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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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한 세밑입니다.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를 한 대통령의 시대, 그것도 여성 대통령 시대의 첫해가 이렇게 흘러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13년의 끝자락이 신(新) 공안 정국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에도 청와대는 눈 감고 귀 닫은 듯 "자랑스러운 불통"이라며 궤도 수정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 구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됐습니다. 때로는 종북 척결이라는 반공의 깃발로, 때로는 야당과 노동조합의 기능을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정작 정상의 범주에서 가장 동떨어진 집권세력의 질주가 이렇게 도를 넘어서다 보니 국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가를 시작으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확산되고 있고, 시국집회에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참여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종교계를 선두로 정부에 경종을 울리는 시국선언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국민의 직접적인 대립은 대의제 정치체제의 가장 불길한 징후입니다. 돌아보며 반성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새 출발을 준비해야 할 세밑 정국인데, 올 한해의 다섯 가지 정치 이슈를 뽑아보니 모두 매듭지어지지 않은 진행형 이슈입니다. 정치가 문제 해결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러면 국민들이 괴롭습니다. 우리를 괴롭힌 지난 1년의 레퍼토리를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 지난 2월 18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
■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
2013년 한 해 벌어진 그 모든 정치 갈등의 뿌리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2011년부터 2012년 12월까지 조직적으로 온라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정치 댓글을 달고 유포했는데, 그 중 검찰이 기소한 트위터 글만 현재까지 121만 건에 이릅니다. 국정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정부기관의 대선개입 혐의까지 드러났습니다. 지난해 대선이 범정부적인 부정 선거로 치러진 게 명백해진 겁니다. 국가기관이 나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사건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지만, 그 진상의 규명을 가로막는 세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점도 확인됐습니다. 과거 정권은 대선 개입이라는 범죄를, 현재 정권은 이의 은폐라는 2차 범죄를 자행하고 있는 셈이죠.
진상 규명이 안 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정당성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의 심경이 얼마나 곤혹스러울지는 짐작이 가지만, 그렇다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지난 정부의 일일지라도 현재 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집권자로서 깨끗하게 사과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박 대통령이 정도(正道)를 택했다면, 국민들은 생채기가 났을지라도 새 정부를 보듬고 힘을 실어줬을 겁니다. 그런데 사태 대응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다 보니, 이젠 국민들의 합리적인 의심에 '대선 불복'이라는 억지 프레임을 씌우기에 이르렀고 야권이 발의한 특검법을 과반 여당의 힘에 기대 누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 출구인 특검마저 무산될 경우,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건은 박 대통령의 5년 임기 내내 발목을 잡는 덫이 될지도 모릅니다. 박 대통령이 이제라도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수사 외압'의 상징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임명된 첫 번째 검찰총장이 느닷없는 혼외 자식 의혹으로 6개월 만에 사퇴한 일은 여러모로 석연찮습니다. <조선일보>의 매우 부실한 의혹제기로부터 시작돼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채동욱 찍어내기' 사건은 권력과 언론의 유착 의혹을 샀습니다. 채 전 총장이 낙마한 형식적 이유는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조차 혼외 자를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여론 재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권력과 언론이 마치 사설 흥신소처럼 짝을 맞춰 미성년자의 뒷조사까지 하며 채 총장의 뒤를 캤습니다. 이젠 오히려 이 문제가 더 심각한 의혹으로 부상했습니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조오영 청와대 비서관이 불법 개인정보 열람에 개입한 건 분명해 보이지만, 그가 '윗선'을 함구하고 있어 검찰 수사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권세력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채 전 총장을 찍어낸 진짜 이유는 그가 법무부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핵심 인물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기소했기 때문일 겁니다. 수사 외압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채동욱 체제에서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윤석열 검사의 국회 국정감사 증언에서 드러난 바 있습니다. 결국 권력의 이해에 따르지 않은 전 총장은 옷을 벗었고, 윤석열 검사는 정직이라는 중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채동욱 찍어내기'는 이 같은 정치적 의미 외에도, 지난해 잇단 추문과 검란 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검찰 조직을 대검 중수부 폐지 등의 개혁 조치로 안정 궤도에 올려놓은 검찰의 자정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계기가 됐습니다. 아무리 임기 초반 서슬 퍼런 권력이라고 하지만,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외압을 막기 위해 도입한 검찰총장 임기제의 취지를 스스로 무너뜨린 사건입니다.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2012년 10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민주당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정 의원을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합니다. 대선 정국 와중에 난데없이 불거진 NLL 논란은 누가 봐도 색깔론 공방전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끝났어야 할 사건이 시간이 흘러 박 대통령이 남재준 국정원장을 임명하면서부터 '정치 기획'의 소재로 부활합니다. 남 원장이 대화록의 비밀 등급을 낮춰 이를 공개한 겁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물타기 의도가 역력했고, 노무현 정부를 종북의 굴레에 가두려는 의도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발췌본은 물론이고 국정원이 보관 중이던 대화록 전문까지 공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고, 오히려 김무성 의원 등 새누리당이 2012년 이를 불법 유출해 대선에 활용한 의혹이 짙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민주당이 패착(敗着)을 둡니다. 문재인 의원의 주장을 필두로, 여야가 국가기록원 산하 대통령기록관에 보관중인 회의록을 열람키로 합의하면서 일이 뒤틀렸습니다. 대통령기록물관리시스템에 있으리라 예상했던 대화록이 사라진 겁니다. 이른바 '대화록 실종' 사건입니다. 이는 검찰 수사로 이어져 봉하 이지원까지 뒤진 결과 남북정상회담 및 삭제본을 발견했지만, 대화록 미(未) 이관에 관계된 야권의 관계자 및 대화록 사전 유출 의혹을 사고 있는 여권 관계자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사건 자체도 황당하지만, 이는 우리 정치 수준의 단면을 보여준 일이기도 합니다. 국익에 대한 고려 없이 전직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낱낱이 까발려 정쟁의 도구화하는 데에 여야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NLL 문제를 둘러싼 종북 논란이 종식된 것도 아닙니다. 과연 1년 넘게 이어진 이 사건의 승자가 있기는 한 걸까요?
