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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변호사 링컨, 대륙 횡단 철도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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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변호사 링컨, 대륙 횡단 철도를 꿈꾸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9> 횡단 철도 건설을 눈앞에 둔 아메리카

이제 잠깐 유럽을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 바다 건너 새롭게 꿈틀대는 땅 아메리카, 세계 최고의 철도 나라인 미국으로 가보자. 1783년 미국은 파리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775년 미국의 이민자들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1776년 미국 독립이 선언된 후 7년에 걸친 지루한 공방전 끝에 승리를 거둔 미국은 새로운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영국이라는 혹을 떼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는 자신감이 연방을 이루는 13개의 주에 넘쳐났다. 그러나 미국의 에너지는 아직까지는 대서양 연안과 동부에 머물러 있었다. 황금이 널려 있다고 여겨지는 광활한 서부를 정복하고 태평양에 발을 담그게 될 때 아메리카 대륙이 열게 될 세상이 어떤 것일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지 150년이 지났지만 아메리카 대륙은 미지의 땅이었다. 1790년 대서양을 건너와 미국에 정착한 사람은 390만 명이었고 거의 대부분이 대서양 연안 80킬로미터 안에 살았다. 1830년엔 1300만 명으로 늘었고 1840년에는 450만 명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이주했다. 서부 이주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했는데 이주민들의 대선배격인 콜럼버스처럼 황금을 찾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이주자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고 공기압에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서부 이동은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들 이주민들이 황금을 찾아 나서거나 정착을 하기 위해 자리 잡으려고 했던 땅들은 임자가 있었다.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었다.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아 나섰다가 아메리카에 상륙한 후 만난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인도에 도착한 줄 알았던 콜럼버스는 인도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디언이라고 불렀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인도 사람들과는 인종적으로도, 체질적으로도, 유전적으로도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디언이라는, 실체와 다른 이름을 부여받은 것은 이들이 백인들을 만나 어떤 굴곡을 겪게 될 것인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한국에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낯선 자들이 나타나 한국인들을 인도인이나 그 밖의 다른 나라 사람으로 부르고 삶의 공간에서 내쫓거나 경멸적 통치를 시도하게 된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게다가 프로 야구단 이름조차 '대구 인디언스' 같은 걸로 지어 운영한다면?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연고지 클리블랜드는 오하이오 주에 있다. 오하이오 주는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던 보스턴, 뉴욕, 워싱턴에서 서부로 진출할 경우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땅이다. 인디언들은 강제로 추방당했고 백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해야 했다. 비참한 역사는 세월에 묻힌 채 클리블랜드 홈구장 매점에서는 귀여운 꼬마 인디언이 마스코트로 그려져 있는 티셔츠와 야구 용품들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아메리카에 이주한 백인 정착민들의 최고 엘리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 맞부딪힌 문제는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벗어나는 문제였다.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땀 한 방울 안 흘린 대서양 건너 귀족들에게 통치의 대가로 돈을 바친다는 것이 점점 더 불합리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백인 이주민들에게 당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인디언에 관한 문제였다.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른 두 집단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연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물건을 빼앗는 야만인들이 아니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 중에 과거의 신기한 일들을 다룬 것들이 있다. 이 중에는 '어리석은 인디언, 맨해튼을 단돈 24달러에 넘기다' 같이 철저히 백인 중심 시각으로 본 내용들이 들어 있다. 1626년 네덜란드 식민지 장관 페터 미누이트는 맨해튼 섬을 카나시족으로부터 사들였다. 이때 매매 대금으로 준 것이 손도끼, 옷감, 구슬 등으로 네덜란드 돈 60길더, 달러로 환산하면 24달러였다. 이 사건을 두고 어리석은 인디언이 헐값에 땅을 넘겼다고 비웃고 페터 미누이트의 지혜를 칭찬했다. 하지만 인디언들의 입장에서는 땅에 법적인 주인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고 누구든지 살 수 있도록 포용하는 게 땅이었다. 그랬기에 백인들에게도 선뜻 삶의 공간을 내어주고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페터 미누이트는 소유권 개념이 없는 상대에게 문서로 소유권 이전을 확약 받는 사기를 친 것이다. 이렇게 땅 문서를 만들어 소유권을 빼앗은 이유는 나중에 벌어질지 모를,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상대로 한 소유권 분쟁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에 진출하는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백인 세력들에 대해 네덜란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백인들이 정착한 초기부터 미합중국의 기틀이 튼튼해지기까지의 시간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동체가 소멸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원주민 공동체에 절망의 쐐기를 박은 것은 다름 아닌 대륙 횡단 철도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폭발적으로 놓인 철도였다.

