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대로 가보니 청계천 변 길가 3층 빌딩에 그의 작업장이 들어 있었다. '한 어패럴' 대표인 한상민 씨가 재단 중이던 작업대에서 돌아서 인사를 건넸다. 그의 뒤로 여러 장 겹쳐져 천정 높이 걸린 패턴 본들이 보였고, 널따란 작업대 위에 색색가지 천이 놓여 있었다. 패션쇼에 올릴 샘플 옷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의류 임가공제조업체 '한 어패럴'은 4년 전에 시작했다. 패션인답게 그의 머리나 옷은 세련된 스타일이다. 사실 한 대표가 너무 젊어 보여, 정말 이 분야 경력만 수십 년 이상이라는 게 맞는지 재차 물었더니 겸연쩍어한다.
"제가 오래 일해 온 경력자 중에서 막둥이죠. 30년 넘게 일해오고 있습니다. 사실 이쪽은 입문하는 시기가 다들 이른 편이니까요. 저는 10대부터 일했습니다. 그런데 맞춤의상부터 걸어온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제 나이 또래로 볼 때 패션계 유입이 제일 많았던 시기였지요. 단품기술자·부분기술자·토탈 기술자로 이렇게 나뉘는데, 사실 어떤 기술을 배우고 숙련이 되었는지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토탈 기술자'입니다."
▲ 한상민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
그는 자신이 '토탈 기술자'라는 사실을 아주, 아주 분명히 한다. 의류봉제업에서 '토탈 기술자'란 옷 한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식으로 만들 줄 아는 능력자를 말한다. 토탈과 단품은 큰 차이가 난다. '단품'이란 전체 옷 중에서 한 부분 즉, 셔츠로 치자면 소매 커프스만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술이 오래된다 해도 소매 커프스만 생산하던 사람이 옷 한 벌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가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들어도 '단품'은 자립이 어렵습니다. 옷을 전체 만들 수 있는 기술자라는 게 중요하지요. 경력이 길어도 토탈로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힘듭니다. 과정도 다 다르고요."
그는 여성복 전문으로 재킷, 스커트, 바지, 블라우스 등 티셔츠만 빼고는 전부 다 만든다고 한다. 그는 현재 옷을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시스템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전에는 의류업체의 샘플실과 개발실에서 일하면서 크레송, 타임, 오브제 등 이름난 브랜드 옷을 다 만들어보았다. 샘플을 다양하게 만들어본 경험은 이 업계에서는 굉장한 장점이 된다. 따라서 한 대표는 기술 응용 면에서 남에게 뒤떨어진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한다. 한 대표가 만들어낸 옷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평하는지 궁금하다.
"평가가 나쁘지 않지요. 주문자의 설명을 충분히 잘 듣고 생산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생산자들에게 샘플을 정확히 만들어서 보여주고 지시 내리고 관리 들어가니까요. 옷에 대한 설명을 정확히 하지요. 이 박음질은 이런 느낌으로 해 달라. 완성선은 이렇게 꼭 지켜 달라 등 느낌을 제대로 살려달라고 하지요. 샘플 느낌대로 숙련자들은 잘 알아요. 그런 게 서로의 스펙과 신뢰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니까요."
그런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옷들에 한 대표가 만족하는지 물어보았다. 작업지침이나 설명에 따라 제대로 만족할 만큼 되어 옷이 생산되는지?
"옷이란 금형이나 첨단제품과 달라서 그렇지 못해요. 원단 소재란 게 열을 가하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거든요. 완벽은 없습니다. 그것에 가까이 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요.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수치대로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심을 붙이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테이프를 치면 줄어들고 그렇지요. 옷을 고급스럽게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요즘은 1주일 만에 여러 아이템이 개발 생산됩니다. 아주 스피디하게 개발 생산 전달되니까 차분하게 옷을 만들 시간이 없습니다. 스피드도 경쟁, 가격도 다 경쟁입니다. 거기서 녹아나는 게 생산현장의 사람들이지요."
