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활동하는 공동체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에 있고요. 이름은 '여민동락공동체'입니다. 저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대표살림꾼을 맡고 있습니다. 설립 7년 차이니, 아무래도 장기집권(?)이지요? 공동체의 주문대로 10년 동안 대표를 맡기로 한 만큼 이제 3년 남았습니다. 물론 '공동체'에선 '대표'라는 게 대외적인 직함이지 안에선 그저 여러 식구 중 또 한 명의 단순한 식구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머슴 중의 상머슴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지금은 잠시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파견 나와 있습니다. 광산구노인복지관 관장을 겸한 지 어느새 3년 됐습니다. 공동체의 10년의 계획 중 또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민동락공동체는 가난하고 소박한 농촌공동체, 복지를 근간으로 하는 도시공동체, 그리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꿈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산구노인복지관은 복지관을 거점으로 어떻게 마을공동체가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도시형 마을공동체의 새로운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복지활동가, 파편으로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튼 날마다 행복합니다. 다르고 새롭게 현장을 개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침이 기다려지고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신명 납니다. 복지관 동료들과 협동으로 펼쳐내는 성취가 뿌듯합니다. 무엇보다 그다지 유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세련되지도 않은 우리끼리 서로 기대어 성장해가고 있다는 게 희망입니다. 담장을 허물고 마을과 만나, 복지가 마을의 복지력과 자치력을 키우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긴 게 소중한 자산입니다.
어르신들의 십시일반 힘으로 마을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마을찻집도 지었습니다. 광주 최초의 협동조합인 '더불어樂'은 전국적인 귀감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만들어주는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복지관에 다니시는 어르신들끼리 조금씩 출자해서 전통시장에 팥죽전문점과 두부 공장을 내고, 이를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면서 어르신들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낸 특별한 사례이기 때문이지요. 금요일은 '노동일'로 삼아 사회복지사들이 돌아가며 농장에서 농사를 짓기까지 합니다. 복지관을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시고 열정적인 활동을 격려해 주십니다. 한마디로 전국적인 순례지가 되고 있지요. 이렇다 보니 그냥 눈 딱 감고 우리끼리만 '복지'하라 하면, 별로 불편함 없이 좁은 오솔길 앞만 보고 제 갈 길만 가면 될 상황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뭔지 모르게 불편합니다. 이게 복지의 전부인가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박근혜 정부의 복지공약이 줄줄이 후퇴하고 있는데, 우리가 지나치게 침묵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예요. 그나마 기초노령연금이나 무상보육 등과 관련해서 풀뿌리 복지시민단체로서 서울의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등이 발언을 하고 있기는 하나, 지역에선 전체적으로 침묵이 대세입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소식지를 받을 때마다 문제의식이 싹트곤 했지요. 우리 사회복지사들이 저마다 자신의 시설에 갇혀 파편적인 성취와 보람에만 취해 있는 게 아닐까 반성했습니다. 문제의식을 느낀다 해도 자신의 시설과 기관 단체의 문제에 국한하고 있질 않은지 고민이 들었어요. 그래서입니다. 고민을 적극적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사와 관련 종사자, 정확히 말해 사회복지 노동자들이 제대로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하고 때늦은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사들의 '3무(無)'
고백하자면 현장 사회복지 노동자들은 정책과 제도, 나아가 정치에 관심을 둘 처지도 안 됐고 의지도 없었습니다. 노동 현실이 녹록지 않은 복지 현장 탓이기도 하고, 민감하게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표출할 수 없는 고용구조의 복잡성 때문이기도 하지요. 또한 사회복지를 기관중심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서비스 제공'으로 한정 짓는 철학의 부재도 한 몫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침묵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 담론이 정치 의제로 등장해 복지국가 논쟁이 활발할 때도 그랬어요. 학계가 주도할 뿐 현장은 빠져 있었지요. 어쩌면 오래된 관행입니다.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늘 사회복지사들은 3무(무반응, 무대응, 무표정)로 일관해 왔지 않나요? 60만 명이 넘는 사회복지사들이 회원 몇십 명의 일개 시민단체 하나만도 못하다는 힐난을 받을 땐 화가 날 지경입니다. 한마디로 정치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정치력의 부재, 그것은 조직성의 미비와 역동성의 부족에 있습니다. 이른바 사회복지계를 대표하는 한국사회복지사협회나 사회복지협의회 같은 단체들조차 지도력이 별로 없다고 느끼질 않나요? 전체 사회복지사 규모에 비해 회비를 내는 회원 숫자는 미미하고, 그렇다고 현장 사회복지사들에게 일상적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도력은커녕 특정지역에선 일선 사회복지사들로부터 개혁대상이 되는 경우까지 있다 하니 안타까울 뿐이지요.
▲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 담론이 정치 의제로 부상했다. 지난 2012년 12월 24일 기초생활수급자를 찾은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
시설 담장 허물고 사회와 만나야
사회복지사는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이자 현장의 구체적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전문가입니다. 현장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책과 제도를 바꾸고 정책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바꿔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지요.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사회복지사들은 정책과 제도의 변화와 정치의 발전에는 무관심하다 못해 무지한 실정입니다. 국가복지 전용체계 내에서 단순히 국가복지 재정집행의 보조 수준에 머무르는 걸 당연시하는 경우가 파다합니다. 사회복지를 '보살핌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위해 도움을 주는 일'로 한정 짓는 세간의 태도에서 단 한 발짝도 넘어서지 못한 까닭이지요. 어쩌다 터지는 시설의 비리와 횡령, 비상식적 범죄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극적으로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간혹 공범이 되기도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법인의 비민주적 운영과 관련해서도 작심하고 궐기하거나 고발하는 경우도 드물더라고요. 다소 가혹한 한탄이지만, 완벽하게 '순진한 천사'임을 자처하거나, 현실의 퇴행에 비굴하거나, 국가와 법인의 정신적 인질로 산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일부 사회복지사협회나 사회복지협의회를 들여다보면 더 가관이에요. 애당초 이런 정책적 사안은 본인들의 일로 여기지도 않는 듯이 보입니다. 대체로 그럴 힘도 없어 보이지만, 그럴 의사조차 전혀 없어 보입니다.
