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건축물 보전에 대한 논의에 앞서, 구로디지털단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이곳에 여가를 즐기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 프랑스 니스 인근 소피아 앙티폴리스 등 세계적인 벤처 단지에는 업무 공간과 더불어 삶을 즐길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 있다. 하지만 구로디지털단지 내에는 일을 위한 공간인 사무용 빌딩만 있을 뿐, 함께 이야기를 나눌 공간은 물론 점심시간 잠시 산책할 공간조차 없다. 사실 15만 명 이상이 일하는 곳임에도 밖으로 나와 편안히 대화를 나눌 공원조차 없다는 점은 현대 한국의 팍팍한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왼쪽은 구로공단 내 옛 삼우창고 부지. 이곳에는 고층 비즈니스호텔에 들어설 예정이다. ⓒ김경민 ▲오른쪽은 삼우창고 부지에 들어설 호텔 모습. ⓒhaeahn.com(해안건축) |
삼우창고를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하여 공원화하였다면, 삼우창고는 구로디지털 1단지 중심에 있다는 그 위치적 장점으로, 수만 명의 노동자에게 여유롭고 문화적인 삶을 제공하는 장소, 그리고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 새로운 기능을 했을지 모른다. 대형 오피스에 둘러싸였음에도 여가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맨해튼의 브라이언트 파크와 같이 삼우창고 (존재하였다면 아마도 삼우공원)는 구로디지털단지의 브라이언트 파크가 되었을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호텔과 사무용 건물보다는 구로디지털단지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기능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만약 삼우창고를 중소벤처들을 위한 기업 전시관과 커뮤니티 센터로 활용했다면, 한국 산업화 과정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장소로서의 가치도 창출하였을 것이다.
▲ 위 사진은 과거 삼우 보세장치장 모습. 아래는 2011년 12월 철거 당시 사진. ⓒ김경민 |
구로공단이 패션의 메카가 됐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창고 건물은 패션쇼장이나 쇼룸(전시실), 또는 파티장 등 전통적 창고 기능과 전혀 다른 기능으로 활용될 수 있다. 창고와 공장이 창조적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활용된 사례는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에서도 흔한 경우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창고의 창조적 활용 사례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성수동 소재 대림창고는 패션쇼, 신차 발표회 등 각종 이벤트가 많이 열리는 장소이다. 올해 초에는 대림창고에서 독일계 자동차 회사인 BMW 코리아가 신차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 서울 성수동에 있는 대림창고 건물. 이 창고는 현재 신차 전시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BMW Korea |
'오피스맨'을 위한 도심 속 휴식처…미국 브라이언트 공원
미국 맨해튼에 위치한 브라이언 파크(공원)는 대규모 공원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담긴 공원도 아니다. 그러나 주변 환경에 걸맞은 용도를 제공하는 곳으로서 센트럴 파크만큼이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주변은 많은 오피스 건물들이 위치한다. 그래서 공원 디자이너는 중앙의 잔디밭 주변으로 가벼운 의자를 최대한 많이 배치하여 누구나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무료 인터넷을 사용하게 하여 공원에서 업무를 볼 수 있고, 간단히 협력업체와 미팅도 가능하게 하였다. 온라인 등을 통해 만들어진 커뮤니티들의 오프라인 모임 장소로도 활용되면서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젊고 창의적 인력이 많고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음에도 오프라인 모임을 위한 공간이 부족한 구로디지털단지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공원 바로 옆에는 도서관이 있어 지식 접근성을 높여주고, 넓은 잔디밭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패션쇼와 쇼케이스(시사회)가 열리기도 한다. 패션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많은 오피스 벤처가 모여있는 구로에도 있음 직한 공원이다.
▲ 미국 맨해튼 브라이언트 공원은 고층 사무용 건물 속 휴식 공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의 건물은 도서관이다. ⓒ김경민 |
▲ 브라리언트파크에선 다양한 커뮤니티 행사가 열린다. 왼쪽 아래는 쇼케이스(전시회)가 준비되고 있는 모습. ⓒ김경민 |
기업의 '역사'를 전시하다…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
1924년 설립된 세계 1위 자동차 회사 도요타의 출발은 자동차업이 아니라 방직이다. 그리고 아직도 과거 방직 공장을 부수지 않고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기업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회사의 역사적인 기록을 부수지 않고 간직하고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기업 박물관을 만들려는 시도가 많다. 그러나 못내 아쉬운 부분은 기존 건축물을 이용하기보다는 새 건물 건축 방식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라면 그 기업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현재 구로에 남아있는 제일제당, BYC, 충청남도에 남아있는 (구)장항제련소 등을 미래에 어떻게 활용할 지와 관련해서도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이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
* 다음 주 수요일 발행될 연재에서 구로공단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자신들의 뿌리와도 같은 방직 공장을 부수지 않고, 기업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경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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