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몰아치기'를 바라보는 사람의 숨이 가쁘다. 노 대통령은 지난 26일(일) '여야정 정치협상회의 제안', 28일(화) '탈당 가능성 및 임기중단 언급', 30일(목) '신당 절대반대, 열린우리당 사수 선언'으로 하루걸러 하나씩 메가톤급 폭탄을 여야 정치권에 던지고 있다.
여야 동시 압박을 노린 노 대통령의 이같은 행보는 현재까지 여당과는 서로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치킨게임으로,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압박 성공이란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내부 사전조율 거친 연쇄폭탄발언
노 대통령은 지난 25일 자신이 주재한 참모회의에서 '여야정 정치협상회의 제안'을 결정하며 △한나라당이 제안을 수락할 경우 △거절할 경우 △한나라당이 전제조건을 제시할 경우의 세 가지 보고서를 요구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그 이후 행보는 이 가운데 두 번째 보고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28일 국무회의에서도 기자들과 방송카메라 앞에서 "한마디 할까요"라고 말문을 연 다음 바로 폭탄선언을 했다. 이 발언 역시 국무회의 직전 일부 핵심참모들과 조율을 거친 것이라는 전언이다.
30일 '신당 반대-우리당 사수'선언을 발표한 윤태영 대변인도 준비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요약하자면 '정치협상회의 제안→한나라당의 거부→탈당 및 임기중단 언급→여당의 맹공→신당 반대 및 당 사수' 식으로 공수가 전환되고 있다는 것.
'숨 고르기' 기간이었던 27일(월), 29일(수)에 보인 행보도 만만찮았다. 노 대통령은 27일에는 세 달을 끌어 온 전효숙 전 헌법재판관 문제를 '지명철회'라는 방식으로 털어버렸고 29일에는 전남 무안을 방문해 "노무현 당신 임기 다 끝나가지 않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치는 50년, 100년을 보고 하는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지역주의 반대' 선언의 앞과 뒤
노 대통령의 이같은 행보는 결국 30일 '우리당 사수-신당 반대' 발언으로 이어졌고 이 발언을 참고해 복기해보면 28일의 '탈당 가능성, 임기중단 언급'의 의미도 명확해 진다.
대통령의 탈당이 여당 일각에선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임기중단' 언급은 탈당카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
친노직계인 이화영 의원은 "당이 대통령을 너무 압박하면 안 된다. 탈당 이상(하야)의 경우 정치권이 감당할 수 있겠냐"며 압박을 노골화하며 이같은 해석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여당에서는 "대통령은 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재반격이 나왔고 결국 청와대는 30일 '당 사수', '지역주의 강화하는 신당 반대'로 정면대결을 선포했다.
그간 청와대는 여권의 정계개편 움직임에 대해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반대해 온 분으로서 지역주의가 회귀되는 쪽으로는 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당에서 확실히 결정된 것이 없는 가운데 뭐라 특별히 말할 것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따지고 보면 '확실히 결정된 것이 없는 것'은 30일도 마찬가지다. 단지 당청관계 갈등이 점점 높아지고 있을 뿐인데 대통령은 별안간 '지역주의 신당반대-당 사수'를 선언했다.
지난 9월 우리당 창당공신이지만 지금은 통합론자로 돌아선 천정배 의원은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대통령이 '나와 뜻이 다르니 우리가 전당대회에서 심판을 받아보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더라"고 전한 바 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우리당 사수' 선언은 결국 천 의원 전언의 연장선이자 여당 내 통합론자들에 대한 선전포고로 해석된다. 대통령이 손에 쥔 무기는 반지역주의.
사실 지난 몇 달 간 친노세력도 재결집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안희정, 여택수 등 대통령 측근이 지역을 돌았고 노사모도 움직였다. 하지만 여당은 기간당원제 폐지로 힘을 뺐고 노사모 역시 청와대 비공개 행사를 몰래 녹취해 유포한 사건으로 내홍에 빠지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인 한 자릿수인 점을 감안하면 '노무현'이라는 깃발 아래 '반지역주의' 슬로건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내걸어도 세가 결집되긴 힘들어 보인다. 나름의 전략과 수순을 정하고 달려든 노 대통령이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뒷받침해줄 당내 세력을 과연 얼마나 안정적으로 형성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는 그로서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김근태계, 정동영계를 막론하고 친노직계를 제외한 모든 여당 세력을 '지역주의 회귀세력'으로 규정하며 선전포고를 한 노 대통령의 딜레마는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지역주의 전선에서 노 대통령은 무엇을 얻을 수 있나
대여 전선이 이같이 험난한 반면 한나라당에 대한 압박은 어느 정도 먹히는 모양새다. 기본적으로 '부자 몸조심'해야 하는 한나라당으로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대통령이나 여당과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임기중단' 언급은 대권레이스에서 현재 선두를 질주하는 이명박 전 시장과 다른 주자들을 교란시키는 효과도 가져왔고 상황의 급변을 두려워 하는 한나라당은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다. 대통령은 임기를 무사히 마쳐야 한다"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30일 한나라당은 지난 1년 여 동안 끌어 왔던 비정규법, 국방개혁안 등 31개 법안 처리에 합의해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발목잡기가 너무 심해 국정이 혼란스러워졌다'는 역풍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으로서는 앞으로도 일정 부분 '협조적 태도'를 견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파병 연장, 한미FTA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의 경우 오히려 여당보다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의 우군 역할을 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우리당과의 힘겨루기는 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노 대통령이 당사수를 선언한 이상 친노세력들과 함께 끝까지 우리당 간판 내에서 '버티기'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통령이 여당을 상대로 '지역주의 전선'을 그어 과연 승리할 수 있을지, 승리한다면 얻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역당으로 돌아가서 얻을 명분도 실리도 없다"고 단언하는 대통령이 지켜야 할 명분과 실리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여권 내에서 주도권을 되찾으면 국정 난맥상이 풀릴까?
최근 제도 언론은 부동산 문제로 뜨거웠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은 한미FTA, 노사관계로드맵을 반대하는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달궈졌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번 주 내내 지속되고 있는 전격전을 통해 이들 주제를 모두 신문 1면에서 밀어내버렸다. 게다가 앓던 이 같은 비정규 법도 처리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만 해도 큰 성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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