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제2인자인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는 2011년 3월에 후쿠시마를 덮친 3중 재앙의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주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공식적인 항의를 보내겠다고 나섰던 모양이다. 작년 10월에 일본 축구대표팀이 프랑스를 1 대 0으로 누르자, <프랑스2>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일본 골키퍼 에이지 카와시마가 팔이 네 개인 것처럼 합성한 동영상을 내보내면서 "후쿠시마 효과"라고 농담을 덧붙였다고 한다. 이때도 일본 정부가 항의했고, 해당 프로그램 제작자와 프랑스 외무장관이 사과 성명을 냈다고 한다.
당시 제작자의 사과문 취지는 이렇다: "우리의 동료인 귀국의 시민들에게 상처를 줘서 깊이 미안합니다. 우리 진행자는 일본과 후쿠시마 희생자에게 무례를 범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주로 프랑스 축구팀을 조롱할 의도였지만, 어쨌든 이 때문에 감정이 상하셨다니, <프랑스2>는 유감을 전하오며 일본에 대한 우리의 우정을 확인합니다" (관련기사 ☞ <가디언> 2012. 10. 17일 기사). 일본 정부는 "프랑스 축구팀을 조롱할 의도"였다는 해명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성 싶다. 이번에 <르카나랑셰네>에 실린 만평도 내가 보기에는 조롱의 과녁이 주로 IOC의 결정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십중팔구 IOC의 결정에 대한 조롱을 일본에 대한 조롱으로 여길 듯하다.
그런데 이 사연들을 국제 매체들이 보도하는 와중에,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르카나랑셰네>의 만평 때문에 발생한 논란을 보도하면서,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의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외국 매체에서 일본에 관해 표현되는 의견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그와 같은 인간적 비극을 초래한 위기를 커리커쳐의 주제로 삼는다는 데 화를 낸 적이 많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일본에는 풍자가 활발한 전통이 없다. 사회적 조화를 강조하는 문화풍토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개적인 조롱을 억누른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나는 이 칼럼에서 가급적이면 사람 이름 뒤에 직함을 쓰지 않고 이름 석 자를 내놓고 부른다. 사람을 바라볼 때 개인적 덕목에 주목하지 않고 감투에 신경 쓰는 풍토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명박, 박근혜, 노무현, 박정희, 김대중 등등, 이름을 그냥 부른다. 이것은 사실 조롱이랄 것도 없다. 그럼에도 어디 교수 나부랭이가 감히 대통령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는 비난이 댓글에 자주 달린다. 박근혜를 "귀태"에 비유한 글을 인용했다가 야당 정치인이 집중포화를 당한 적도 있었고, 인터넷 상에서 논쟁하는 와중에 상대를 "듣보잡"이라고 불렀다가 벌금을 낸 사례도 있었다.
대통령 선거 기간에 이정희가 박정희를 "다카키 마사오"라고 부른 것이 현재 통합진보당이 겪는 고초에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원인은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장하나가 "대선 불복"을 입에 담았다가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안에서조차 성토를 당한다고 한다. 세계의 언론인들이 한국 안에서 벌어지는 시답지 않은 일들에 관심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금세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떠오를 만한 일들이다. (참고 하라고 말하는데, 세계의 언론인들이 한국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한국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자기네 일이 바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때문에 또 발끈하는 사람은 없기를 바라며 하는 말이다.)
<프랑스2> 텔레비전의 제작자와는 달리 <르카나랑셰네>의 편집자도 만평가도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라고 항의하던 일본의 여론은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걸핏하면 발끈하는 성격의 소유자들일수록 만만치 않은 상대와 만만한 상대를 구분하는 촉각은 발달되어 있다. 만약 일본인들이 만만하게 보는 한국이나 중국의 언론에 저런 만평이 실렸다면, 상당히 그악스럽게 사과를 요구했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정부도 나서서 해당 언론인에게 사과하라는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 대선불복을 선언한 장하나 의원 ⓒ장하나 의원 트위터 |
다른 사람이 내게 무례를 범했다고 느낄 때, 한 번 더 생각해서 자신의 도량이 얼마나 좁은지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한국 정치가 더 좋아질 것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 신뢰와 협동의 폭과 깊이도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남들이 나를 대접해 주기를 내가 바라는 바로 그대로 남을 대하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명사회라면 윤리적 덕목의 첫번째다. 이런 사회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권력자를 대상으로 가급적 싸가지 없는 조롱을 일삼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농담과 조롱에 발끈하는 자들을 더더욱 조롱해줘야 할 필요가 아주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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