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오랜 세월을 이상하게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에 대해 폄하(貶下)하는 것이 무슨 지성(知性)의 조건처럼 생각되어 왔다. 또 마치 원나라가 고려왕에게 강압적으로 결혼을 강요하였고(한국의 대부분의 관련 자료들의 논조가 이렇다.), 그 결혼동맹이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지름길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잘못된 역사교육의 탓이다. 결혼을 애걸한 것은 애초에 고려 왕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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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명 넘는 몽골 여성이 고려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몽골로 간 여인들의 이야기만 알고 있는데 몽골의 전문가인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교수에 따르면, 원나라 당시 무려 20만 명 넘는 몽골 여성이 원나라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를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게 됐다. (주1) 당시 몽골의 인구를 감안한다면 어마어마한 인구이다. 현재 몽골의 인구는 300만여 명 정도이고 내몽골에 1500만 명 정도가 있다.
우리가 원나라 시대를 중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과 몽골, 이 두 민족의 결합과 연합의 정도가 이 시기에 본격화되어 몽골의 인구를 감안하면 혈연적 강도가 매우 높아졌다. 만약 이 때 혼인을 통해서 민족 결합이 강화된 후 이들이 일부는 한반도로 일부는 내몽골, 몽골로 이주해 갔다면 현재 한국과 몽골 두 민족의 친연성(親緣性)은 매우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이전 시기에 이 두 민족이 서로 다른 측면이 있었다고 해도 이 시대에 결정적으로 두 민족 간의 융합이 극심히 일어나,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 이후 무의식적으로 한국과 몽골이 마치 형제처럼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중국을 장악했고 그 이후 형성된 북원(北元)은 이후 특별히 다른 민족의 이동이나 대규모의 융합이 거의 없어 그 혈통들이 그대로 온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시대 이전의 시기에 대한 민족 연구들을 보면 고려인들과 몽골은 이른바 이종동류(異種同類)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동안 필자는 이 부분을 신화적 관점과 지리적 관점, 역사적 관점(사료 분석) 등을 통해서 고증해왔다. (이 부분도 다른 장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원나라 시대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 시기에는 통혼(通婚)을 통해서 한국과 몽골 간의 혈연적인 친연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1990년 한국과 몽골이 수교한 이후 직항로가 열려 4만여 명의 몽골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몽골인만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몽골 전체 인구(약 300만 명)의 10% 가까운 몽골인이 한국 생활을 체험했다는 말이다. 학문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최기호 울란바타르 대학 총장(전 연세대 교수)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몽골은 언어·인류학 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했다.
▲ 현대 울란바타르(몽골 수도)와 국립공원 테를지 풍경. ⓒ김운회 |
그동안 잘못된 역사교육 탓으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을 비하해온 데에는 '몽골은 오랑캐'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른바 '새끼 중국인(小中華)' 근성으로 중국인에 대해서는 항상 존중하면서, (자기가 오랑캐이면서) 주변 민족을 비하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유학적(儒學的) 지성(知性)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원나라와 고려의 결혼동맹을 처음 추진한 것은 고려 원종(1219~1274)이다. 원종은 오랫동안 무신정권에 시달린 사람으로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국내적으로는 무신 관련 잔존 세력들을 통제해야 했고 땅에 떨어진 국왕의 위상을 높여야 했다. 또 대외적으로는 원나라의 간섭을 최소화하여 국내 정치의 독립적 기반을 쌓아야 했다. 최 씨 무신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이른바 '대몽 항쟁'으로 30여 년에 걸친 전란이 발생하여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가 경제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러 이를 복구하는데 원나라의 도움도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원종은 1270년 대도(大都 : 베이징)로 가서 원세조(쿠빌라이칸)를 만나 결혼동맹을 요청하였다. 당시 원종은 "우리나라가 귀국에 대해 청혼을 하는 것은 영원히 좋은 인연을 맺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의 분수에 넘치는 일을 청하는 듯하여, 오랫동안 감히 청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 모든 것들이 (귀국이) 원하는 대로 해드렸고 마침내 세자 또한 이 자리에 와 있으니 바라건대 황제의 따님(공주)을 세자에게 결혼을 허락하여 결혼의 예식을 이루게 되면, 우리나라는 번왕(藩王)의 직분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주2)