창신동 일대 공장에서는 대부분 밤 9시, 10시까지, 혹은 새벽까지 미싱을 돌린단다. 하지만 그는 저녁 8시를 넘지 말자는 원칙을 정하고 있다.
"제 몸이 지치면 옷 공정 시스템을 잘 관리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좀 특이하죠? 사실 5일 근무하려고 해봤는데, 공장이 유지가 안 되더라고요."
ⓒ프레시안(손문상) |
"17살부터 이 일을 했지요. 성향 맞느냐 그럴 거 따질 수 없었습니다. 그전에도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거든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안이 많이 어려웠어요. 이 직업이 돈도 많이 벌고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다고 해서 그냥 배운 거죠. 그게 목적이었지요."
그의 30년 경력은 처음 맞춤가게 막내 노릇으로 시작되었다. 막내 일은 단추를 사오고, 안감를 사오고, 부자재를 사오는 심부름을 도맡는 것이다(지금은 대학 나온 초급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이라고, 그가 덧붙인다). 어떤 부자재가 들어가는지 알아야 옷을 만들 줄 알게 된다. 심부름 반년쯤 하다 보면, 손바느질을 하게 해준다. 옷의 밑단을 손으로 꿰매고 단추를 달고 단추 구멍 만드는 등 '마도메' 일을 하고 나면, 시다 일로 넘어갈 수 있다. 박음질 보조는 다리미로 옷 부속을 꺾어서 다려주고 가름솔을 해서 미싱 일이 제대로 되게 한다. 그런 과정을 온전히 다 거치면 드디어 '야망'의 미싱에 앉을 수 있고, 미싱사는 '선생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패턴을 뜰 수 있고 재단을 할 수 있게 되면,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오픈할 수도 있게 된다. 한 대표는 이런 과정을 다 거치는데, 보통 10년은 예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요, 10년은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아이롱으로 다림질하고 천을 꺾으면서 손으로 만져보면 어떻게 박음질해야 하는지 느낌이 옵니다. 손끝에 느낌이 다 있는 거죠! 제가 교육생들한테 '내 손끝에 있는 감각을 다 가져가라' 그랬죠! 30년 넘는 노하우가 내 손끝에 축적되어 있거든요."
교육생들에게 가르치는 대목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한 대표의 표정은 더욱 밝아진다. 그는 다름 아닌 패션아카데미의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2006년 창신동에 '참여성 복지터'에서 운영하는 수다 공방이 문을 열었다. 당시 전순옥 대표는 '동대문 패션 기술학교'라는 이름으로 봉제기술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가동해 봉제인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기술을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봉제기술을 배우려는 모든 이에게 문은 열어놓았지만, 봉제전문가를 체계적으로 키우기 위해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초급반, 중급반, 고급 심화반으로 나눠서 단계별로 맞게 가르쳤다. 2010년에는 지식경제부로부터 '사단법인 한국 패션 봉제 아카데미'로 설립 허가를 받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일찍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작한지 두 달 만인 그해 8월부터 지금껏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햇수로 8년째다. 그는 옷 만드는 기술자로 30여 년을 성실하게 걸어왔으니, 패션 아카데미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당시 이 분야 실무 경력이 있는 전문 강사를 찾던 중에 그가 적격자로 낙점된 것이다.
"처음엔 토요일 수업에만 갔는데, 이름 석 자도 말 못했어요. 전부 여성분들이었지요. 쑥스럽고 얼굴도 빨개지고…. 이쪽에서는 그래도 옷 잘 만든다고 했는데,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싹 다르더라고요. 정신이 없어져요. 앞에서 스피치하고(강연하고) 진행하고 표현한다는 게 안 되더라고요.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는데,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낫습니다. 하하하…."
그의 첫 수업시간 제자들은 15명이었다. 다 누님뻘 되는 30년 이상 경력자들로 단품 봉제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려고 배우러 나선 이들이었다.