철도 전문 변호사 링컨, 대륙 횡단 철도를 꿈꾸다

독립을 이룬 신생국을 이끄는 사람들에게 원주민 문제보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닥쳤다. 산업적 이해관계가 현저히 다른 두 지역의 갈등이 점점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공업을 주산업으로 하는 북부와 대농장 위주의 농업 생산을 위주로 하는 남부가 심상치 않은 갈등을 보였다. 남부의 대농장은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시킨 흑인 노예들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신생국 아메리카의 정치적 중심지는 워싱턴을 비롯한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이 있는 동북부 지역이었고 이곳은 경제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 동북부의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들은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바랐다. 자본가들은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 자유로운 고용, 낮은 세금을 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북동부의 이해를 대변하는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민주당은 북부 지지파와 남부 지지파 의원들의 갈등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가 불투명해졌다. 남부 지역의 권력자들은 링컨이 당선된다면 연방을 탈퇴해 독립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했고, 실제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했다. 곧이어 우리가 남북전쟁이라고 부르는 내전이 시작됐다.

▲ 에이브러햄 링컨
1859년 8월 14일,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서 아이오와 주 카운실 블러프스의 퍼시픽하우스 호텔 앞에서 연설을 끝낸 뒤 한 사람을 만난다. 링컨의 수행원이 철도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친구라며 28세 청년 하나를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렌빌 멜렌 닷지라는 이름의 젊은 철도 기관사는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만나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는다.

"닷지, 철도가 서부로 가려면 어느 길이 최고로 좋은가?"

링컨은 젊은 시절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가게 점원, 뱃사공, 토지 측량, 우체국 일까지 하면서 온갖 고생을 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변호사를 했는데 변호사 자격증 역시 독학으로 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살생을 싫어해 사냥이나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가족이나 지인들은 게을러서 댄 핑계라고도 했다. 예수조차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했듯이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주변에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천성적으로 책읽기를 좋아했던 링컨은 각고의 노력 끝에 변호사가 되었지만 변변한 학벌이 없는 상황에서 2류 변호사에 머물러야 했다. 한국에서 상고 출신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자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그룹들이 근본 없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서 인정할 수 없다고 아우성치던 것을 떠올리면, 링컨의 2류 변호사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가방끈이 짧았던 한국의 변호사가 부산에서 세무 관련 변론을 맡았다가 돈 안 되는 노동 인권 변호사로 나선 반면 링컨은 철도 관련 변호사였다. 1857년 시카고, 록아일랜드, 퍼시픽 철도 회사는 소송에 휘말린다. 이들 세 회사를 위해 록아일랜드 브리지 컴퍼니라는 회사가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철교를 건설했는데 증기선이 철교의 교각을 들이받아 불에 타 가라앉는 사건이 발생했다.

증기선 선장은 철교 건설 회사를 고소했고 이어진 법정 다툼은 선박업자 연합과 철도 회사 연합의 싸움이 되었다. 이 재판에서 철도 회사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있었다. 링컨은 변호사가 되기 전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중에는 선박의 조타수 경력도 있었다. 강물의 속도와 교각의 간격 등을 면밀히 조사한 뒤 배가 충돌한 이유는 조타수의 실수 탓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운하의 배를 위해 철교를 해체하게 되면 국가의 발전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오와, 일리노이가 무엇 때문에 150만 명이 모여드는 거대 지구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라고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운하업자들이 세인트루이스 시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의 변론에 설득당한 배심원들은 철도의 손을 들어주었다.

철도에 대한 링컨의 관심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 수도 있다. 링컨이 23세의 젊은 나이에 일리노이 주 의회 후보로 나선 선거 유세장에서 내건 공약은 일리노이 강과 스프링필드를 잇는 철도 건설이었다.

"일리노이 주민 여러분! 철도야말로 기상 조건에 제약받지 않는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입니다!"

정계 입문 초짜 후보 링컨은 보기 좋게 낙선했지만 철도가 신생국 아메리카를 세우는 가장 튼튼한 기초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어느새 링컨은 철도와 관련해서는 최고의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고 철도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링컨이 대통령 선거 유세 중 최고의 철도 기관사를 만나게 되자 대륙 횡단 철도라는 자신의 꿈을 대놓고 드러낸다. 링컨의 '돌직구'를 받은 닷지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답변한다.