이에 대해서 원 세조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일단 국내 정치부터 안정시키라."고 권고하였다.(<고려사> 권 28 충렬왕 4년 7월) 그러나 다음 해인 1271년 원종이 원나라에 재차 결혼을 요구하였고 원 세조는 이를 수락하였지만, 공주가 아직 어려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3년 후 고려 태자(후에 충렬왕)와 원세조의 따님의 세기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고려사>는 태자와 공주가 한 수레에 타고 개경에 도착하니 백성들은 "백년의 난을 겪고 드디어 태평의 시대가 왔다."고 환호하였고 태자는 새 왕(충렬왕)으로 등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고려사>권89「齊國大長公主傳」)
▲ 몽골 황족 의상(울란바타르 박물관). ⓒ김운회 |
그러나 이렇게 고려 왕실은 필요에 따라 결혼동맹을 추진하였지만, 후에는 오히려 고려가 미적거리면서 혼인 동맹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어떻게 일가(一家)라면서 그럴 수가 있나?"라며 원 세조는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결국 당시 고려가 결혼동맹을 추진한 것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는 애당초 다루가치를 성가시게 생각했고 무신정권의 잔재로부터 왕권을 보호 내지는 강화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도 줄여야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결혼동맹이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고종 시대에 국내적으로는 권신(權臣)이 일어나 발호하고 대외적으로는 여진과 몽골이 군사를 보내어 해마다 침략하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다. 그러나 국왕이 스스로 조심하고 국법을 준수하고 그 수치(무신 정권이나 권신들의 횡포)를 잘 참았기 때문에 왕위를 보존하고 끝내는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高麗史節要>「高宗」)"라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결혼 없이 어찌 한 집안의 의리가 있겠느냐?
고려 원종의 청원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칸)였다. 원 세조는 처음 원종의 제의를 받고서는 일단 신중하게 대처하였지만 그다음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원 세조는 특이하게도 고려에 대해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고려를 쿠빌라이칸 만큼 사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통치자가 고려를 깊이 사랑한 것은 고려에게는 큰 행운이기도 했다. 원 세조는 자신이 황제의 지위에 오른 것도 일부분 고려의 덕분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유명한 일화이나 간단히 소개해 본다.
1259년 고려의 세자(후에 원종)가 4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원나라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쿠빌라이(원 헌종의 둘째 아들)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현재의 중칭(重慶) 인근인 파현(巴縣)의 조어산(釣魚山)에서 주둔하면서 남송 정벌 중이었고, 쿠빌라이의 정적인 아리크버케(원헌종의 막내 아들)는 수도인 화림(和林)에 있었다. 고려 세자가 가는 도중에 원 헌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원나라는 황위 계승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고려 세자는 고심하다가 쿠빌라이를 만나기로 한다. 고려사절단은 호북(湖北 : 후베이)의 양양(襄陽)에서 수도로 급하게 올라오던 쿠빌라이를 만났다. 이 때 자신을 선택해 그 먼 길을 달려온 고려 세자에 대해 쿠빌라이는 감격하여 "일찌기 당태종이 몸소 공격해도 항복받지 못했다.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내게로 돌아왔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하였다(<고려사>「원종」).
젊은 시절 쿠빌라이의 롤모델은 당태종(唐太宗)이었고 '당태종 마니아'였던 쿠빌라이는 황위에 오르기 위해 남다른 준비를 해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았던 고려의 세자를 진중(陣中)에서 만나게 되어 감격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이 만남이 바로 자신이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징조로 여겼다. 몽골인들에게 '하늘의 뜻'이라는 말은 숙명(宿命)과도 같은 의미이다.