■ 경제 민주화·복지 공약 후퇴
집권한 권력자는 지지층의 이해를 얼마간 배반하기도 합니다. 진보 정부는 우향우, 보수 정부는 좌향좌하며 중도로 방향을 틉니다. 그래서 욕을 먹기도 하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많습니다. 반대자도 국민이고, 이들을 포용하려는 국민 통합의 노력 없이 지지층의 이해만 수렴하면 저항에 부딪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보통의 과정이 박근혜 정부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오히려 집권 전보다 극우적 노선으로 기울어 가는 경향은 우려스럽기까지 합니다. 그 단적인 사례가 '경제 민주화'와 '복지 공약의 후퇴'입니다. 시대적 의제를 선점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담대한 전략적 변화가 집권하자마자 내동댕이쳐진 겁니다. 재벌들의 신규 순환출자 금지를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가까스로 연내 입법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지난 10개월간 지속적으로 경제민주화의 후퇴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때부터 경제 민주화가 국정과제의 후순위로 밀려나더니, 지난 7월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종결을 선언한 이후엔 대기업 중심의 성장을 중시하는 경제 활성화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경제 민주화의 버팀목이던 김종인 전 청와대경제수석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확실하게 멀어졌습니다. 복지 공약의 후퇴도 확연했습니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에게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던 약속은 결국 소득하위 70%의 노인들에게 10~20만 원 씩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수정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낸 진영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자진 사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박 대통령이 "(기초연금을)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에 죄송한 마음"이라며 사과했지만,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습니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정책에 대한 기대는 날로 높아져 가는데, 정부 정책이 역행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최근 '철도-의료 민영화 문제' 논란 배경에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는 것도 국민들이 일련의 공약 후퇴와 번복 과정을 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시장 보수와 반공 보수의 목소리에 취해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할 따름입니다.
■ 종북몰이, 노조 탄압 기승
최근 북한의 장성택 처형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비정상적인 국가를 머리에 이고 지내는 우리에게 북한은 다중적 존재입니다. 외교적으로는 대화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대이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혐북(嫌北) 정서에 기댄 색깔론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사건은 그런 내부적 토양에서 발생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극소수의 시대착오는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이것이 내란음모라는 엄청난 죄목으로 단죄되어야 할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소위 지하 혁명조직이라는 'RO'의 실체, 이들이 남한 사회를 위협할 실질적인 준비 작업을 했느냐 등의 문제에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의 예정된 과정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법무부가 주도해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소송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결국 올해의 통합진보당 사태는, 실체의 규명보다는 대선개입 사건의 물꼬를 어떻게든 돌려보려고 국정원과 정부가 기획한 종북몰이의 결정판 성격이 강합니다.
NLL 사건, 통진당 사건 등을 거치며 덩치를 키운 종북 논란은 빈번한 노조 탄압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교조의 법외 노조화, 전공노 탄압에 이어 최근의 민주노총 중앙 사무실에 대한 경찰의 침탈 과정까지 맥락도 없는 종북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노조 적대시 정책이 종북 척결이라는 이념적 구호와 맞물려 파열음을 증폭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박근혜 정부가 극우 노선에 올라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남재준 국정원장, 김기춘 비서실장 등 극우 진영의 '올드보이'들이 국정의 요로(要路)에 배치될 때부터 예견된 일입니다. 반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공안 통치는 상당기간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임기 내내 추진할 목표로 천명했는데, 노조를 '비정상의 온상'처럼 여기고 있으니 말이죠. 당장 철도노조에 대한 비타협적 강경 진압 수순이 예정돼 있어 노동계와 정부 간의 전면전으로 새해가 시작될 분위기입니다. 박 대통령의 임기 2년 차가 더욱 걱정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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