"이곳을 출발해서 플랫밸리 외곽으로 빠지면 됩니다."
"그 이유는 뭔가?"
"철로는 위도 42도를 따라 건설하는 게 가장 경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카운실 블러프스가 출발역으로 적격입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출발한 철도가 이곳까지 연결됩니다. 여기부터는 플랫밸리를 따라 로키 산맥까지 일직선으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닷지는 록아일랜드 철도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서부로 이어지는 최고의 노선을 찾아 탐사했던 내용을 링컨에게 설명했다. 링컨은 서부로 향하는 철도 노선에 대해 갖고 있던 궁금증을 모두 털어놓았고 둘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철도의 나라, 미국

영국이 철도의 종주국이었지만 사실 그 자리는 미국의 몫이 될 뻔했다. 미국에서도 궤도를 이용한 교통수단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었고 증기기관차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뉴저지에 사는 존 스티븐슨은 1825년 자신의 집에다가 시험용 궤도를 놓고 기관차를 운행했다. 공교롭게도 영국의 철도 개척자 조지 스티븐슨과 이름마저 유사하고 이들의 아들들은 부친의 가업을 이어 철도를 확장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는데, 둘 다 로버트 스티븐슨으로 이름이 같다.

1825년 영국의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세계 최초의 철도로 인정받고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노선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철도의 세계를 열었다. 그러나 미국도 1827년 최초의 철도 회사인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 사를 설립하고 1830년 운행을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영국과 미국에서 철도가 개통된 셈이다. 철도의 첫 테이프를 영국이 끊긴 했으나 철도망과 철도 기술은 미국이 영국을 앞질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철도 기술의 모태가 된 공기 브레이크 장치, 곡선 구간에서 운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보기 대차, 자동 연결 장치, 침대차나 고급 객차 같은 것들은 모두 미국 철도가 만들어냈다. 1830년부터 폭발한 미국 철도망엔 1850년이 되자 1만4500킬로미터 이상의 철도가 놓였다. 그리고 매년 평균 3200킬로미터씩 증가했다. 매년 한국 철도 노선 전체 길이에 육박하는 노선이 생긴 셈이다. 1860년에는 4만8960킬로미터의 철도 노선이 운행됐다. 같은 시기 1만5000킬로미터에 불과했던 철도 종주국 영국 전체 노선의 세 배를 넘어 세계에서 최고의 운행 길이를 갖는 철도의 나라로 탈바꿈한 게 미국이었다.

▲ 미국 최초의 철도 회사인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 사의 철도(TOM THUMB) 모습. ⓒwikipedia.org

동부에서 철도망이 생겨나자 사람들은 대륙의 서부 끝까지 도달하는 횡단 철도를 꿈꿨다. 하지만 정작 대륙 횡단 철도 계획이 발표되자 그 어마어마한 계획이 현실화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또 횡단 철도 이야기가 나온 뒤 30년이 지나도록 실질적으로 진척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링컨이나 닷지 같은 사람들은 대륙 횡단 철도가 분열된 연방을 이어주는 실밥이자 강력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임을 간파하고, 엄청난 계획을 실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광활한 서부를 개발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위해서도 철도는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리고 나날이 발전하는 철도 기술은 이제 대륙 횡단 철도에 도전해도 될 만큼 발전해 있었다. 대륙 횡단을 위해서는 가파른 산맥들을 넘어야 하는데 특히 서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높이 4400미터, 너비 105킬로미터의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산을 오르는 데 충분한 힘을 가진 기관차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동 장치였다. 급경사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할 경우 열차는 참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에서 열차가 운행되었을 때 객차의 형태는 역마차를 이어 붙인 형태였다.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객차에서 객차로 건너갈 수 없는 구조였다. 이때의 객차 제작은 역마차를 만드는 공장의 몫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에 만들어진 객차들에는 마부가 필요 없는데도 마부석이 있는 것들도 있다. 증기기관은 엄청난 힘을 내고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를 기록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은 열차를 세우는 일이었다. 가속이 붙은 질량체가 제대로 저항을 받지 못하는 구조라면 아무리 기세 좋게 달릴 수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철도 시대 초기, 열차의 구조