쿠빌라이는 고려 세자와 정담을 나누며 함께 북상하여 개평부(開平府)까지 오다가 원종(세자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원 헌종(쿠빌라이칸의 아버지)과 고려 원종(세자의 아버지)이 한 달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불안한 마음으로 귀국하게 되자 쿠빌라이는 극진히 애도하면서 다루가치를 딸려 보냈다가 그것도 불안하여 급히 사신을 보내면서 "고려의 신하로서 감히 난동을 계속하여 임금을 범하려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고려의 임금을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짐(원 세조)의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고려사절요> 「원종」)"라고 하여 고려 권신들이나 잔존 무신 세력의 발호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였다. 원 세조의 덕분으로 고려는 왕정이 복고되고 나라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황제와 혈통을 함께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여자가 귀하여 근친상간의 폐해가 자주 나타나는 유목민들의 경우 혈연을 맺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황실이 아무하고나 통혼(通婚)할 수도 없다. 그래서 원나라 황실은 혈통적으로 가장 가까운 고려인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을 특히 원세조(쿠빌라이칸)가 적극 추진하였다. 고려를 특히 사랑한 원세조는 몽골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결혼정책을 폈다. 원세조는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을 기존의 약혼을 파기하면서까지 충렬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몽골법에 결혼을 하여 일가가 되는 것은 진실로 교친하는 것이라 했으니 짐이 어찌 허락하지 아니하리오."라고 말하고 있다.(주3)
여기서 유념할 것은 충렬왕(1236∼1308)은 1275년 등극하였는데 이 당시 나이가 39세로 오늘날로 치면 중년 또는 장년의 나이였다. 그리고 이 나이에 16세의 몽골 황녀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당시로 봐도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원세조(쿠빌라이 칸)가 아꼈던 막내 따님을 늙은 신랑에게 보낼 만큼 절박한 사정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원 세조가 충렬왕을 황제의 사위로 삼았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고려 사랑을 보여준다. 즉 충렬왕의 경우와 같이 황제의 따님(원성공주)을 다른 나라에 시집을 보내는 일은 원나라에서는 이전까지 없었던 일이다. 더욱이 당시 고려왕들은 대개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같은 결혼은 고려로 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 몽골 귀족(고위 인사) 부부 모습(울란바타르 박물관). ⓒ김운회 |
고려-원나라의 혼인, 친족관계가 목적
한국에서는 고려와 원나라 황가의 결혼을 단지 정략적이거나 식민 속국을 위한 전초단계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이다. 칭기스칸이 처음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옹기라드(Onggirad)와 이키레스였으며 이후에 옹구드(Onggud), 오이라드 등도 있었다. 이들 부족들은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을 보냈고 스스로 원에 귀부(歸附)하였던 세력들이다.(주6)
고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고려는 남송과 더불어 원나라를 가장 괴롭힌 국가에 속한다. 고려는 무려 30여 년간을 원나라에 허언(虛言)과 사기(詐欺)를 일삼았다(다른 장에서 상술함). 원나라는 원래 사해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각 국가의 종교와 문화를 보호해주고 철저히 능력에 따라 등용한 나라지만, 남송인들에게는 내우 각박하였다. 그런데 고려에 대해서는 마치 형제관계를 맺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하였다.(이 '역사적 미스터리'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이 이번 연재의 목적이기도 하다)
원나라와 고려의 결혼동맹은 이전의 종주국 - 식민국(번국)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띠게 된다. 원나라의 부마(쿠레겐)가 된다는 것은 속국에서 원나라의 친족(親族) 관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그 지위가 매우 높았고 기타의 귀족과도 비교될 수가 없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래 "원나라의 특별한 개국공신이 아니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없고 일단 부마가 되면, 제왕(諸王)의 대우를 받는다."라고 규정되어있었다.(주7) 이것은 중국의 고대 왕실들이 정략적으로 맺는 혼인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친족 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1269년(원종 10년) 11월에 원나라 병부시랑 흑적이 사신으로 왔을 때, 원종이 연회를 베풀고 상좌에 앉기를 청하니, 흑적은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왕태자는 황제의 따님과 혼사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저희는 황제의 신하요, 왕은 부마 대왕의 아버지이니 어찌 감히 대등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한 것으로 봐도 결혼을 약속한 이후 고려의 지위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주8)
원나라 조정의 장례 법도에는 "빈전(殯殿)에는 몽골인이 아니면 감히 접근치 못하는데 오직 고려만은 참여할 수 있으므로 고려왕을 따르는 신하들이나 종복들은 비록 천민이라도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한다.(주9) 빈전(殯殿)이란 인산(因山) 때까지 왕이나 왕비(王妃)의 관을 모시던 전각(殿閣)을 말하는데 충렬왕은 쿠레겐(부마)으로서 쿠빌라이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또 충렬왕은 원 세조 손자인 원 성종(테무르칸)의 즉위식에도 참가했는데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대몽골 제국(원나라)의 권력 서열의 7위에 해당하는 좌석에 앉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1294년 충렬왕 4년 원나라) 황태자가 황제위에 오르는데, 이가 성종이다. (고려) 국왕이 공주와 함께 금잔 등을 바쳐 공물을 충당하고 축하 하례를 표하기를 마치자, 황제가 국왕에게 명하여 연회에 참석하시라고 간곡히 부탁(乞)하였다. 이 때에 (원나라) 제왕들과 부마들이 다 모였는데 왕이 제7위에 좌하였다." 라고 하였다.(주10)
당시 원 황제 성종은 "(충렬왕께서는) 공(功)이 크시고 연세 또한 높으시기 때문에 궁궐에 출입하실 때는 작은 수레를 타고 궁전 앞까지 오시게 하라."는 조서를 내리며 백은(白銀) 3만 량을 하사하기도 했다.(주11)
이런 점에서 볼 때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 왜 이런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당시의 원나라 지배층이 분명히 밝혀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알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원세조(쿠빌라이칸)의 고려에 대한 사랑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고 어떤 민족적 동질성(同質性)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 점은 몽골 황제의 명령으로 편찬한 <몽골비사>에서 말하는 칭기스칸의 시조모(국모)인 알랑고아가 고주몽(코릴라르타이 메르겐 : 코리족의 명궁)의 따님으로 나타난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주12) 이 알랑고아 신화는 고구려의 유화부인 신화의 몽골 버전(Mongol version)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몽골이라는 말이 맥골(맥고구려)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사실은 칭기스칸이 금나라 황제 알탄 칸의 청으로 타타르를 정벌한 뒤 받은 작호가 '자오드 까오리' 즉, 고려왕(高麗王) 또는 고려후(高麗侯)이다.
