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또 하나의 우주가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입니다. 거대한 제국 삼성을 바꾸기 위해 싸웠던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 최종범입니다.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전태일의 뒤를 따른 그의 숭고한 죽음은 우리의 기억에서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40일이 지나도록 그는 영면하지 못하고 차가운 냉동고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남긴 또 하나의 우주가 있습니다. 그의 딸 최별입니다. 별이가 세상에 온 날 그는 "최종범 인생 끝, 최별 인생 시작"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지난 일요일은 별이의 돌잔치 날이었습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한 달을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보낸 별이는, 지금 아빠의 뜻을 전하러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라진 우주와 남겨진 우주
지금 별이 엄마는 서초동 삼성 본관에 앞에 있습니다. 젖먹이를 재워놓고 떠나온 지 열흘, 삼성 본관은 황망하고 쓸쓸하고 서러웠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미세먼지로 눈앞이 흐려져도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한파와 강풍이 몰아치고 있는 길바닥에서 상복을 입고 견디고 있습니다.
별이 엄마는 "이제껏 서른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집회에 참여해 보거나 농성을 해본 적도 더욱이 거리에서 잠을 청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남편의 유언을 지키겠다고 서울에 와서 지난 열흘 동안 얻게 된 기억은 끔찍합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라고 남편의 유언을 전하려는 제 앞을 가로막는 경찰들을 보고 가슴에서 피눈물이 터질 듯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제가 범죄자가 아닌데 오히려 삼성의 부당함과 탄압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고 사과받고자 온 저와 남편의 동료들을 무지막지하게 끌어내는 경찰을 보면서 삼성과 말 한마디 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이제 걸음마를 막 시작한 별이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삼성 직원들을 위한 어린이집을 오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별이가 더욱 사무칩니다. 별이에게 아주 미안하고, 힘들어도 제발 살아만 있지 하는 생각에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며칠만 별이를 못 봐도 목구멍이 메는데 별이를 두고 간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별이 엄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 지난달 30일 자결한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 최종범 씨의 그의 아내, 그리고 딸 최별이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최종범 |
젖먹이 아이를 떼어놓은 열흘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별이 아빠의 유언을 지키는 일이 힘겹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 별이 엄마는 버티고 있습니다.
밤새 내린 눈발과 강풍이 몰아치는 시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별이 엄마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회의 양심들이 별이 엄마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돌잔치를 하지 않겠다는 별이 엄마에게 삼성전자서비스 동료들이 별이 아빠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별이 아빠의 숭고한 뜻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모여 별이의 돌을 축하해주고, 별이 엄마에게 힘을 주려고 합니다.
어쩌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별이 아빠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아내를 위로해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라며 별이 엄마를 설득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 별이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빠의 뜻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들이 모여 별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 마련한 돌잔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별이 빛나는 돌잔치'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잡힌 돌잔치 준비가 서툴고 엉성하지만, 따뜻한 마음들이 쉴 새 없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돌잔치의 장소는 불의에 맞서 고난받는 이들을 위해 가장 용감하게 싸우고 계신 천주교 신부님들이 내어주셨습니다.
백기완 선생님께서 별이에게 금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의 작가들이 별이의 사진을 찍고,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감독들이 별이를 위한 영상을 만듭니다. 미술가들과 보육교사 선생님들이 돌잔치 장소를 꾸미고, 박재동 화백께서 돌잔치에 오셔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그림을 선물해 주십니다.
일주일 만에 추진되는 급작스런 돌잔치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마음을 내어주십니다. 별이 아빠를 대신해 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별이를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이 곳곳에서 답지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책 출판사들이 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어린이책을 기증하겠다고 했고, 한의사회에서 별이에게 무료 진료권을 주겠다고 합니다.
지난밤에는 한복 디자이너가 한복을 만들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조그만 성의로 별이 돌잔치 축하금을 보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은 별이 아빠의 동료들이 "우리가 별이를 지키는 달님이 되어줄게"라는 약속입니다.