여기서 잠깐 초기의 증기기관차를 비롯한 객차에는 어떤 승무원들이 탔는지 살펴보자. 우선 증기기관차를 운전하는 기관사가 필요하다. 각종 밸브와 조정 장치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옆 좌석에는 부기관사가 타고, 기관사가 보지 못하는 시야를 확보해준다. 증기기관차 뒤에는 연료인 나무나 석탄, 또 증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을 가득 채운 탄수차가 연결되어 있고 화부가 탄다. 화부는 보통 두세 명이 타는데, 기관사의 명령에 따라 화구에 나무나 석탄을 채워 넣거나 부족한 물을 계속 공급해 주어야 한다. 객차에는 한 명씩 제동수가 탔다. 이들은 바퀴에 연결된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기관사가 신호를 하면 일제히 손잡이를 당겨 끝에 연결되어 있는 블록을 바퀴와 마찰시켜 세우는 원시적 방법이었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열차에서 기관사는 객차의 제동수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제동을 걸거나 해제하라고 신호를 보냈을까?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소리의 횟수에 따른 일정한 규칙을 정해 열차의 맨 뒤에 연결된 제동수라도 기관사의 지시에 따를 수 있게 했다. 이것을 철도에서는 기적 전호라고 하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철도 현장에 남아 있다. 기적 전호라고 부르는 기적 신호는 짧게(0.5초), 보통으로(2초), 길게(5초) 하는 신호의 길이와 이것들을 조합해서 수 십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기관사가 열차 출발을 독촉하는 신호는 짧게 한 번, 보통 한 번이다.

현재 이런 기적 전호들은 현장에서 쓰이지 않는데 어이없게도 기관사들의 직무 교육 때나 부기관사들이 봐야 하는 기관사 시험에는 문제로 출제되기도 한다. 2007년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주관하는 철도운송산업기사 시험에 응시했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시험 자리에 앉았다. 감독관이 차량 관리원을 호출하기 위한 기적 전호 방법을 물었다. 십여 년 승무를 해오는 동안 무전기를 이용하지 기적 신호로 차량 관리원을 부른 적이 없고 기적 전호는 19세기의 유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월 3만 원의 자격증 수당을 포기할 수 없어 "보통으로 네 번이요"라고 양순하게 대답한 적이 있다.

거대한 산맥을 넘어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객차마다 달라붙은 제동수가 손잡이를 당기는 방식으로는 열차가 달릴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1867년 미국의 발명가인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자동 공기 제동 장치라는 획기적인 제동 장치가 열차에 장착된다. 객차마다 공기관을 연결해 공기의 힘으로 브레이크 장치를 작동시켜 속도를 제어할 수 있게 되자 열차의 안전도는 대폭 향상됐다.

객차의 수준도 좋아졌다. 지붕이 없었던 객차도 있었는데, 겨울에는 속도를 올릴수록 지독한 추위를 체감해야 했다. 설사 지붕이 있더라도 나무로 짜인 객차에는 냉난방 장치가 없어 여행객들은 단단한 각오를 하고 열차에 올랐다. 기관차에서 튄 불똥이 객차에 옮겨붙어 화재 사고로 생명을 잃기도 했다. 긴 나무의자에 앉아 덜컹거리다 보면 사람들은 허리부터 엉덩이를 비롯한 온몸에 통증을 느껴야 했으며 쥐가 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증기 기관차가 달리는 모습. 열차가 달리는 내내 기관차의 바로 뒤에 앉아, 내뿜는 연기와 불똥을 뒤집어쓰며 달려야 하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장거리 철도 여행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wikipedia.org

영어의 관용적 표현 중에 "Wrong side of the tracks"란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그들의 거주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초기 철도 시절 제일 값싼 3등석 칸인, 기관차의 바로 뒤에 연결된 객차를 뜻하는 말이었다. 열차가 달리는 내내 기관차의 바로 뒤에 앉아, 내뿜는 연기와 불똥을 뒤집어쓰며 달려야 하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장거리 철도 여행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초기 철도 시대에 운행된 열차의 1등 칸은 당연히 기관차와 제일 멀리 떨어진 맨 뒤쪽에 연결되어 있었다. 1등 칸 뒤에는 제동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차장차를 마지막으로 연결했는데, 차장은 이 차장차에서 1등 칸으로 가 손님들의 수발을 들고 열차 뒤의 풍경을 보고 싶어 하는 높으신 분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모든 열차의 특실은 기관차의 반대쪽인 맨 뒤에 달려 있는데, 인간의 꼬리뼈처럼 기능이 없어져 버린 증기기관차 시대의 흔적이다.

그랬던 3등실 객차에도 지붕이 만들어졌고 난방을 위한 난로나 증기 보온 장치까지 설치되었다. 식당 칸도 설치되었고 침대차와 초호화 객실들이 연결되었다. 불과 십여 년 만에 열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제 아메리카 대륙을 꽉 옭아맬 철도, 19세기 인류의 위대한 도전인 아메리카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이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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