'사회복지 유니온'으로 정치화해야
결국 문제는 사회복지사들이 파편으로 존재한다는 점인 듯합니다. 협회나 협의회 등의 직능단체는 그 이름에 맞게 역량을 갖추고 있지도 않고, 때론 일부 단체들은 보조금 몇 푼 때문에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기도 하는 모습이 실망스러워요.
그래서입니다. 결론은 '조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 지역의 사회복지사협회가 벌이는 사회복지사 처우 개선 활동은 그나마 진일보한 개입이긴 하나, 정책과 제도에 대응하는 직접행동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건 '사회복지 유니온', 이른바 사회복지 현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입니다. 각종 협회 등의 직능조직과 복지 엔지오는 그 자체로 본연의 역할을 살려가되, 이와 별도로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복지 현장 종사자들의 강력한 결사가 있어야만 단순히 의제 싸움을 넘어 일상적이고 정치적인 응집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노동인권과 고용안정은 물론이고 복지정책과 제도의 개선을 위한 직접행동을 위해서라도 현장에 바탕을 둔 조직적 결사가 필연이라는 얘기입니다.
굳이 사회복지 노동조합이 아니라 유니온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두텁게 자리한 노동조합에 대한 오해, 특히 사회복지 현장의 노동에 대한 인식 편차와 보수성을 의식한 반영입니다.
개혁은 결코 국가의 시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당사자가 권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 조직하고 저항하지 않는 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유독 소외된 변방의 아웃사이더가 바로 사회복지 노동자들입니다. 사회복지 노동자의 현실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으며 오직 사회복지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만 깨쳐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들이 연대와 단결을 주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사회복지 노동자의 고용관계는 정부와 법인이라는 중층적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즉 자본과 임노동의 모순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일반 노동자와는 달리 국가 및 시설의 관리자층과의 중층적 임노동관계에 존재하는 특수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별기관에서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국가복지 전반에 목소리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복지단체를 만들어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것도 법인 눈치를 보느라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기관 내의 일이 아닌 이상 정부보조금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사는 법인 입장에서야, 정부가 하는 일에 얼굴 내놓고 저항하는 사회복지사가 달가울 리 없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계약직이란 신분 위협에 맞설 시점
아시다시피 한국의 사회복지 시설은 대부분 민간위탁 체제입니다. 지자체 직영 시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3년 혹은 5년에 한 번씩 되풀이되는 민간위탁의 특성상 사회복지노동자들의 정확한 신분은 '위탁계약직'이라 해야 옳습니다. 간접고용이자 비정규직인 셈이지요. 이제 사회복지 노동자는 헌신과 사랑이라는 관념적 이데올로기에 갇힐 게 아니라, 계약직이라는 신분위협과도 맞서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복지확장 시대에 맞게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권익옹호도 권리로써 보장돼야 마땅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지 유니온은 당연히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기본 사명입니다. 나아가 사회복지시설의 비민주적 운영과 그로 인한 사회복지 서비스의 왜곡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한국의 사회복지를 개혁하는데도 적극 나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는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를 여는 가장 강력한 조직적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앞서 복지국가의 튼튼한 물리적 바탕이자, 국민들로부터 최고의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는 공익적 결사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복지 유니온이 한낮 이해관계집단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복지국가로 견인하고 복지사회를 실현할 중추로써 현장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튼튼한 복지 그물망이자 풀뿌리 연대의 조직적 구심이 될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한 번 힘을 모읍시다. 그간 많은 분들이 노력해 왔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시설 단위의 사회복지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왔고, 전국적 확장을 위한 노력도 부단하게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정체상태이거나 많은 경우 와해됐습니다. 앞서 제기한 고용구조 탓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단위 사업장 중심이 아니라 지역 단위와 산별 형태의 유니온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전국적 연대가 가능합니다. 복지국가의 완성은 이러한 현장의 연대에 기반 했을 때 가능합니다.
사회복지 유니온, 가능한 지역부터 만들어 가자
한국의 사회복지 유니온 결성, 문제는 사회복지 노동자 스스로의 자각이 우선돼야 합니다. 반복하건대, 사회복지 실천현장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주체는, 바로 사회복지 현장 노동자라는 자주의 원칙을 곧추세우는 것이 핵심이지 않을까요? 실질적으로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현장의 문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들의 복지권 옹호의 최전선에 있는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해답입니다. 그 조직적 연대의 거점이 바로 헌법적 권리에 바탕을 둔 사회복지사 유니온이면 좋겠습니다.
이제 사회복지사들의 오래된 침묵을 깹시다. 더 이상 퇴행하는 복지정책을 남의 일 보듯이 방관하지 맙시다. 가능한 광역단위에서부터 사회복지 유니온을 결성합시다. 연대하면 저항할 수 있습니다. 단결하면 서로를 지키며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침묵이 계속되면 더 이상 복지국가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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