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현안의 교착상태 해소를 위해 26일 청와대가 전격적으로 제안한 여ㆍ야ㆍ정 정치협상회의의 실체와 전망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청와대는 "법적 절차가 완료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현안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논의하자는 것"이라며 "국정운영의 기조나 방향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며 한나라당에 손짓하고 있다.
레임덕 고민 본격화 됐나
결국 청와대가 한나라당에 어떤 카드를 제시할 수 있느냐가 실제 테이블 구성의 관건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청와대는 "지금 당장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지 않냐"며 "그런 걸 다 논의해보자는 것"이라고 말을 아끼고 있다.
특히 청와대의 이번 제안에는 '이대로 가면 죽도 밥도 안 되고 대통령 임기 말까지 아무 것도 못 한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날 이병완 실장은 "역대 정권 말에 대선을 앞두고 국정이 표류한 예들이 많았고, 그런 표류나 마비 현상 속에서 외환위기 등 국가적 중대위기 요인들이 발생했다"며 "국가와 국민에게 많은 어려움과 짐을 줬다는 것을 되돌아 볼 때 정치협상회의가 하루 빨리 성사되어 여야 모두가 국정의 주체로서의 합의와 타협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비록 '역대 정권 말에 국정이 표류했었다'는 과거사에 대한 언급이지만 이 실장의 이같은 발언은 지금까지 청와대의 입장이나 자세와는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청와대는 지속적으로 "우리와 역대 정권은 다르다"면서 "대형비리 같은 것이 생겨서 장악력이 떨어질 일도 없고 따라서 참여정부에는 레임덕이란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 실장의 이같은 발언은 기존 입장과 비교해 확실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이날 이 실장은 "(대통령이) 국정의 끈을 계속 잡고 가려면 여야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 아니겠느냐"며 "(여야의 합의) 바탕 위에서 국정이 하자 없이 갈 수 있다"고 '여야의 협조와 합의'를 유난히 강조했다.
청와대가 쥐고 있는 카드는 전효숙, 사학법
이날 이 실장과 다른 청와대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테이블이 구성될 경우 양보가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의 윤곽이 드러난다.
먼저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인준 건도 협상 안건에 포함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실장은 "그런 부분을 포함해 모든 문제가 다뤄지고 풀리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번 협상을 제안한 것"이라고 답했다.
다른 관계자도 이 질문에 대해 직답은 피했지만 "법적 절차가 완료된 사안은 힘들지만 다른 것은 다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이 아직 전효숙 내정자의 헌법재판관 임명장에 결재를 하지 않은 것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한나라당이 반대해 청문보고서 채택이 되지 않아 임명절차가 늦어지고 있는 이재정 통일부 장관 내정자, 송민순 외교부 장관 내정자 문제는 '이미 법적 절차가 완료된 사안'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청와대 안팎에서는 이미 전 내정자 사안에 대해 '자진사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단 퇴각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30일로 예정된 국회 본회의까지는 지켜본다는 것.
이와 관련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 실장의 발언을 전해들은 뒤 "바둑으로 치면 사석 작전이 아니냐"고 심드렁한 반응을 내비쳤다. 어차피 버리는 돌로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것.
또한 사립학교법 재개정도 청와대가 빼들 수 있는 카드 중의 하나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지난 4월 말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이재오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청와대로 불러놓고 김한길 원내대표에게 '양보'를 권유했지만 여당의 반발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도 이병완 비서실장 등은 여당에 다른 법안들 처리를 위해 사학법 양보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그나마 개혁을 성공한 것이 사학법 달랑 하나인데 이것마저 밀릴 수는 없다"는 당내 여론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근 여당 내에서 정부와 재경관료 출신 의원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부동산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등에 대해 더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며 당이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사학법 문제는 여당의 반발에 다시 부딪힐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거부의 명분'이 필요한 한나라당
이날 "국정운영의 기조도 논의할 수 있다"며 '통 큰 자세'를 보이던 이 실장도 이날 제안을 과거 대연정 구상과 연계시키는 질문에 대해선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이 실장은 "대연정 이야기는 여기다 붙이지 마라"면서 "(오늘 제안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협상"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한나라당이 이같은 제안을 선뜻 수락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년을 훨씬 넘기고 있는 국회의 입법기능 마비상태는 차치하고라도 최근 들어 부동산 문제 등 각종 현안과 관련해 반사이익만 챙기려는 한나라당의 태도에 대한 역풍이 거세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무조건 거부하고 나서기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날 한나라당에는 판을 깰 때 깨더라도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아 '명분'을 찾아야 한다는 기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여당의 거리는 더 벌어질 듯
한나라당의 수락을 통한 실제 정치협상회의 테이블이 구성되는 문제와는 별개로 대통령의 이날 제안은 당-청 간의 거리를 더 벌릴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실장은 이날 "여당과 미리 조율한 것이 아니라 (이날 아침에) 미리 우리당 당 의장, 원내대표, 한나라당 김형오 원내대표한테 전화로 말씀을 드렸다"고 소개했다.
또한 이같은 제안은 '더 이상 여당을 믿고 국회를 버려둘 수 없으니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협상 테이블을 꾸리겠다'는 것이고 '급격한 레임덕을 막기 위해선 한나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뜻이 깔린 것이어서 여당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물론 여당은 대변인을 통해 "제의를 환영한다. 한나라당도 참여하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실제 협상 테이블이 꾸려지면 오히려 청와대와 여당의 거리는 더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근태 의장이나 김한길 원내대표가 무조건 청와대 입장대로 생각해줄 리도 만무하고 오히려 차별화를 강조하며 살 길을 찾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당과) 끝까지 함께 가고 싶다"는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수차례 밝혔지만 정기국회, 새해예산안 처리가 끝나면 여당과 청와대는 어떤 식으로든지 결별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이날 협상제안, 여당의 '기간당원제 폐지를 통한 친노세력 힘빼기' 방안 마련 등을 볼 때 '이별의 시기'는 예상보다 더 빨라질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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