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서울시는 문화재청에 일방적으로 철거 계획을 통보한 뒤 곧바로 철거에 돌입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의 즉각적인 철거 중지 요청도 소용없었다. 문화재위원들은 서울시를 방문해 항의하려 했으나, 시는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힘겨루기 끝에 서울시는 결국 철거를 일시 중단한 적도 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서울시가 청사 철거를 위해 표면으로 내세운 논거는 "일제 시대 건물은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잔재 청산만큼 대중에게 호소할 만한 재료가 없었음은 충분히 수긍이 된다. 필자 역시, 경복궁 안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환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은 조선 왕조 600년을 상징하는 궁궐 내부에 지어졌던, 왕조의 맥을 끊어버렸던 건물이다. 당시 민중에게는 폭압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기도 했다. 그렇기에 경복궁의 원형을 보존하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것은, 총독부 건물이 가졌을 건축적 가치를 뒤엎을만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가치가 총독부 건물 철거에는 유의미했단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식민 시기에 만들어진 모든 건물의 철거를 주장하는 것이 옳을까. 이제는 이런 단편적 이유가 아닌,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할 시점인 듯하다. 아래와 같은 사례를 보며, 우리가 한 건물을 철거할 때 어떤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지 생각했으면 한다.
▲ 서울시의 청사 철거에 대해 문화 유산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었던 2008년 8월, 서울시는 태평홀을 중장비를 동원해 해체하고 말았다. 가운데 일부 헐린 부분이 태평홀이다. 사진은 2008년 8월 26일. ⓒ연합뉴스 |
매국노가 지은 가치 있는 건물, 철거냐 보전이냐
우선 질문 하나. 망해가는 국가의 국모의 삼촌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였던 이가, 그의 딸을 위해 한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 과연 보전해야 할까.
'매국노'계에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윤덕영 이야기다. 윤덕영은 순종 황제의 부인 윤황후의 큰아버지, 즉 외척이다. 그는 외척이라는 지위를 등에 엎고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을 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카인 윤황후는 한일합방을 막으려 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지만, 윤덕영은 이를 빼앗아 한일합방 도장을 찍었다.
순종의 일본 왕실 참배를 성사시킨 이 역시 윤덕영이다. 내선일체를 내세웠던 일제는 순종의 일본 왕실 참배를 원했고, 고종과 순종은 일본 왕실에 조선이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우려해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윤덕영의 힘으로 참배는 성사됐으며, 이후 윤덕영은 고종 독살설의 주동 인물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런 윤덕영이 지은 건물이 있다. 매우 거대하고 호화로워 '조선의 아방궁'이라고 불리었던 대지 1만 평(건물 600평)에 달하는 옥인동 저택이 그것이다. 윤덕영은 멸망한 국가의 궁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의 아방궁에 천수를 누리려 했다.
▲ 1920년대 서울 종로 옥인동에 있던 윤덕영 대저택 전경. |
윤덕영은 1938년에는 자신의 저택 아래 동네에 딸을 위한 2층 벽돌집을 지었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고 집이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도 중국식 건축기법이 섞인, 건축적으로 나름 의미 있는 건물이다.
서울시 구청사 철거를 위해 당시 서울시가 내세웠던 논거, 즉 '일제 잔재 청산'이 그리 중요하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도 윤덕영이 지은 건물은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이 건물은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고(故) 박노수 화백이 평생에 걸쳐서 가꾼 곳이다. 고인이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시에 기증한 곳이기도 하다.
요컨대, 윤덕영의 건물은 매국노의 건물이라는 '역사성'과 박노수 화백이 손수 가꾼 곳이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박물관이라는 '장소성'이란 전혀 다른 두 가치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만약 역사성이라는 가치, 즉 일제 잔재 청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철거가 마땅하다. 그러나 이 건물을 철거하는 데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윤덕영의 가옥이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나름의 긍정적인 장소성을 구축하였단 것을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처럼 하나의 건물을 철거하려 할 때엔, 다층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건물에 얽힌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겠으나, 그 건축물이 쌓아온 그리고 주변과 관계한, 사람과 연접한 관계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역시 중요하다. 역사적 건물 그 차제로서의 가치를 혹여 가늠할 수 없다면, 우리보다 더욱 현명한 후손에게 결정을 맡겨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윤덕영이 딸을 위해 만든 가옥. 박노수 화백은 이 건물을 수리해 전시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했고, 현재는 서울시 문화재 1호로 등록돼 있다. ⓒ김경민 |
상하이, 일제가 쓴 건물도 후손 위해 보전하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상하이는 많은 수난을 겪었고 많은 중국인과 상하이에 있던 외국인이 크나큰 피해를 당하였다. 당시 일제에 의해 점령되어 제국주의를 위해 사용된 건물들이 현재도 상하이에 남아있는데, 이중 일본 해군 본부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다.
겉으로 보기엔 상하이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특색 없는 건물이지만, 이 건물은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를 중국 사회에 던졌다. 바로, '일제가 사용했던 건물, 즉 식민 잔재이자 미학적으로도 별반 뛰어나지 않은 건축물을 과연 보전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다.
이 건물 철거를 두고 뜨거운 찬반 논쟁이 일었다. 일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가차 없이 철거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치욕의 역사 또한 엄연한 역사임을 인정하고 건물을 보전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중국 학계는 많은 논의를 거쳐, 결국 잊고 싶은 역사를 지닌 건축물 또한 보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건축적 가치나 미학적 가치가 없더라도 후손을 위해 역사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중국은 지금도 이를 실천하고 있다. ①
▲ 과거 일제의 해군본부로 사용되었던 건물. ⓒ루안 팡 교수 |
이처럼 한 건물을 철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윤덕영 가옥을 철거하지 않았다. 윤덕영 가옥이 일제 잔재이므로, 이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우리 사회가 동의하지 못한다면, 2008년 서울시의 청사 철거 논리에 대해서도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했어야 한다. 중앙 정부마저도 당시 강력히 철거에 반대하였는데도, 시 정부가 독단적으로 철거에 들어가는 일들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P.S. 일제 잔재는 단순히 관련 건물을 부수면서 청산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나 시키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옳다. 필자는 과거에 서울대학교와 동경대학교간 프로그램으로 동경대 교수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를 대상으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해당 국가가 전후 일본에 대해 배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기에, 온정적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위의 학생들은 그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일제 잔재 청산을 보여주기 차원에서 건축물을 부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같이 외려 그런 건물들을 보존하면서 치욕스러운 역사마저도 재교육 현장으로 사용하고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게 보다 낳은 해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 필자 주석
① Feng, Luan., Wang, Yiyun., 2009, Debates and Compromises: Conservation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rn Old Hongkou in Shanghai, Planning Theory & Practice, 10(2): 27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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