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왜 '찬밥신세' 못 면하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왜 '찬밥신세' 못 면하나

[박동천 칼럼] 닉슨은 사법절차방해로 탄핵소추 됐는데…

자유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문구는 현재 상해교통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다니엘 벨(Daniel A. Bell)이 1995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벨은 아시아의 유교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프레임으로 자유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로 그 문구를 사용했다. 한편 인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약하는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1997년에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한 글에서 (☞ "The Rise of Illiberal Democracy"), 선거는 비교적 자유롭게 행해지지만 시민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는 체제를 가리켜 "자유 없는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자카리아는 그 글에서 민주주의와 헌법적 자유주의를 구분하고, 헌법적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로 이어지지만 민주주의는 헌법적 자유주의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아시아의 대다수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흐르는 까닭이 헌법적 자유주의의 부족에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은 간헐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장준하, 문익환, 김대중 등 민주화에 매진한 세대도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는 못했던 터에,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진영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느라 바빠서 자유주의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틈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김종필의 전유물처럼 전락했고, 이윽고 극우파에 의한 종북몰이를 정당화하는 수사로까지 왜곡되었다. 그리하여 윤석열을 한직으로 좌천시킨 바로 그 날, 김기춘은 검찰 동우회라는 자리에 가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잘 지켜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기염을 토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 정치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헌법적 자유주의의 기틀을 세우는 과제에 주목해야 한다. 헌법적 자유주의란 헌정주의와 자유주의의 원리를 합한 표현인데, 실제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곳에 헌정주의는 있을 수 없고, 헌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곳이라면 개인의 자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헌정주의와 자유주의는 같은 동전의 양면에 해당한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5·16과 유신 쿠데타가 헌법을 유린했다는 점을 새삼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1987년 이전에 한국의 헌법은 '명목적'인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권 아래 다시 한국의 헌법은 권력의 주구 노릇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헌정주의의 원리는 헌법전이라는 제목 아래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가지고 있을 때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들이 권력의 전횡을 통제할 수 있을 때 확립되는 것이다. 권력의 전횡을 헌법이 통제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권력기관이 무슨 짓을 했는지가 샅샅이 파헤쳐져야 한다. 이명박 치하에서는 용산참사, 천안함 침몰, 이명박의 사저에 관련된 비리, 4대강 사업 등등, 비린내가 진동하는 숱한 의혹에 관해 어떤 진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넘어가고 말았다. 오히려 국가의 공권력은 진상을 은폐하는 데 동원되고,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종북으로 몰아 탄압하는 악행이 저질러졌다.

박근혜는 선거부정에 관한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데도, 오히려 그러한 증거들을 파헤친 검사들을 찍어내고 좌천시키고 있다. 40년 전 미국 대통령 닉슨이 탄핵소추를 받게 된 첫 번째 죄목이었던 사법절차방해를 21세기로 접어든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버젓이 저지르면서 도리어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87년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희생의 사례만 쳐도 4·19와 5·18과 6·10을 거쳤던 이 나라에서 어떻게 아직도 헌정주의의 원리가 이토록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요동을 치는 것일까? 헌정주의의 원리가 곧 법치주의의 원리이며, 헌정주의라고 부르든 법치주의라고 부르든 개인의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이 사회가 아직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는 물론 공동체적인 기획과 종종 충돌할 수 있다. 사회의 평화로운 질서, 안보, 경제성장, 공동체의 미풍양속 등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양보되어야 할 때는 매우 많다. 그러나 특정 개인의 특정한 자유가 가령 안보를 위해 양보되어야 한다면, 먼저 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을 때 어떤 안보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따지는 과정을 거쳐야 헌정주의의 원리가 충족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보수파는 물론이고 진보파에 속한 사람들조차 이를 따져 묻지 않는 아주 어리석은 경향이 있다. 예컨대 양심상의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또는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꾼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새누리당 의원이나 보수적 지식인은 물론이고, 민주당이나 진보당의 의원들 및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조차 심각하게 따지지를 않는 것이다.

청계천의 피복 공장에 환풍기라도 달아 달라는 전태일의 요구를 들어줬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에 어떤 지장이 초래되었을지 묻지 않는 어리석은 버릇에 기생해서 "박정희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는 미신이 만들어진다. 삼성 계열사에 노조가 생기면 한국 경제에 무슨 지장이 초래될지를 묻지 않는 어리석은 버릇에 기생해서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미신이 만들어진다. 주민 직선으로 뽑은 교육감에 대해 이명박 치하의 권력이 얼마나 무도한 탄압을 자행했는지를 따지지 않는 어리석은 버릇에 기생해서 "직선제가 문제"라는 미신이 만들어진다. 이런 사례들을 일일이 거론하자면 무한정 이어갈 수 있다.

자유는 사회의 평화적 질서, 안보, 경제성장, 미풍양속의 보존 등, 다른 가치를 위해 필요하다면 제한될 수 있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의 평화적 질서", "안보", "경제성장", "미풍양속의 보존" 따위 명분만 내걸면 아무 곳에서나 누구의 어떤 자유라도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틀릴 뿐만 아니라 사악한 왜곡에 해당한다. 필요하다면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은 오직 필요할 때에만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어떤 제한이 왜 필요한지를 따져서 검토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법대생들이 달달 외우는 헌법 교과서에서부터 이렇게 따지는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예컨대, 헌법 19조에 규정되어 있는 양심의 자유를 해설하면서 거의 모든 헌법 교과서들은 양심형성의 자유와 양심실현의 자유를 나누고 들어간다. 그러고는 양심형성의 자유는 내면의 자유이기 때문에 무제한으로 보장되지만, 양심실현의 자유는 외면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제한이 불가피하다고 자랑스럽게 설파한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한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양심실현의 자유 중에 제한이 필요한 경우와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따져서 분별해야 한다는 지적은 편리하게도 생략된다.

국가가 요구하기만 하면 개인의 자유는 언제든지 제한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헌법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며, 장차 사법권력을 손에 쥐고 휘두를 청년들의 의식 안으로 아주 당연한 듯이 주입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국가가 애당초 왜 필요한지, 따라서 그럴 목적이 아니라면 애당초 법이 왜 필요한지를 따지지 않는 어리석은 버릇이 이런 식으로 세대를 건너 전승되고 있다.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해, 법과 사회생활의 본질에 관한 이해에 관한 한, 독재 시대 정도가 아니라 일제 군국주의와 심지어 조선 시대 전제 왕정에서 통용되던 발상이 여전히 이 사회를 이렇게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두 갈래의 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권력을 쥐기만 하면 '안보'를 내걸든, '경제성장'을 내걸든, '사회 평화'를 내걸든, 그럭저럭 명분과 표어만 내걸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체제를 원하는지, 아니면 권력기관의 행태를 낱낱이 감시할 수 있는 체제를 원하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국민의 일부에게 '비국민'이라는 낙인만 찍어버리면 그러한 '비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는 무시해도 괜찮은 체제에서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은지, 아니면 권력기관이 특정 개인들에게 들이대는 낙인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공론장에서 집요하게 따져서 가려내는 체제에서 살고 싶은지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권력에게 밉보이지만 않는 한, 권력이 나머지 이웃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모르는 척 넘어가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이웃에게 닥친 사회구조적 불행이 언제든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자각 아래 구조적 불의에 함께 분노하면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의 노예가 되어 굴종하면서 (하지만 날마다 전전긍긍 두려움에 떨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자유의 공기가 사회에 충만해질 때까지 미력이나마 기여하면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