"제가 '토탈 기술자'로 하이패션 쪽 기술자이니, 가르칠 수 있게 된 거지요. 심화반에 투입되었는데 그분들이 워크숍에 가서 '한상민 선생님하고 같이 하면 모든 것 배우는 게 가능하겠다'고 추천해주면서 상근하게 되었어요. 초급, 중급, 고급반, 심화반 다 가르쳤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운 게 참 많습니다."
4년간 상근을 마치고, 지금은 주로 심화반 수업을 맡아서 한다. 또한, 학생들과 함께 매년 연말에 아카데미에서 연례행사로 여는 패션쇼 준비를 하느라 요즘 더욱 바쁘다. 한 대표는 아카데미와의 '만남'이 행운이었고, 전순옥 국회의원이 처음부터 활동할 수 있도록 제안해주고 배려해 주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변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그는 자신이 가진 기술에 대해 새롭고도 놀라운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지난 8년 세월 동안 교육도 많이 받은 똑똑한 분들이 제 수업을 듣고 기술을 배우려는 것을 보면서 '왜 그러나?' 싶었지요.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기술을 익힌 것뿐인데, 그분들의 진지하고도 모범적인 자세를 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기술을 자기만 제대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술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 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의상 공부하려고요. 의상 수업은 3학년부터 있습니다. 내 전문적인 기술에 이론을 가미해 가르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의상은 제 직업과 연계된 부분이니까 체계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싶어요. 현장에서는 감각과 느낌으로 옷을 만드는데, 어떤 소재가 들어가느냐 등을 이론으로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막상 접해보니 쉽지 않네요. 막, 현기증 나요! 벅차긴 해도 할 수 있겠다 싶어요.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게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제게는 이게 변화인 거죠!"
올해 5월 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는 그동안 '학력을 얻느라' 매일 새벽 4시쯤 일어나 조금씩 공부했노라고 한다. 총각 시절부터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사람이었는데,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고 1시간 더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검정고시 고교 과정은 별로 어렵지 않더라'라고 말할 수 있었다.
패션인 한 대표는 옷 만드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라고 다시 말한다.
"우리 일이 다른 직업군보다 숙련되는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립니다. 옷 만드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물론 부분 봉제·단품 봉제 기술은 시간이 덜 걸리겠지만, 토탈로 다하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리지요. 옷에 대한 이해도 어렵고, 박음질도 소재마다 느낌을 살려서 달리해야 실루엣이 다르게 나오거든요. 시폰이나 실크는 박음질을 곱게 해야 합니다. 외국 다녀오신 분들이 이야기 하는데, 그쪽에서는 미싱하는 이들도 디자이너라고 한다면서요? 아이템 만들어 내는 이들만 디자이너가 아니고, 봉제하는 이도 디자이너라는 게 정말 맞는 말입니다. 만들어보면 압니다. 봉제도 디자이너라는 것을요!"
국회에서 '소공인 지원법'을 마련 중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그에게 큰 희망을 준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동대문에 새로운 기운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왔지만, 법은 좀 더 큰 차원의 일이 아닌가 싶어서다. '드디어 봉제인들에게도 국가가 눈길을 주려나보다!' 가슴이 울컥해지기도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
"저희는 걸어온 길 자체가 눈물입니다. 수십 년간 일해 오면서 사실 소외된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다른 직업군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분들과 비교했을 때도 저희는 소외감을 느끼지요. 그에 준하는 대접을 못 받았으니까요. 봉제산업이 7,80년대 국가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 정부에서는 IT에만 관심과 지원을 해왔잖습니까. 국가적인 편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른 직업군들은 연봉도 수당도 올라가고 그러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습니다. 4대 보험, 퇴직금 등 그런 보장제도가 없지요. 30년 경력 기술자들도 능력에 따른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2,30년 경력자들이라도 한 달에 200만 원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150만 원 받기도 어렵습니다. 근로기준법도 제대로 못 지킵니다. 우리 패션 쪽은 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 아닙니까."