▲ 몽골 비사(울란바타르 박물관). ⓒ김운회 |
한국의 관련 전문가들에 따르면, 몽골 할흐골솜 설화엔 '고리(코리)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고 하고 몽골 전문가들은 '코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쪽으로 가 고구려 칸이 됐다.'고 한다(이것이 몽골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즉 '까오리 또는 코리(Korea)'라는 한 뿌리에서 한반도에는 부여·고구려가, 몽골 대초원에서는 몽골족이 나왔다는 얘기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코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옛날 동쪽으로 가 부여·고구려의 뿌리가 됐다고 한다(몽골족의 기원에 관한 종합적 검토는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몽골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마치 청태종이 조선 인조(仁祖)의 온갖 무례함을 다 받아주면서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관대하게 대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다.
원 황실과 친족 관계가 된 고려왕은 원의 다른 제왕들처럼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었고, 원황실로부터 많은 보상과 지원을 받았다. 또 고려 국왕에게는 역참을 제공하여 고려국왕이 원나라 수도를 갈 때는 신속하게 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주13)
필자는 한국과 몽골의 관계를 보면, 정호승의 시(詩)의 다음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밤마다 별빛으로 빛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흔들어 새벽을 깨우는가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본문 주석 (주1)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와 향후 전망」『한몽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 <신동아>(2007.6월호). (주2) 甲戌王上書都堂請婚曰: "夫小邦請婚大朝是爲永好之緣然恐僭越久不陳請今旣悉從所欲而世子適會來覲伏望許降公主於世子克成合巹之禮則小邦萬世永倚供職惟謹."(<高麗史> 26卷 元宗 11年) (주3) "若請婚則聖旨云, 韃旦法, 通媒合族, 眞實交親, 敢不許之"(<高麗史> 26卷-「世家26-元宗2」) (주4) 이이화<한국사 이야기7>(한길사, 2005) 211쪽 참고. (주5) 庚戌元遣岳脫衍康守衡來王出迎于宣義門外詔曰: "爾國諸王氏娶同姓此何理也?旣與我爲一家自宜與之通婚不然豈爲一家之義哉!"(<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주6) 보르지기다이 바타르<팍스몽골리카와 고려>(혜안, 2009) 72∼79쪽 참고. (주7) 元室之制 非勳臣 世族及封國之君 則莫得尙主 是以世聯戚畹者 親視諸王 (<元史> 卷108「諸王表」) (주8) 癸亥王宴黑的等使坐上座黑的等讓曰:"今王太子已許尙帝女我等帝之臣也王乃帝駙馬大王之父也何敢抗禮王西向我等北面王南面我等東面." 王辭曰: "天子之使豈可下坐?" 固辭東西相對. <高麗史> 26卷-世家26-元宗2-10 (주9) 元朝喪制非國人不敢近唯高麗得與焉故王之從臣雖輿臺之賤出入無禁. (<高麗史> 31卷-世家31-忠烈王 20) (주10) "甲午皇太子卽皇帝位是爲成宗王與公主獻金盞銀鏤葵花盞 … 水獺皮八十一領以充庭實表賀禮訖帝命王赴宴時諸王駙馬畢會王坐第七"(<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11) 己亥帝以王功大年高詔出入乘小車至殿門. 乙巳帝賜王銀三萬兩.<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20 9월,10월 (주12)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해냄, 2006)> 6. 아리수를 아십니까? 및 <대쥬신을 찾아서 2(해냄, 2006)> 19. 몽골, 또 다른 한국 - <원사(元史)>는 또 하나의 <고려사> 참고. (주13) 구체적인 사실들은 보르지기다이 바타르(2009) 73∼78쪽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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