원은 과거 항해 중 만난 유다를 통해 퍼시픽 철도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넓힌 것을 계기로 유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인사였다. 사전트 의원은 먼저 전쟁을 위해서도 퍼시픽 철도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부대 및 군수품의 이동, 우편물 수송 등에 있어서 수백만 달러의 전쟁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서부 인디언들의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철도의 역할도 강조했다. 또 태평양 연안으로 동부 이주민의 이동을 돕고 중국 및 일본과 교역을 더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퍼시픽 철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워싱턴 정가에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퍼시픽 철도가 캘리포니아를 북군의 편으로 만들 것이란 전망이었다.

북군과 남군은 서부의 거대한 땅 캘리포니아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전트 의원의 발언은 요즘 한국의 국회가 그렇듯, 대다수 의원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지만 1주일 만에 하원에 퍼시픽 레일로드 위원회 산하 특수 분과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862년 봄 유다가 제출하고 사전트 의원이 지지한 법안은 다음 회기로 넘어가면서 폐기될 운명에 처했으나 여러 의원들의 요구안을 수용하면서 가까스로 폐기 위기를 넘긴다. 퍼시픽 철도에 쓰이는 레일을 비롯한 철제류는 반드시 미국산을 써야 한다는 것 등이었는데 물론 이런 조항을 추가하게 만든 의원은 펜실베니아 주에 주물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법안 제정에는 링컨의 의지도 중요하게 작용됐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퍼시픽 철도법의 통과를 촉구했으며 당장이라도 공사를 시작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밝혔다. 태평양 연안을 북군에 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퍼시픽 철도의 건설은 중요하다는 게 링컨의 입장이었다.

1862년 5월 6일, 퍼시픽 철도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고 6월 20일 상원을 통과했다. 7월 1일 대통령에게 보내졌고 링컨이 서명하면서 법률로 채택되었다. 7월 1일은 남군 로버트 리(Robert E. Lee) 장군의 공세에 맞서 북군 조지 매클레런(George McClellan) 장군이 워싱턴 방어를 위한 공방전을 한창 수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미 연방은 이제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남북전쟁과 대륙횡단철도 건설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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