하지만 정부에서 지원해준다면 그냥 받겠다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이제는 더욱 능동적으로 봉제산업 발전에 나서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 주변에서 조금씩 사업자 등록하기 시작하는 추세입니다. 우리도 그냥 지원받는 것은 싫습니다. 우리 쪽에서 대안을 내놓고 이런 모델로 사업하고 싶다 하면서 지원책 부탁해야지요. 지금까지 단합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 노력이 부족해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요즘 여러 생각이 듭니다."
연이어 한 대표는 봉제인들이 저임가공의 현실을 얼마나 열심히 헤쳐나가려고 하는지 열성적으로 말한다.
"동대문 이쪽에 봉제공장이 2~3000개 운집해 있습니다. 서로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경쟁하는 것을 보면 다들 절실하다는 말이거든요. 조금만 일을 안 하면 불안하고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렵습니다. 도매 물건 파는 곳에서 500원, 1000원 차이는 크거든요. 한 장에 500원 차이면, 하루 100장에 5만원 차이가 납니다. 하루 일당이 5만 원 차이면 상당히 큰 거죠."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 안에서 산업역군으로서 봉제인들이 기여한 바는 이미 역사적으로 승인을 마친 상태다. 또한 세계 속에서 한국 봉제 근로자들의 근면성과 실력에 대한 성가도 드높다. 세계적인 의류업체인 '아메리칸 어패럴'의 대표인 도브 체니는 자신의 성공을 얘기할 때 두 명의 한인 봉제업자를 거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체니가 '아메리칸 어패럴'을 창업하여 1989년 LA로 옮겨와서 일을 시작했을 때 그곳의 한인 봉제업자들은 '단기'로 납품 일을 맞춰주는 최고의 협력자였다는 것이다. 이때 이 회사 광고 포스터에 '한 명의 유대인과 두 명의 한국인이 만드는 옷'이라는 문구가 있었을 정도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대우를 못 받는 현실이 다른 모든 봉제인들과 더불어 서글프고 힘겹다. 그래서 국회에서 발의된 '소공인 지원법'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이다.
"'소공인 지원법'으로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같이 부가가치는 크지만, 자본은 없는 생산업자들에게 낮은 금리로 융통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년 내내 일거리가 꾸준하지 않으니, 일정한 평균치가 없어서 대출받는데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 기준으로 해서 자금을 저리로 지원해 사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일하는 공간도 돌아보면 참, 말이 안 나옵니다. 공간 자체에서 냄새도 나고, 지하에다가…. 경력자들이 아파트형 공간을 지원받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패션 쪽에서 오래 일하면서 역할을 했다는 분들에 대한 예우가 있었으면 하는 거지요. 우리가 보면 알거든요. 정부가 품질 심사 거쳐서 하이 퀄러티(고급 기술)를 가진 분들을 한 공간에 모셔서 한국제품 우수성 홍보하기 위해 지원한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경력자들의 기술전수 과정도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옷 만드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한 대표에게 지금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옷과 동대문 옷을 비교해 보자면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진다.
"소재 차이도 있고요. 그런데 무엇보다 기업체 사장의 마인드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기술자들은 이탈리아 기술자 못지않습니다. 우리도 시스템만 만들어지면, 옷을 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류 쪽 사장들은 저임 가공으로 생산하려 하고 소재도 비슷하게 그냥 카피형식으로 해서 브랜드로 내니까 시장질서가 무너지는 것이지요. 또 그렇게 만들어 고가로 내놓으니, 소비자한테 호응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 옷에 우리가 뒤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봉제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이거든요. 그 사람들도 외국 기술자한테 줘서 OEM으로 만드는 거 아닙니까? 다 이탈리아 기술자들이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말이 나온 김에 할 말을 하겠다는 듯이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이상봉 등 우리나라 이름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들 옷 한번 보세요! 다 어디서 만듭니까? 모두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만듭니다! 옷을 만드는데 집중력을 가지고 기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예우를 해주느냐, 옷을 만드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거죠! 전 정확히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옷 10벌을 만들어야 먹고 사는데, 그쪽 기술자들은 3벌만 만들어도 가능하거든요. 그러니 그 집중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 봉제기술을 높이는 가장 빠른 길은 기술자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옷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늘을 잡고 돈 걱정을 하면 '정신적으로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동대문이 빨리빨리 가서 좋다고 하는데, 한국의 대표 시스템 '빨리빨리'. 이것을 바꿔야 생산품의 질이나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에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 봉제 기술력이 상당히 짱짱한데, 그렇다면 디자인 쪽은 어떤지?
