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0일 공식 출발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그동안 소위 '갑의 횡포'에 맞서 편의점, 대리점, 하청업체,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등 소위 '을의 눈물'을 대변하는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쳤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4건의 집단 및 개별 교섭의 타결이라는 성과를 냈다. 정부기관을 피감기관으로 하는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들의 현장 방문을 마다치 않는 전방위 노력은 조용하고 매끄러운 '로비 정치'를 통해 이해관계를 관철해왔던 '갑'들로서는 처음 겪는 요란하고 난감한 '현장 정치'였으리라.
17만 가맹점주들의 염원을 담은 '가맹사업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 통과는 빛나는 성과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저 멀리 인도까지 날아가 쌍용차의 대주주인 마힌드라사로부터 해고자 복직에 관한 쌍용차의 진전된 노력 의지를 확인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을지로위원회는 또한 2013년 내내 '갑의 횡포'의 대명사였던 롯데그룹이 피해자모임과 상생 협상을 진행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협상의 결과를 예단할 수 없지만, 이 협상이 법·제도 개선에 별다른 진척이 없는 재벌의 골목상권 진출 문제와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조건까지 다루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 경제민주화국민본부와 전국을살리기비상대책위원회 소속 회원과 중소 상인들이 6월 30일 국회 로텐더홀 중앙계단에서 단식농성중인 민주당 우원식 을지로위원회 위원장과 윤후덕 의원을 찾아 간담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
민생과 민주주의의 결별이 민주당의 역사적 과오
진보적 시민단체의 입장에서 여당과 제1야당의 국회의원은 대체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는 표현에 맞는 노력을 기울인 뒤에, 듣는지 마는지 알 수 없는 몇 마디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을지로위원회는 을들을 직접 만나는 창구를 만들었고, 다루기로 한 이슈마다 책임의원을 배정해 챙겼다.
이렇게 해서 을지로위원회는 민주당의 역사에서는 이질적이고 높은 잠재력을 지닌 어떤 노선을 대표하는 실체적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노선의 이름을 민생 노선이라 부르겠다.
정치권과 언론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민생이라는 말은, 그러나 비정규직 차별 철폐, 재벌의 골목상권 진출 규제, 대부업 폭리 근절, 담합에 대한 소비자 대항권 강화 등으로 자신의 정책적 내용을 드러내면 대체로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이 말의 왠지 모를 탈정치적·탈이념적 색채 때문에 사랑받지만, 그것의 내용적 함의는 정치적·이념적 대치선을 만들기 때문이다. 보수 우위의 언론 진영에서 을지로위원회가 그 노력과 성과에 부합하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을지로위원회가 이번 정기국회에서 추진하기로 한 11개 중점 법안의 일부를 살펴보자. 변종SSM방지법(유통산업발전법), 삼성전자서비스 직접교섭촉진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학교비정규직보호법(교육공무직원의 채용 및 처우에 관한 법률), 전월세 상한제 도입법(주택임대차보호법), 서민이자부담경감법(이자제한법) 등이다. 법안 자체, 법안의 내용 하나하나가 갑과 을, 가진 자와 없는 자 중에서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 강화되어야 할 시장에 대한 규제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정치적·이념적 쟁점들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에 정치 노선이나 이념 노선과 뚜렷이 구분되는 민생 노선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민생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한국 정치사에서 민주당 집권 10년 동안 민중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민주'는 민주주의에서 온 말이고,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뜻하는 이념이다. 민주당 집권은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집권 10년 동안 벌어진 일은 불완전노동의 일상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불평등의 심화, 중산층과 중소상공인의 점진적 몰락이다. 요컨대, 정상 궤도에 오른 민주주의와 시나브로 악화된 민생이 민주당 집권 10년의 풍경이다.
어떤 항변을 하더라도, 민주당 집권 10년 동안 민주주의와 민생은 무관한 말, 대중 정서의 수준에서는 심지어 상호 적대적인 말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기관 대선개입과 같은 명백한 반민주적 행태마저도 정치적·이념적 진영 대결의 문제가 되는 현재 상황도 민주주의와 민생의 결별과 결코 무관치 않다. 양극화, 민생의 악화는 건전한 시민사회의 토양을 침식하기 마련이다.
결국 역사적 맥락 속에서 민주당 민생 노선의 의미는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노선'일 수밖에 없다.
일관된 민생 노선이야말로 신뢰 회복의 유일한 방법
이제 걸음마를 뗀 민주당 민생 노선은 2013년 꽤 괜찮은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짧은 영광에 그칠 것이다.
민주당은 주요 경제 정책에서 집권 당시와 야당이었을 때 입장이 많이 달랐고, 대선 직전에는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국가를 강령으로 내걸었지만 선거 패배 이후 곧바로 강령 후퇴 논란에 들어서기도 했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를 더 잘할 것이라는 지난 대선 전의 여론은 집권 1년 안에 잘못된 여론이었음이 입증되고 있지만, 그런 여론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요컨대 민주당에 대해서는 늘 신뢰의 문제가 따라다닌다.
민주당의 민생 노선이 을들과 대중과 시민사회의 든든한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은 그 노선의 역사적 축적이 유일한 방법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이 부담된다면, 민주당과 을지로위원회에 최소한 다음 총선까지 2013년의 노력을 지속하기를 간곡히 주문하고 싶다.
해체된 듯이 보이는 대중의 경제민주화 열기, 주요 언론의 외면, 재벌과 새누리당의 견제 속에서 앞으로 을지로위원회가 2013년과 같은 성과를 낳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노선의 일관된 고수가 민주당과 을지로위원회의 중요한 과제다.
노파심에서 덧붙인다. 비록 당장의 정치적 성과를 낳지 못하더라도 다음 총선까지 민주당이 일관된 민생 노선을 고수한다면, 편의점, 대리점, 특수고용직, 비정규직, 하청업체들의 표심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얻는다는 것은 선거의 판세를 바꾼다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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