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1918~2013) 전 남아공 대통령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 1994; 한국어판 아태평화출판사 1995/개정판 두레 2006)은 제목 그대로 '자유'를 향한 멀고도 험한 인간 여정의 기록이다.
1993년 6월 3일, 기나긴 협상 끝에 남아공의 여러 정파는 이듬해 4월 27일 남아프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이며 인종차별 없는 1인 1표의 보통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한다. 선거 결과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ANC(아프리카 민족회의)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5월 10일 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한다. 자서전에서 만델라 대통령은 취임식 다음날 가졌던 상념을 전한다.
피부색에 관계없는 자유와 권리
"참혹한 보어전쟁(1899~1902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 후손 보어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용자)이 끝나고 몇 년 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 20세기 처음 10년에 남아프리카의 하얀 피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다른 점을 주장하고 검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땅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인종적 지배체제를 수립했다. 그들이 창조한 구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의 바탕을 형성했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 남은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70대의 남자인 지금, 그 체제는 영원히 없어져서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는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피부색에 관계없는 자유와 권리'의 승인에 이르기까지 남아공 국민이 겪은 고통과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억압과 차별의 철폐를 위한 투쟁과 인내의 세월 또한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27년간의 투옥생활에도 희망과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만델라 자신이 바로 그 고통과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자신 자서전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더 많은 영예는 그 '자유의 선포식'에 함께할 수 없었던 수많은 투사와 말없이 고통을 감내하다 스러져간 익명의 남아공 사람들에게 돌려야 하리라.
소수 지배계급을 이루며 정치적 경제적 수혜자였던 아프리카너를 비롯한 백인들에게도 이 '자유'의 나눔은 어떤 해방의 계기였을 것이다. 비인간적 체제가 그 체제의 수혜자들 역시 파괴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진실이지만, 만델라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남아공의 작가 나딘 고디머(1923~ )의 소설은 겉으로의 혜택에도 불구하고(물론 흑인이 겪은 전면적 고통과 백인의 정신적 황폐와 갈등을 같은 저울에 올릴 수는 없을 테다) 남아공의 백인사회 역시 그 체제의 도덕적 희생물이었음을 섬세하고 예리하게 증언한다.
분노 대신 진실과 정의를
언젠가부터 나 자신 '사랑'이나 '화해'와 같은 단 말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만델라의 자서전이 깊은 인간적 겸손 속에 일깨우는 가치는 일견 진부해진 듯한 그런 말들의 진정한 쇄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만델라가 오랜 감옥 생활에서 석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백인에 대한 분노를 키워왔으리라 짐작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는 분노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백인을 향한 분노는 줄어들었으나 체제에 대한 증오는 커졌다. 나는 내가 서로 서로를 등지게 만든 체제를 미워하지만 나의 적들조차도 사랑했다는 사실을 남아프리카가 알게 되기를 원했다."
긴 자서전을 따라 읽으면서 나는 이 말이 전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실제로도 만델라는 집권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그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 그 위원회의 원칙은 이름 그대로 '진실(truth)'을 조건으로 화해한다는 것이다. "잊지는 않되, 용서하기(forgiveness without forgetting)" 이 짧은 한마디의 원칙이 감동적인 것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기나긴 파괴와 억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정의를 자유의 이름으로 나누고 함께하려는 인간적 겸손과 이해의 마음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용서의 이야기는 진실의 증언과 기억을 통해 그 자유의 고난과 영예를 수호하고 넓히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최근 한국사회 일각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로 고개를 들고 있는 증오와 배제의 정치, 민주적 가치에 대한 폄하와 훼손은 그 계급적·정치적 이해와 결부된 역사의 망각과 왜곡을 통해 한국 근현대를 살아낸 많은 이들의 인간적 존엄을 모독하는 수준까지 치닫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문학은 그 당장의 수행적·실천적 효과는 미미할지 모르나 언제나 기억과 용서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적 위엄의 지평을 깊고 넓게 해왔다. 얼마 전, 10월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했다는 '정치적' 이유로 약속된 작품의 게재를 거부한 한 문예지의 행동이 더욱더 참담하게 느껴지는 소이다. 만델라의 자서전은 '자유를 향한 자신의 걸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말로 끝난다. 지금 우리는 그 인류의 걸음, 어디쯤 있는 걸까.
"우리는 우리 여정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지는 못했지만, 더 길고 어려운 첫 발걸음은 내디뎠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단지 쇠사슬을 풀어버리는 것은 아니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증진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에 대한 진정한 헌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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