"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창의성보다 카피(복제)? 사실 솔직해야지요. 우리도 중국 못지않은 '카피 국가'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유학 갔다 온 사람들 많은데 업체에서는 안 씁니다. 그냥 동대문 시장 조사해서 카피 쪽으로 가는 거죠. '카피 선진국'입니다. 기업이 '상술' 쪽으로만 가 있는 것이죠. 옷에 가치성을 두지 않고…. 고객 만족이 아니라, 돈에만 눈이 떠져 있으니 말입니다. 의류 쪽 중소기업들도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카피해서 만들면 개발비가 절감되고 신속한 생산이 가능하니까 그쪽으로만 가려는 거죠."
ⓒ프레시안(손문상) |
"이제 우리 세대가 지나면 기술자가 있을까 싶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영국 같은 곳에서 기술자를 예우하는 것을 보면 차이가 많이 나지요. 그들은 부를 축적하면서 삶을 즐긴다는데, 과연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되면 국가 차원에서 예우받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전문 직업군이면서도 국가 차원에서 대우를 못 받고 있는데, 사실 봉제는 수작업으로만 가능한 거거든요. 자동화가 안 됩니다. 영원히 안 되는 것입니다. 옷은 해마다 기술과 소재가 바뀌는 것인데, 디테일하게 들어가는데,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지요."
한 대표가 생각하기에 이 직업의 큰 장점이 딱 한 가지가 있다.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는 기술이 바로 노후 대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활동을 70세까지 할 계획입니다. 건강한 경제활동을 그 정도로 보고, 건강관리 잘해서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인문제로 시끄럽지 않습니까. 저는 계획을 잘 세워서 신세 지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고요. 우리 기술은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공무원이나 다른 사업자들처럼 노후대비를 충분히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의 기술이 나의 노후 대책이라고 보고 그런 부분을 잘 관리해서 토탈 기술자로 계속 일하면 활동할 게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의 공간은 넓고 깨끗해서 일하기가 좋은 환경이었다. 깨끗하고 산뜻한 공간에서 일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룬 셈이라 임대료가 부담되지만, 어떻게든 이 공간을 잘 꾸려나가고 싶다. 그러나 빌딩 안에 이런 공간을 얻는 자체가 어렵다고 한다.
"먼지가 많이 나니까요. 엘리베이터가 있는 빌딩에서는 옷 만드는 공장에 세를 안 주려고 해요. 재단 칼이 돌아갈 때 먼지가 많이 생기거든요. 겨울옷, 특히 캐시미어나 울 소재가 먼지가 많아요. 보세요! 여기 바로 이렇게 쌓이거든요."
그가 테이블 위로 먼지를 쓸어 보인다. 문득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 공장 천정에서 보았던 먼지가 떠올랐다. 지붕 틈으로 새어 들어온 빛 사이로 퍼지던 그 먼지들. 지금 그 먼지의 두께는 많이 얇아졌을까? 다행스럽게도 봉제공장에 쌓이는 먼지를 쓸어내려는 이들의 노력은 점점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봉제인 스스로 옷 만드는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한상민 대표는 날렵하게 다시 재단대 앞으로 몸을 돌린다. 패션쇼에 나갈 드레스를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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