갑작스러운 돌잔치, 몰려드는 따뜻한 마음들
별이의 아빠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이 만들어놓은 위장 도급과 건당 수수료라는 굴레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게 일해도 내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조를 만들고 삶의 희망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삼성의 보복은 그와 사랑하는 동료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던" 그는 동료들이 더는 삼성의 앵벌이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살아가길 원했고, 그의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길 바랐습니다. (관련 기사 보기 :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 자살 )
하지만 40일이 지나도록 삼성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퍼부었던 바지사장의 편지를 언론사에 배포해 별이 아빠의 죽음을 모독하고 진실을 왜곡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삼성은 지난해에만 29조 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올해에는 32조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일 수 없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이건희 회장이 올해 주식배당금만으로 699억7000여만 원을 챙겨갈 수 없으며, 그의 부인과 아들을 포함해 이건희 부자가 1000억 원에 육박하게 배당금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이건희는 12조400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산으로 세계 100대 억만장자 중 97위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삼성을 최고의 서비스 기업으로 만들어놓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초일류기업 삼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 10일 열린 시민단체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출범식에서 故 최종범 씨의 둘째 누나 최종미 씨가 발언하고 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가 없었다면
그런데 삼성전자서비스는 하청업체 바지사장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세 차례에 걸친 요구에도 교섭과 대화에 나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청업체를 조사하겠다고 합니다.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의 분명한 증거들이 있고,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당사의 우수 엔지니어로 인증한다'는 인증서가 즐비한데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우깁니다.
삼성은 삼성전자서비스 옷을 입고 삼성 제품을 수리하는 노동자들을 동네 전파사 직원인 것처럼 말합니다. 별이 아빠와 동료들은 자정 가까이까지 일했습니다. 동네 전파사에서 삼성이나 엘지 제품을 새벽부터 자정까지, 주말도 명절도 없이 고쳤다면 그 전파사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삼성은 가장 악질적인 임금 체계인 건당 수수료라는 제도로, 성수기에 몸이 부서지게 일해 비수기에 진 빚을 갚아야 하는, 봉건시대보다 더한 노예의 삶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삼성은 하청업체 바지사장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조폭 두목이 자신의 소유인 유흥업소의 똘마니 지배인을 조사한다고 하는 꼴입니다.
삼성전자서비스의 위장 도급과 건당 수수료라는 암 덩어리를 도려내지 않고서는 또 다른 별이 아빠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들은 △원청 사용자 삼성 직접 교섭 △명예 회복 및 책임자 처벌과 공개 사과 △표적 감사 노조원 차별 등 노조 탄압 중지 및 노조 활동 보장 △도급제 방식의 건당 수수료 폐지 및 생활임금 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위장도급과 건당 수수료라는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
13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예수회센터에서 열릴 돌잔치는 장소도 넓지 않고 음식도 충분하지 않아 많은 분을 모시기는 어렵습니다.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별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신다면 앞으로 별이와 별이 엄마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별'이 빛나는 돌잔치가 끝나면 별이와 별이 엄마는 또다시 이별을 해야 합니다. 별이 엄마와 노동자들은 삼성 본관 앞으로 가서 별이 아빠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혹한의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별이 엄마의 눈물 어린 호소에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의 연대와 응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삼성이 별이 아빠의 주검 앞에 사과할 때까지 제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는 삼성에서 별이 같은 사랑스러운 아기가 아빠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우리 별이를 다시 품에 안을 때 아빠의 유언을 지킨 강건한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지난 7일 삼성 본관 앞 집회 중 발언.
* 돌잔치 문의 : 010-9664-9957, choijb.committee@gmail.com
* 후원 계좌 : 신한은행 110-403-538588 박석운
* 이 글은 <레디앙>, <오마이뉴스>, <참세상>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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